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고궁 및 종묘.

서울에서 2013년 대학교 동문 정기총회 개최 및 "창덕궁 후원" 등 주변 관광지 관람.(전편)

용암2000 2013. 2. 27. 20:40

2013년 2월 23-24일. (1박2일)

 

매년 2월 말에서 3월 1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경북대학교 기계공학과 제1회 동문회 정기총회를 개최하는데, 금년은 한양에 거주하는 채종문 동문 여식(女息) 혼례식이 2월 24일 저녁 5시 30분 강남 신논현역 옆에 있는 한 호텔에서 올리므로 날짜가 1주일의 갭이 발생한다.

그래서 2월 23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24일 일요일 오후 7시까지 1박2일로 정기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겠다고 장소와 날짜 조정에 따른 가능 여부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니, 모두가 찬성한다고 한다.

살아생전 처음 한양에서 동문회를 개최하면서 축하도 겸하는 정기총회를 열겠다는 집행부 의견으로 거의 한달 전 부터 소식을 접하다 보니, 지방 촌놈 한양으로 한번 입성(入城) 한다는 설레임으로 몇날 밤 잠을 설쳐야 했다.

아울러 금상첨화(錦上添花)로 23일 토요일 오후 1시 30분 고등학교 한 동문의 장남이 서울 강남 학동역 근교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개최하므로 아침 8시 대구 법원 앞에서 공짜 버스를 운영한다고 하여, 대구에서 앵겔계수가 제일 높은 빈털털이 실업자 주머니 사정을 가볍게 만들어 주므로 Wife 까지 끼워서 동승하여 본다.

먼저 고등학교 친구 장남 결혼식장으로 직행하여 한양에 사는 많은 동문들과 재회의 기쁨과 동시에 혼주에게 축하인사를 보내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대학교 동문들의 1차 모임 장소가 되는 영등포시장 옆에 있는 "하이서울유스호스텔" 로 5시까지 집결한다.

 

< 2013년 정기총회를 개최하는 "하이서울유스호스텔" >

 

6시 정각 회장님과 총무님이 사전 시장조사를 통하여 선 예약하여 놓은 장소의 식당으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하는데, 약간 늦은 사람은 식당으로 바로 참석토록 하면서 만찬식을 가진다.

 

< 호텔 인근에서 "저녁만찬" 을 하면서 >

 

1년 만에 다시 만나는 기쁨으로 다소 많은 음주와 더불어 오리고기로 회포를 풀고서 호텔로 다시 돌아오니, 업무로 인하여 늦게 출발하는 친구들도 속속 도착한다.

총무가 최종 참석 인원을 점검하는데, 금일 참석한 인원은 우리가 함께 공부한 동문 총 30명 중 작고와 해외 이민으로 인하여 5명의 친구는 영원히 빠지고, 아직도 한국에 거주는 하고 있지만 연락 두절 또는 한번도 참석치 않은 5명을 포함하여 10명을 제외된다.

그래서 20명 중 3명의 동문은 가사(家事) 사정으로 결근하므로써 총 17명이 참석하는데, 더불어 부인을 동반한 착한 동문 8명이 여회원을 동행하므로 합계 25명이 참석하여 총회 성원 인원이 구성되므로 회의를 개최한다.

 

< 2013년 정기총회를 주관하는 "총무님" >

 

2013년 정기총회는 회장의 간단한 인사와 더불어 2012년도 결산보고를 간략하게 끝내고 내일 Tour 일정계획을 발표하는데, 1차는 아침 다소 일찍 일어나 조기 식사를 끝내고 창덕궁으로 이동하여 10시 정각 첫 개장과 동시에 문화 해설사 따라 창덕궁 후원(일명 : 비원)을 관람한다.

이어서 2차는 창덕궁에서 조금 걸어 경복궁 옆에 있는 "현대겔러리 미술관" 을 구경하고 나서,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인사동 뒤골목에 예약하여 놓은 한정식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가진다.

오후에는 다소 여유를 가지면서 경복궁 좌측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도 관람하고 나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강남 호텔 예식장으로 이동하겠다는 전반적인 Schedule을 설명하는데, 처음 한양으로 입성한 촌사람들은 시간 엄수와 함께 한양 미아가 되지 않도록 선두를 잘 따르면서 행동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1. 창덕궁(昌德宮)의 관람.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끝내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종로3가역에 내려 낙원동 떡 골목을 통과하여 창덕궁 입구에 도착하는데, 벌써 창덕궁 고궁과 문화유산을 관람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고 있어 우리 총무도 창덕궁 입장료 3.000원과 후원 입장료 5.000원을 동시에 지불하고 궁(宮)으로 안내한다.

 

< 다음날 아침 "호텔" 을 떠나면서 > 

 

창덕궁은 1405년 조선 제3대 태종 때 건립한 왕궁으로써 처음에는 법궁(法宮)이 되는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하였지만, 이후 임금님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再建)하지 않고 광해 2년(1610년)에 창덕궁을 재건하였으며, 창덕궁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재건하기 까지 조선 왕조 약 270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하였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 궁궐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데, 왕가(王家)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고 있으며 창덕궁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을 건축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합하여 "동궐(東闕)" 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졌고, 또 남쪽에는 국가의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있어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또한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1991년 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궁궐(宮闕)이 된다.

 

<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알리는 안내판 >

  

오늘 창덕궁 관람 순서는 창덕궁 뒤편에 있는 후원 입구에서 10시 정각 집결하여 문화 해설사 따라 걷도록 사전 예약되어 있으므로 창덕궁을 돌아보다가 주어진 시간에 후원으로 들어가 관람을 끝내고, 여분의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되돌아 나와 나머지 창덕궁을 관람하는 것으로 계획된다고 한다. 

 

< "창덕궁과 후원" 전도 >

 

살아생전 처음 왕이 살았다는 궁으로 입성 할려고 하니 가슴이 벅차 오르므로 무엇 부터 먼저 보아야 할지 몰라 동문들 뒤 꽁무니를 졸졸 따라 들어가는데, 먼저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 에 이르면서, 문의 크기에 촌사람 완전히 압도 당한다.

 

< 창덕궁 정문이 되는 "돈화문" 전경 >

 

돈화문은 태종 12년(1412년)에 건립한 창덕궁 정문으로써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고 있는데,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일반적으로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 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올리고 통행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하는데, 돈화문이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 해 1609년에 재건하였으며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돈화문을 통과하면서 북쪽 방향으로 조금 걷다가 오른편으로 90도 꺽어 동쪽 궁궐 방향으로 들어가면 먼저 명당수를 건너게 되는데, 이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흘려내리는 물이 돈화문 동쪽으로 하여 궐 밖으로 나가는 개울로써 이름을 "금천(錦川)" 이라고 불려지며 금천 위에는 금천교(錦川橋)라는 아담한 돌다리가 만들어져 있다.

 

< 돈화문을 통과하여 "창덕궁" 으로 들어가는 일행 >

 

이 금천교에는 많은 돌 조각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특히 2개의 아취형 다리 중앙에 물이 흘려 들어오는 위쪽은 거북이 형상과 물이 빠지는 아래쪽은 해태상의 조각품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렇게 장수를 기원하는 동물을 두는 것은 물로 통하여 들어오는 잡귀를 방어하기 위한 선조의 지혜라고 한다.

이 금천교도 태종 11년(1411년)에 놓은 다리이고,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다리로써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금천교 아래 방향을 지키는 "해태상" >

 

< 금천교 위 방향을 지키는 "거북이" >    

 

금천교를 건너 조금만 들어가면 진선문(進善門)을 만나고, 진선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다가 중앙지점에서 왼편으로 꺽으면 조선 임금님이 즉위식을 가지면서 집무를 행하는 궁궐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는 인정문(仁政門)을 만난다.

 

<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진선문" >

 

< 진선문에서 바라보는 "인정문" 전경 >

 

인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을 품고 있는 거대한 2층의 국보 제225호 "인정전(仁政殿)" 궁궐이 눈 앞을 가로 막고 있는데, 인정전 앞 마당 좌우에는 신하들의 직위를 표시하는 종 9품에서 정 1품 까지의 직급별 품계석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많은 신하들이 도열하고 있는 품계석 중앙 어도(御道) 따라 인정전 앞까지 걸어가 2단의 돌 축대를 올라서면 인정전 정문에 도착하면서, 고개를 쭉 빼서 인정전 내부를 관람하여 본다.

 

< 국보 제225호가 되는 "인정전" 전경 >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식, 외국 사절단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는 장소로 내부 닫집 아래에는 왕이 앉은 어좌가 놓여 있지만, 그 어좌 주변에 서양식 전등, 커튼, 유리창 등으로 현대식 장식품으로 부착하고 있어 문화적 가치를 추락시키고 있다.

 

< 인정전 내부에 있는 "어좌" 와 서양식 전등 시설 > 

 

후원 입장 시간의 촉박으로 인정전 옆에 있는 왕의 집무실이 되는 선정전(宣政殿), 왕의 침전으로 사용한 희정당(熙政堂), 조선 말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대조전(大造殿) 등 많은 궁궐 관람하지 못하고 바로 후원 입구로 들어간다.

 

< 왕의 집무실로 사용하는 "선정전" 청기와 지붕 >

  

< 왕의 침실로 사용한 "희정당" 건물 >

 

< 먼곳에 찍어보는 "대조전" 지붕 모습 >

 

후원 입구에 도착하니 한 5분 정도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여 후원 입구에서도 왕 세자가 기거하는 "성정각(誠正閣)" 관람이 가능하게 쪽문이 열려 있어, 내부로 들어가 성정각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돌아본다.

 

< 왕 세자가 기거한 "성정각" 건물 >

 

2. 청덕궁 후원(昌德宮 後苑)의 구경.   

다시 후원 매표소 입구로 집결하니 날씨가 다소 싸늘하고 첫번쨰 예약 시간이라써 그런지 50명 정원 한 팀을 채우지 못하는 다소 적은 사람들이 10시 시간을 맞추어 입장하는데, 한 어여뿐 아가씨(?) 같은 한명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나와 인사와 더불어 관람에 따른 주의사항을 조목조목 응급하여 준다.

 

< "창덕궁 후원" 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기다리는 관광객 >

 

창덕궁 후원(後苑)은 소수의 인원 및 제한된 시간에서 해설사와 함께 움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 만큼 후원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간직한 곳으로써, 후원은 4개의 골짜기에서 뻗어내리는 지형에 맞추어 연못과 정자가 자리잡고 있어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로 추진하여 성장하는 후손들에게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원형 그대로 물려주어야 하는 귀중한 자연보고의 산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덕궁 전체 넓이는 총 13만 평의 부지를 간직하고 있는데, 궁으로 사용하는 창덕궁은 약 4만 평의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후원은 약 9만 평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관람하는 곳은 창덕궁 좌측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신선원전(新璿源殿)" 사당을 제외한 전 지역으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어 질 것이라고 한다.

특히 후원이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려지는데, 일반적으로 궁궐 안에 있다고 하여 "내원(內苑)", 또는 왕들이 풍류를 즐기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였다고 하여 "금원(禁苑)" 이라고도 불려지지만 구한 말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 이름이 비원이라써 일반적으로 "비원(秘院)" 으로 더 알려져 있다.

울창한 숲속으로 만들어진 포장길 따라 아담한 고개를 넘어가면 다소 넓은 첫번째 골짜기에 "부용지(芙蓉池)" 라는 아름다운 연못에 도착하는데, 이 부용지는 왕실 후원의 중심지로써 약 300평의 4각형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직도 겨울의 중심에 있어 얼음과 눈이 쌓여 연못 속살을 보여 주기를 꺼리고 있다.

 

< 후원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부용지" >

 

이 연못 중앙에 우주를 표현하는 원(圓)의 모습하고 있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아름다운 주목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연못에서 왕과 신하들이 나룻배를 띄워 유람하면서 시(詩)를 지고 풍류를 즐긴 장소라고 한다.

연못 전면에는 한송이 연꽃 모양의 십자 형태의 팔작지붕을 간직한 보물 제1763호 "부용정(芙蓉亭)" 정자가 고즈넉하게 자라잡고 있지만, 그 부용정도 연못과 같이 긴 동면을 취하고 있는지 4개 방형으로 만들어진 문들이 굳게 닿혀 있으며 정자 앞 야산 비탈에 "괴석(怪石)" 이라고 불려지는 비석 한개가 이그러진 모습으로 관광객을 마중하고 있다.

 

< 부용지 전면에 있는 십자형 건물 "부용정" >

 

< 부용정 앞에 이그러진 "괴석" 비석 >

 

부용지 뒤편에는 몇 단의 계단을 가진 높은 언덕을 형성하고 있으며서 그 언덕 위 정점에는 2층 "주합루(宙合樓)" 루각 건물이 건축되어 있는데, 이 주합루 건물은 왕실 도서관 역활을 하고 있는 "규장각(奎章閣)" 으로 책을 보관하고 읽은 장소라고 한다.

 

< 부용지 뒤편에 있는 "주합루" 모습 >

 

부용지 오른편으로 단층의 "연화당(映花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중앙에 방을 두고 앞 뒤 튓마루를 두고 있으며 방문에는 위로 여는 문으로 만들어져 있어 따뜻한 날에는 문을 열면 어느 방향으로도 부용지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건물이다.

 

< 부용지 동쪽 방향에 있는 "연화당" 을 설명하는 문화 해설사 >

 

부용지 반대편 동쪽 방향의 넓은 마당에서는 왕의 입회(入會) 하에서 특별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해설사는 신발을 벗고 연화당 안으로 들어가 방에 앉아서 직접 왕이 되어보라고 하지만 어디 내가 왕의 풍체라도 조금 가졌드라면 용기를 내어 방으로 올라가 왕의 흉내를 내어 보겠는데....

 

< 연화당으로 올라가 왕의 모습하고 있는 "동문" >

 

동쪽 마당 끝에는 창덕궁 후원에서 유일하게 운영하는 매점과 동시에 불순물을 제거하는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어, 여기서 불순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창덕궁 정문까지 걸어가는 약 1시간 30분 동안 알라서 처리하라고 강압을 준다.

요강 비우는 시간과 사진 촬영하는 약 10분 간의 자유시간을 주므로 요강 만 해결하고 나오니 벌써 시간이 다 경과하였다고 하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오른편으로 닫혀 있는 한개의 대문을 만나면서 이 대문이 창경원(昌慶院)으로 넘어가는 "영춘문(永春門)" 이라고 한다.

 

< 창경궁과 경계를 만들고 있는 "영춘문" 과 식물원 유리 건물 >

 

낮은 담으로 구획하고 있는 창경원은 한 때 우리나라 밤 벚꽃 놀이와 더불어 동, 식물원으로 유명하여 지방에서도 도시락을 챙겨서 찾아오는 명소이었는데, 이렇게 창경원으로 불려지는 것은 일본놈들이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院)으로 격하시켜서 부르게 만든 곳이라고 한다.

지금 동물원은 과천으로 이동시키고 궁내에 남아 있는 벚나무를 완전히 제거 시킴으로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회복시키고 있지만, 아직도 거대한 식물원의 유리 건물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다소 자연 조화를 떨어지게 만들고 있다.

이 영춘문 반대편으로 금마문(金馬門)이 자리잡고 있는데, 옛날에는 금마문 앞에서 왕과 신하들이 말을 타고 후원을 배회하면서 산천 풍경을 구경하였던 장소라고 한다.

 

< 영춘문과 마주보는 "금마문" >

 

이 금마문과 연이어 "ㄷ"자형 석문이 나타나면서 그 석문에는 "불로문(不老門)" 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 석문을 통과하면 평생 늙지않고 불로장수하여 준다는 옛 조상님들의 지혜가 묻어나는 문이라고 하면서 반복하여 통과하면 천수(天壽)를 누린다고 하여 제일 뒤에서 몇 번이나 왕복하여 본다.

 

< 제일 뒤에서 왕복하여 보는 "불로문" >

 

이 불로문을 통과하면 금마문과 구획하는 낮은 돌담 넘어로 한 채의 건물과 후원 내에서 제일 작은 1칸 짜리 정자가 보이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또 다시 아름다운 인공 연못이 나타나는데, 이 연못이 "애련지(愛蓮池)" 라고 불려진다.

 

< 금마문 내에 있는 제일 작은 1칸 짜리 "정자" >

 

이 연못은 숙종 18년(1692년)에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현재 섬은 없어지고 정자는 연못 북쪽 지점으로 옮겨져 있으며 연꽃을 좋아하는 숙종이 "애련정(愛蓮亭)" 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불로문 내부 오른편에 있는 "애련지와 애련정" >

 

애련지를 돌아서 내부로 조금 올라가면 또 다른 작은 연못을 만나는데, 이 연못 뒤편에 "어수당" 이라는 집이 있었지만 현재는 소실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이 작은 연못을 돌아서 북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연경당(演慶堂)"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는데, 담장 역활을 하는 건물 중앙에 있는 솟을대문 현판에는 붉은 글씨로 "장락문(長樂門)" 이라고 쓰여 있다.

이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대문 좌우로 하인들이 기거하는 사랑채에는 여러개의 방들이 만들어져 있으며 사랑채 내부에서 내당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안쪽 대문채 건물을 만나는데, 대문채 건물에는 좌우 2개의 출입문이 만들어져 있다.

 

<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아래에 있는 "장락문" >

 

< 솟을대문 안에 있는 "사랑채" 방 >

 

왼편 출입문은 평범한 일반 대문이지만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솟을대문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솟을대문 처마 밑에도 붉은 글씨로 "장양문(長陽門)"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오른편 출입문 "장양문" >

 

일반적으로 장양문은 성인 남자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데, 이 문을 통과하면 연경당의 본채 건물을 만난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하여 순조 28년(1828년)에 건립한 집으로, 일반 양반집 99칸 보다 훨신 많은 총 120여 칸으로 지어진 거대한 규모의 양반집 형태의 가옥이다.

 

< 연경당 "본채" 건물 전경 >

 

< 연경당 주변에 있는 "별당" 건물 >

 

특히 본채 오른쪽 코너 높은 곳에 "농수정(濃繡亭)" 이라는 정자가 지어져 있는데, 이 정자 건물은 마치 한마리의 매가 날개를 편 것 같이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어 아름다움이 배(倍)가 되는 정자이다.

 

< 연경당 오른편 코너에 있는 "농수정" >

 

다음 목적지 존덕정으로 가는 길은 연경당에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불로문으로 되돌아서 우회하여 다음 골짜기로 넘어가야 하지만. 농수정 앞으로 만들어진 쪽문을 통하여 야산을 넘어가면 3개의 정자와 1채의 건물이 연이어 지어진 "존덕정(尊德亭)" 일원에 도착한다.

존덕정 주변에는 2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래쪽 큰 연못에는 4각형의 연못 2개가 합쳐서 곡선으로 변형하여 만들어졌고 연못 주변으로 부채 모양의 "관람정(觀襤亭)" 이라는 정자가 건축되어 있으며 관람정 반대편 언덕 위에 "승재정(勝在亭)" 이라는 정자가 그림과 같이 앉아 있다.

 

< 부채 모양의 "관람정" 전경 >

 

< 관람정 반대 언덕 위에 있는 "승재정" >

 

위쪽 작은 연못으로 올라가면 아담한 다각형의 연못가에 2중의 지붕을 가진 6각형 존덕정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정자 내부 벽면에 정조대왕이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天明月主人翁自序)" 라는 현판을 걸어 놓으면서 신하들에게 현판 내용을 암기하게 하여 평생 왕권강화와 더불어 개혁정치에 매진하게 하였다고 한다.

 

< 2중의 지붕을 가지고 있는 "존덕정과 다각형 연못" >

 

< 존덕정 내부 벽면에 걸어 놓은 정조대왕이 쓴 "현판" > 

 

이 존덕정 앞에 2칸의 방과 1칸의 마루를 가진 일자형 맞배지붕 형태의 "폄우사(貶憂謝)" 건물 한채가 지어져 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표현하고 있는 정자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건축물로써 다소 격이 떨어지는 집이라 실망을 주고 있다.

 

< 존덕정 앞에 있는 "폄우사" 건물 >

 

존덕종 일원에서도 약 5분 간 휴식시간을 부여하고 나서, 여기서 부터 마지막 골짜기가 되는 옥류계곡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소 힘든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소요 시간이 30분 정도 걸리므로 힘에 부치거나 어린이들은 출발점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이야기에 몇몇 인원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잘 만들어 오솔길 따라 언덕 위로 올라서면 오솔길 옆에 쉬었다 가라는 취규정(聚奎亭) 정자를 옆으로 두고, 마지막 옥류계곡 방향으로 내려서면 겨울에도 많은 수량이 흘려내리는 옥류천에 도착한다.

 

< 옥류계곡으로 넘어가는 "오솔길" >

 

< 옥류계곡 능선 정점에서 만나는 "취규정" >

 

옥류천 주변에도 다소 많은 4개의 정자와 1채의 건물을 만나는데, 제일 먼저 "취한정(翠寒亭)" 이라는 정자를 만나며 연이어 "소요정(逍遙亭)" 정자가 있고 옥류천 다리를 건너면 큰 소요암이라는 바위를 만난다.

 

< 옥류계곡 입구에서 만나는 "취한정" > 

 

< 취한정 위에 있는 "소요정" >

 

이 소요암 바위 앞에는 약간의 물이 고여서 넘치게 하는 작은 돌 연못을 만들고, 그 돌 연못 한쪽으로 빙돌아서 내려가는 수로(水路)를 파서 물이 수로 따라 휘돌아서 흘려 내려 폭포로 떨어지도록 하는 자연폭포를 만들고 있다.

 

< 소요정 앞에 있는 "소요암" 전경 >

 

< 물이 휘돌아서 떨어지게 하는 "폭포" >

 

이 소요암 전면에는 인조 14년(1636년)에 "옥류천(玉流川)" 이라는 친필의 글을 새기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짖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을 벌렸다고 하며, 옥류천 글씨 위에 옥류천 계곡의 풍경을 보고 느낀 점을 시로 표현한 숙종의 "오언절구" 시(詩)도 함께 새겨져 있다.

 

< 소요암에 새긴 "옥류천" 한자와 "오언절구" 시 >

 

아울러 소요암 바위 곁에 약 300년 된 주목나무를 심어 더욱더 자연 미(美)를 가미시키므로, 이 옥류천 폭포가 아담하고 작지만 중국의 거대한 폭포보다 다 아름다운 자연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 소요암을 품고 있는 "주목나무" >

 

소요암 바로 위쪽에 "태극정(太極亭)" 이라는 정자가 고고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제일 위쪽으로 조그마한 논 한가운데 초가집으로 된 "청의정(淸椅亭)"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청의정 정자 지붕은 이곳 논에서 수확한 볏집으로 이엉을 엮어 만든 집이다.

 

< 소요암 위쪽에 있는 "태극정" >

 

<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볏집으로 만든 지붕을 가진 "청의정" >

 

내려오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농산정籠山亭)" 이라는 5칸 짜리 집 한채를 더 만나는데, 이 농산정 주변에서 뒤산 방향으로 고개를 돌여보면 산의 능선 부위 전체가 성균관대학교 건물이 높게 솟아 있어 옛날 왕과 신하들이 머물면서 공부와 시를 짖는 장소를 파괴시킴으로 인하여 옛 경치를 완전히 망치고 있다.

 

< 정조대왕이 종종 기거했다는 "농산정" >

 

이것으로 창덕궁 후원 해설은 종결하면서 하산길로 들어서는데, 옥류천 계곡을 넘어오기 전에 만난 고개 마루에 있는 취규정 정자 앞에서 오른편 지름길로 내려서면 후원의 3번째로 머물면서 구경한 연경당 담장 옆으로 걸어서 또 다른 아담한 야산을 넘으면, 역대 조선 왕들의 위패(位牌)와 어진을 모시고 있는 신(新)선원전 입구를 만난다.

이 신선원전은 봄,가을 제(祭)를 올리 때 개방하므로 관람을 생략하면서 그냥 통과하여, 창덕궁 왼편으로 물이 흘려내리는 금천 상류에 이른다.

금천 따라 조금 내려가면 또 다시 창덕궁의 보조 건물이 되는 "궐내각사(闕內各司)" 에 이르는데, 궐내각사 건물 중간지점에 높이 12m에 둘레 5.9m의 약 750여 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가지가 다 뿌려져 옆으로 누워 겨우 삶을 유지하고 있다.

 

< 결내각사로 들어가는 "대문" >

 

< 750년 수령을 가지고 있는 "향나무" >

 

이 향나무은 몇년 전 까지 가지가 위로 뻗어 잘 자라고 있었지만, 태풍으로 가지가 뿌려져 겨우 생명만 유지하는 모습으로 변하여 애절하다고 하면서 이곳에서 대단원의 해설이 종결한다. 

비록 오늘은 추운 겨울 날씨로 힘든 창덕궁 후원 여행이 되지만, 단풍이 내리는 10월 경에 한번 더 방문하여 아름다운 후원을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꼭 가져 보시라는 이야기와 함께 1시간 30분 정도 재미있고 유익한 여행 시간이 손살같이 지나간다.

정문 방향으로 내려가니 다소 오랜 산책으로 다리 통증으로 힘든 표정을 짖는 동문들이 발생하므로 아침에 구경하지 못한 창덕궁 관람은 각자 미지의 시간에 재차 관람하라는 숙제로 남겨두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