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31일.(화요일)
* 여행의 개요.
금일 오후도 2명의 고등학교 동문과 함께 번개 미팅을 가지면서 가볍게 여행을 떠나기로 하는데, 오늘은 내가 2015년 8월 22일에 방문하였던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자리하고 있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을 방문하기로 한다.
내가 임고서원을 다시 찾아가는 이유는 서원 앞에 자라고 있으면서 수령 500여 년이 된 은행나무를 보기 위함이라 하겠는데, 이 때 쯤이면 은행나무 잎이 노란색으로 변화가 되어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 임고서원을 돌아보면서.
대구에서 국도를 이용하여 임고서원 앞에 오후 3시 경 도착하여 주차를 시키고 나서 임고서원을 돌아보기로 하는데,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님의 역사적 내역을 조명하는 장소이라 하겠다.
거의 8년 만에 찾아보는 임고서원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 놀램을 발생하게 만드는데,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이라는 거대한 입석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 임고서원 입구 '동방이학지조' 이라고 쓰여 있는 입석 >
임고서원 입구 왼편에는 임고서원의 조감도를 비롯하여 정몽주 선생님의 대표적 시(詩)라고 할 수 있는 '단심가(丹心歌)' 를 새긴 입석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정몽주 선생님의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는 입석이 자리하고 있다.
< '임고서원' 의 조감도 >
< 임고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 새겨져 있는 '단심가' >
입석에 새긴 일대기 내용에 따르면 임고서원은 고려 말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년) 부래산(浮來山)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년)에 현 위치에 중건하면서 재 사액되었다.
인조 21년(1643년) 여헌 '장현광(張顯光)' 선생님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년)에는 지붕 '황보인(皇甫仁)' 선생님을 추향하였지만, 고종 8년(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65년에 복원하였다.
포은 정몽주 선생님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년) 현재의 위치가 되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군 '운관(云瓘)' 선생님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침 토벌(倭寖 討伐)에 공을 세웠으며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로 가서 대명국교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지방관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추앙되었으며 시문 및 서화에도 뛰어났고, 야은 '길재(吉再)' 및 목은 '이색(李穡)' 선생님과 함께 고려 3은(三隱)의 한사람이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년)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피살 되었는데,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영의정에 추종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 임고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에 새겨져 있는 '포은' 선생님 일대기 >
단심가 시비 및 일대기를 기술하고 있는 입석 사이로 만들어져 있는 계단으로 올라서면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이 되는 2층 누각의 건물 영광루(永光樓)가 자리하고 있고, 이 루각의 건물을 지나면 왼편으로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 임고서원의 외삼문이 되는 '영광루' >
< 루각 건물 뒤편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신도비' >
또 다시 일단의 축대 위로 올라서면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마당 중앙에 '임고서원(臨皐書院)'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강학당(講學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강학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다.
< 임고서원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강학당' >
강학당 건물의 대청마루 뒤편 벽면에는'흥문당(興文堂)'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이곳 강학댱 내에서는 여러가지 행사와 유림(儒林)의 회합 및 학문강론(學文講論)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강학당 마루에 붙어있는 '흥문당' 글씨 >
강학당 앞 마당 가장자리 오른편 동재 건물에는 '수성제(修省齊)'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왼편 서재 건물에는 '함육제(涵育齊)'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면서 양쪽 건물은 상호 마주보고 있다.
< 동재 건물이 되는 '수성제' >
< 서재 건물이 되는 '함육제' >
강학당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음식을 준비하는 심진각(尋眞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강학당을 가로질려 왼편으로 넘어가면 제사용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 건물이 건축되어 있다.
< 음식을 준비하는 '심진각' >
<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
강학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높은 돌계단 위로 내삼문이 되는 유정문(由正門)이 자리하고, 그 뒤편 포은 선생님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문충사(文忠祠)' 이라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지만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문충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유정문' >
< 포은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문충사' >
또한 임고서원 오른편으로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관리사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고 왼편 야산에는 옛 임고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2곳에는 출입을 금지하는지 문이 굳게 잠겨져 있다.
< 옛 '임고서원' 으로 들어가는 문 >
2. 포은유물관의 관람.
관리사 건물에서 오른편이면서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건너편으로 '포은유물관(圃隱遺物館)' 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포은유물관에는 정몽주 선생님의 업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 '포은유물관' 으로 들어가는 문 >
< 정몽주 선생님의 업적 및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포은유물관' >
유물관 내부로 들어서면 로비를 만나면서 로비 정면으로 정몽주 선생님의 상반신 그림과 함께 흉상(胸像)이 만들어져 있고, 흉상 옆으로 정몽주 선생님이 지은 시(詩)가 자막으로 흐르고 있다.
< 로비 정면에 그려져 있는 '포은' 선생님 >
< '포은' 선생님의 휼상 >
오른편 제1전시실이 되는 포은관으로 들어가면 포은 정몽주 선생님의 출생에서 부터 효행(孝行)과 충절(忠節),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 평가 받는 그의 학문과 만고(萬古)의 충의지사(忠義之士)로 추앙 받는 그의 삶과 고문서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제1전시실이 되는 '포은관' >
< 년표로 보여주는 '포은' 선생님의 일대기 >
< '전시실' 내부의 전경 >
< 빛을 발하는 포은 선생님의 '외교' 업적 >
< '고려' 의 쇠망과 포은 선생님 >
왼편 제2전시실이 되는 임고관으로 들어가면 임고서원의 연역에서 부터 영남사림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던 영천의 성리학 및 성리학자들을 고문서 등을 소개하고 있고, '성리학(性理學)의 보고(寶庫)' 가 되는 임고서원의 축소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제2전시실이 되는 '임고관' >
< '임고서원' 의 연역을 나타내고 있는 년표 >
< '임고서원' 이 중요 유적 >
< '임고서원' 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109호 >
< '동방이학'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3. 은행나무를 구경하면서.
임고서원 좌측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은행나무의 수고(樹高)가 20m에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가 되고 수령이 500여 년이 되는 은행나무는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노거수이며 수관 폭은 동서로 약 22m에 남북으로 약 21m가 된다.
< 수령 500여 년이 되는 '은행나무' >
이 은행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浮來山)에 있었을 당시 그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옯겨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노란색 잎을 기대하면서 방문하였지만 아직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어 다소 실망을 느끼게 한다.
< 아직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은행나무' >
4. 선죽교를 건너보면서.
은행나무 앞에 '선죽교(善竹橋)' 를 재현하고 있는데, 포은 선생님이 피살되었던 장소가 되는 개성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대로 임고서원 앞이 가설하고 '한석봉(韓石峰)' 선생님이 쓴 선죽교 돌비석 또한 탁본하여 세워져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보는 '선죽교' >
< '한석봉' 선생님이 쓰신 선죽교 글씨 >
선죽교는 원래 '선지교(善地橋)' 이라고 불려졌는데, 포은 선생님이 피살되던 날 밤에 다리 옆에 참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하여 대나무 '죽(竹)' 자를 써서 '선죽교(善竹橋)' 이라고 고쳐 불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으나 정조 4년(1780년)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鄭好仁)' 선생님이 개성 유수로 부임하였는데, 선조의 유적에 우마차가 다니므로 안타깝게 여겨 난간대를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하였다고 한다.
대신 행인(行人)들을 위하여 다리 옆으로 똑 같은 모양의 다리를 건설하여 사람들의 동행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현재 선죽교는 2개의 다리가 놓여있는 상태이라 하겠다.
< 2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는 '선죽교' >
5. 기타.
이 밖에도 전시실 오른편 언덕 위에 서원을 내려 볼 수 있는 '조옹대(釣翁臺)' 이라는 정자와 더불어 포은유물관 뒤편으로 충효문화수련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수련원에 머물면서 충(忠)과 효(孝)에 대하여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함께 하고 있는 서원이라 하겠다.
< 야산 위에 자리하고 있는 '조옹대' >
< 조옹대에서 바라보는 '임고면사무소' 전경 >
< 조용대에서 내려보는 '임고서원' 전경 >
< 조옹대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연못' >
< 임고서원 뒤편으로 조성하고 있는 '단심로' >
< 마을 벽면에 그려져 있는 '포토존' >
또한 임고서원을 감싸고 있는 뒤산을 한바퀴 돌 수 있는 단심로(丹心路)를 비롯하여 주변으로 포은생가(圃隱生家), 포은연수관, 계현재 등이 함께 하고 있지만, 모두 탐방하는 것에 대하여 무리가 따를 것 같이 관람을 생략하고 임고서원을 떠나기로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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