영주시 문화와 산행.

대학교 동문 3명과 함께 1박2일 일정으로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 를 돌아보면서.(1)

용암2000 2021. 12. 30. 22:09

 

2021년 12월 27-28일.(1박2일)

 

1, 첫째날 : 12월 27일.(월요일)

 

1) 여행의 개요.

작금 오미크론이라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의 기성으로 청정지역에 있는 고택 체험이나 한번 하자는 이야기로 서울에서 거주하는 3명의 대학교 동문과 협의하여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는 선비촌에서 하루밤 유숙하기로 한다.

일정은 12월 27일에서 부터 28일 간 1박2일로 계획을 하면서 서울에서 거주하는 동문들과 첫날(27일) 영주역(榮州驛)에서 12시 40분에 만남을 가지도록 하는데, 서울에서 내려오는 동문들은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KTX 기차를 이용하기로 한다.

대구에서 출발하는 나는 주어진 시간을 맞추어 모닝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영주 Toll gate를 벗어나 영주역으로 들어가는데, 서울에서 내려오는 동문과 반가운 도킹을 가지면서 역의 인접지역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2) 부석사의 관람.

점심식사를 끝내고 영주의 대표적 관광지가 되는 '부석사(浮石寺)' 를 관람하여 보기로 하는데, 나는 부석사를 몇번이나 방문하였지만 제일 최근 방문한 날자는 2012년 6월 9일 고등학교 동문으로 구성하고 있는 백봉회에서 부석사 뒤편에 있는 봉황산(鳳凰山) 산행을 추진 할 때 부석사를 통과하면서 돌아본 경험이 있는 사찰이다.

내가 영주 부석사를 자주 방문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최대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경주 불국사에는 6개의 국보를 보유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부석사에는 5개의 국보를 포함하여 7개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 보고의 사찰이라 하겠다.

영주시가지에서 30분 정도 운전하여 영주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시키고 나서 사찰(寺刹)로 올라가 보는데, 삭막한 겨울 추위가 엄습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어 명성을 가진 사찰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 준다.

 

< '부석사' 입구에 있는 입석 >

 

야산의 산자락 따라 한 모퉁이를 돌아서 들어가면 경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사찰의 관람료를 징수하는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경로(敬老)의 혜택으로 일행은 무료 입장을 하는데, 도로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일주문(一柱門)에 도착한다.

 

< '부석사' 로 들어가는 초입 길 >

 

일주문 전면에는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후면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곳 부석사는 다소 먼 거리에 있는 태백산 지맥(支脈) 보다는 훨씬 가까운 소백산의 영역 중에서 봉황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현판을 보면 볼수록 의심을 품게 만든다.

 

< '태백산 부석사' 로 쓰여 있는 일주문 >

 

< 일주문 후면에 쓰여 있는 '해동화엄종찰' 현판 >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증조가 되시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전이 되는데, 신라 불교는 처음 눌지왕 때 들어와 미미하게 연결되다가 법흥왕 때 크게 발전한다.

더불어 중국 불교를 통하여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宗派性)을 띠게 만드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云爲)하는 종파는 '화엄종(華嚴宗) 및 법상종(法相宗)' 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렸하고 종교의 성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대사의 화엄종이라고 하는데,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대사가 입적할 때 까지 이곳 부석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을 직접 제자들에게 전파하였던 중요한 사찰이라 하겠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좌우를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로 유명한 길로 이어지지만 현재는 노랑색 잎에 다 떨어져 삭막함이 묻어나므로 옷깃을 더욱더 단단하게 여미면서 길 따라 고도를 상승하는데, 도로 왼편 가장자리에 부석사를 알리는 부석사중수기적비(浮石寺重修紀跡碑)이라는 비석을 만난다.

 

< 앙상한 '은행나무' 길을 걸으면서 >

 

< 경내 입구 초입에 있는 '부석사중수기적비' > 

 

이 비석에서 다시 조금 더 올라가면 도로의 왼편에 보물 제255로가 되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만나면서 이곳 당간지주는 높이가 약 428Cm가 되면서 마주보는 2개의 석주 사이에는 약 1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이라 추정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 >

 

또 다시 고도를 상승하면 부석사의 두번째 관문이 되는 천왕문(天王門)을 만나고 천왕문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는 경내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이 되는데, 이곳 관문 앞의 좌우측으로 도로가 만들어져 있으면서 오른편으로 성보박물관과 지장전으로 가는 길이고 왼편으로 관음전으로 가는 길이다.

 

< 두번째 관문이 되는 '천왕문' >

 

< 경내의 입구 오른편에 있는 '지장전' 건물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축대 위에 무명의 세번째 관문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 관문은 일반 사찰에서 있는 금강문과 비슷하지만 내부에는 빈공간으로 남겨져 있고, 그 앞으로 작은 정원과 함께 양쪽으로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 경내의 세번째 관문이 되는 '무명의 문' >

 

< 작은 정원과 함께 하는 '3층석탑' >

 

작은 정원의 뒤편으로 2단의 축대와 함께 2층 루각(樓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루각의 처마에 일주문 현판과 다르게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1층에는 관광객이 이동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면 2층에는 범종루(梵鍾樓)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 전면 팔작지붕으로 건축하고 있는 '범종루' >

 

루각 건물의 특징은 전면에서 바라보면 매우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있는 팔작지붕으로 건축되어져 있고, 1층의 계단을 통과하여 뒤편에 있는 마당에 올라와서 건물의 뒷편에서 바라보면 맞배지붕을 하고 있어 건물의 앞쪽 및 뒤쪽 외형이 다른 이색적인 곡선을 간직하고 있는 루각이다.

 

<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범종루' 후면 >

 

범종루 건물의 뒤편에 있는 작은 마당과 함께 또 다시 높은 축대 위로 2층의 루각이 연속적으로 건축되어져 있는데, 이 루각의 건물 1층에는 '안양문(安養門)'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2층에는 '부석사(浮石寺)'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숨은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안양루' >

 

안양문 건물의 앞 먼발치에 있는 한 지점에서 루각 건물의 2층 처마 밑으로 바라보면 신비스럽게 여섯명의 부처님 형상이 나타나는데, 무심코 한 지점을 순간적으로 통과하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부처님이라 매우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 2층에 보이는 6분의 '부처님' : 2012년 6월 9일 촬영 >

 

그래서 1층의 계단을 이용하여 무량수전 건물이 있는 마당으로 올라가 루각의 뒤편에서 바라보면 루각 처마에 '안양루(安養樓)' 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2층에는 아무것도 없이 빈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단지 지붕을 받치기 위한 기둥의 위쪽에 건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다포식 공포(拱包)가 잘 만들어져 있다.

 

< '안양루' 뒤편에서 바라보는 전경 >

 

< 부처님 형상으로 나타나는 '다포식 공포' 의 공간 >

 

더불어 안양루 바로 앞에 장방형의 배례석(拜禮石)과 함께 국보 제17호 '석등(石燈)' 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부석사 석등은 통일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각 부분의 정교한 조각 솜씨와 전체적 비례감이 매우 아름답고 우아함으로 통일 신라시대의 석조 예술을 가름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 무량수전 앞에 있는 국보 제17호 '석등' >

 

석등의 앞에 있는 마당 가장자리에 부석사에서 최고의 아름다운 건물이 되면서 국보 제18호 '무량수전(無量壽殿)' 건축물이 눈 앞에 머물고 있는데, 이 건물은 한국에서 최초의 목조 건축물로 내려오다가 수년 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極樂殿)' 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에서 발견한 글씨로 최초이라는 수식어를 봉정사로 넘겨진 비운의 건물이 되었다.

 

<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전경 >

 

이곳 부석사 무량수전은 건물의 크기와 역사적 가치로는 극락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건물이 되는데, 무량수전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내부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하고 있으면서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가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이 우수한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봉 형태로써 지붕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해 완만하며 예로 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곳 무량수전은 소위 아홉 량(量)의 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라 하겠다.

오늘 내가 이곳 무량수전을 다시 관찰하여 보는 것은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국립 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셨으며 1984년에 작고한 최순우 선생님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이라는 소설을 생각하게 하는데, 나는 그의 소설 내용이 더욱더 애절함을 느낀다.

 

그의 소설 내용 일부분을 옮겨보면,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 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 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숙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젖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의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 임이 틀림 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調和),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 만을 갖춘 필요 미(美)이며, 문의 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 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젖하고도 너그러운 자체이며,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자 먼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데 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무량수전 앞으로 펼쳐지고 있는 '먼산' >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에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암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義湘大師)이다.

-중락-

 

이렇게 무량수전을 극찬한 최순우 선생님의 소설을 접하고 나서 비록 최순우씨가 머문 초겨울 계절이 아닌 깊은 겨울의 중심에 오늘 방문하였지만, 오늘 내가 그의 발자취를 만들고 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먼산을 바라 보면서 그가 남긴 글을 회상하여 본다.

 

<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에 서서 >

 

그리고 나서 함께 관람을 하고 있는 한 동문과 더불어 무량수전 내부로 들어가 건물 안에 모시고 있는 국보 제45호 '아미타여래불(阿彌陀如來佛)' 을 관람하여 보는데, 일반적으로 사찰의 내부에는 3존불을 모시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 무량수전에는 한분의 불상을 모시고 있다.

 

< 무량수전 내에 모시고 있는 '아미타여래불' >

 

일반적으로 주불을 모시고 있는 불단(佛壇)은 사찰 중앙에 있으면서 좌우 협신불을 모시는 것이 상식이지만, 무량수전 불단은 건물의 한쪽 구석이 되는 내부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시야(視野)는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곳 아미타여래불은 높이 278Cm이며 광배 높이가 380Cm로써 거대한 불상인데. 일반사찰에서 만드는 부처의 재료가 청동이나, 돌, 또는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곳 무량수전의 주불로 만든 재료는 흙으로 즉 소조(塑造)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다.

부처님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은 향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 손가락 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이 큼직하고 얼굴이 둥근편이며 양쪽 귀는 매우 긴편이고 잘록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대형의 소조 불상을 만들 때 만드는 기술도 탁월하여야 하지만 흙을 불에서 구울 때 변형이나 크랙(Crack)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는데, 문제는 보관에도 습도가 높다든지 온도가 일정하지 않으면서 취급이 조금이라고 소흘하게 하면 파손이 발생하고 또한 곤충 또는 쥐 등이 파손을 발생시킬 수 있어 무척이나 관리에 신경을 가져야 하는 불상이라 하겠다.

오늘 무량수전 내부를 더욱더 세심하게 구경하기 위하여 부처님 뒤편 까지 돌아보기로 하는데, 부처님의 뒤편 오른편 및 왼편에는 부처님을 그린 탱화 앞에 재물(財物)을 비치하면서 예(禮)를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통로 벽면에는 수 많은 촛불을 밝히고 있다.

 

< 부처님 뒤편 오른편에 있는 '탱화 및 재물' >

 

< 부처님 뒤편 왼편에 있는 '탱화 및 제기' >

 

< 부처님 뒤편 통로 벽면에 있는 '촛불' >

 

전에는 무심코 바라본 문화재들이 오늘은 그들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인지 할려고 노력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니 더욱더 친근감이 묻어나지만, 다른 동문과의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간단하게 예의를 표현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무량수전 왼편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로 이동하여 본다.

 

< 무량수전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부석' 바위 >

 

전설에 따르면 부석 바위는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 머물면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올 때 의상대사를 사모하는 '선묘(善妙)' 라는 낭자가 의상대사를 찾았으나 벌써 배를 타고 귀국길로 떠나 가므로, 바다에 몸을 던져 용(龍)이 되어 의상대사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토록 도와준다.

그러고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전파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사찰을 건립 할려고 하니 많은 이교들이 방해하자 선묘가 용(龍)으로 변신하여 조화를 부렸는데, 이 바위를 공중에 들어올려 물리쳤다고 하여 부석이라 하였다고 한다.

 

< 부석 바위 아래에 있는 '석불' >

 

이어 마당을 통과하면서 부석사의 전경(全景)을 한번 더 감상하면서 부석사 오른편에 있는 3층석탑으로 올라가 보는데, 이곳 3층석탑은 보물 제249호로 지정이 되면서 높이가 526Cm에 통일 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라고 한다.

 

< 무량수전 오른편 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3층석탑' >

 

< 오솔길에서 내려보는 '부석사' 전경 >

 

이곳 석탑 뒤편으로 연결되는 오솔길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아담한 건물 두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왼편의 건물이 국보 제19호 '조사당(祖師堂)' 건축물이 되고 오른편 건물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취현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국보 제19호 '조사당' 건물 및 선비화 >

 

조사당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매우 작은 전각으로써 건물 내부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건물인데, 처음 건립한 시기는 미확인이 되지만 고려 신종 4년(1210년)에 단청을 칠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하겠다.

문제는 이곳 조사당 건물 처마 밑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를 꼿은 나무가 살아난 '선비화' 라는 꽃나무가 철재 속에서 자라고 있는데, 이 선비화는 지붕 아래에 있다 보니 아침 이슬이나 빗물이 전연 떨어지지 않고 또한 물기가 전연 없는 집 뜰에서 자라고 있다니 너무나 신비스러운 나무이다.

선비화는 일명 '골담초(骨擔草)' 이라는 약용 나무로써 많은 사람들이 선비화 나무의 잎과 꽃을 따 먹으면 장수한다는 속설로 인하여 나무의 고사(枯死)를 방지하기 위하여 2중 철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 가두어 버렸는데, 완전히 동물원 원숭이가 되면서 내부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는 보호수가 된다.

이곳 조사당 벽면에는 벽화 6점이 그려져 있으면서 조사당 벽화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 가 되는데, 벽화는 범천,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으로 이 사찰의 창시자이면서 주인공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조사당에서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사당 벽화는 보물 제735호 '고려각판' 및 보물 제1562호 '괘불도' 와 함께 부석사 초입 오른편에 있는 성보박물관으로 이관 보관하고 있는데, 이곳 부석사를 잘 알고 있는 한 불자가 지금 조사당 벽화는 보수를 위하여 대전에 있는 모 공방으로 이관하여 수리를 하고 있으면서 한 5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이 조사당 건물에서 왼편으로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가면 2개의 건물이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앞의 건물은 '응진전(應眞殿)' 건물이 되고 뒤편에 있는 건물은 '자인당(慈忍堂)' 이라는 건물이다.

 

< 조사당 왼편 야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응진전 및 자인당' >

 

이곳 자인당 건물 내부에는 3분의 '석조여래좌상(石彫如來坐像)' 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과 우측에 있는 좌상은 보물 제220-1호 및 보물 제220-2호의 불상으로써 9세기 후반기에 유행하였던 비로자나불상으로 당시 불교사상의 특징과 더불어 불교양식을 알려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 3개의 보물을 보관하고 있는 '자인당' 건물 >

 

< 자인당 내에 모시고 있는 '석불' >

 

중앙에 모시고 있는 부처는 2010년 2월 24일 보물 제1636호를 지정이 된 '석조석가여래좌상(石造釋迦如來坐像)' 으로 3불상 모두가 부석사 인근에 있는 절터에서 발굴하여 이곳에 모시고 있는데, 불상의 조각수법이 동일하여 같은 사람이 조각한 작품이라 추정을 한다.

 

< 자인당 내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 의 안내문 >

 

이곳 자인당 왼편 옆으로 봉황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登山路)가 있었지만 수 십년간 산행을 통제하므로 동산로가 살아졌는데, 나는 대구에 있는 한 산악회에서 십여년 전 봉황산 뒤편에 있는 생달마을에서 출발하여 갈곳산을 지나 봉황산으로 하산한 경험이 아련하게 떠 오르게 한다.

오늘 다소 추운 날씨로 인하여 오래 동안 경내에 머물면서 구석구석 구경을 하지 못하고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부석사를 떠나기로 하는데, 부석사 입구에 있는 한 카페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끝없이 긴 대화가 이어진다.

언 몸을 완전하게 녹이고 나서 부석사에서 한 10여 분 거리에 있으면서 소수서원과 함께 하고 있는 선비촌을 찾아가는데, 다소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시키고 선비촌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로 들어가 예약한 건물의 키를 수령한다. - 첫째날 1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