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4일.(둘째날 : 월요일)
1. 여행의 개요. 안동시가지 중심지에 있는 펜션에서 일박을 하고 나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하여 안동댐 바로 아래에 있는 월영교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 간단하게 아침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고 2일차 여행은 안동시가지를 중심으로 산재하고 있는 관광지를 관람하여 보기로 하는데, 처음 안동댐을 관람하고 나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임청각을 구경하고 이어서 임하댐 방향에 있는 안동대학교를 방문하여 교내에 있는 역동서원(2009년 9월 30일)을 다시 관람하여 본다. 다음에는 경북도청을 다시 방문(첫방문 : 2017년 5월 3일)하는데, 한 동문의 친척이 도청에 근무하므로 도청 내에 꾸며져 있는 전시품을 돌아보고 나서 직원의 안내로 구내식당으로 들어가 공무원들과 함께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맛 있는 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건물 4층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고 나서, 동문의 친척과 헤어짐을 가지면서 인접하게 있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위의 내용 모두가 나의 블로그에 이미 기술하므로(2012년 9월 15일) 인하여 관람 내용의 기록은 생략하기로 하고,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의 탐방기를 보충 기록하여 두기로 한다. < 안동댐 아래에 있는 '월영교' > < 거의 만 수위가 되는 '안동댐' > < 다시 찾아보는 '임청각' > < 안동대학교 내에 있는 '역동서원' > < '경북도청' 4층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풍경 > 2. 하회마을의 투어. 나는 하회마을을 몇 번이나 방문하였는데, 한 때 마을 내부에 있는 민박집에서 머물면서 관람한 경험도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다시 방문하고 싶은 것은 마을 내에 있는 탈춤 전수관에서 공연하는 하회 별신굿탈놀이를 구경하기 위함도 크다 하겠다. 경북도청에서 10여 분 정도 운전하여 가면 하회마을 입구에 도착이 되는데,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매표소로 내려가서 입장권을 구입할려고 하니 경로에게는 무료 입장이 가능하여 진다. < 하회마을 초입에 있는 '매표소' > 매표소에서 하회마을 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1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마을로 들어가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서 승차를 한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하차한 관광객은 삼삼오오 짝을 형성하면서 마을로 들어가는데, 삭막한 겨울이면서 설한풍이 불고 있어 다소 추위를 느끼면서 마을에 도착을 하면 마을입구에 조감도가 자리하고 있다. < 추운 날씨에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는 '하회마을' 입구 > 조감도 앞에서 해설사 한분이 하회마을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곳 하회마을에는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 많이 존재하므로 사생활의 보호 차원에서 이곳 조감도에 표시하고 있는 번호의 집만 관람이 가능하겠다고 한다. < 마을 입구에서 해설을 경청하고 있는 '관광객' > 안동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써,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씨족마을이라 하겠다. < '하회마을' 의 조감도 > 또 하회마을은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교감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상호 이해와 소통을 통하여 흐트러짐 없는 건전한 공동체의 삶을 오늘날 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생활 문화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면서,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확정지었다고 한다.
하회마을은 고건축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만큼 조선시대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한옥(韓屋)들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채 남아 있고, 또한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양반들이 즐겼던 선유줄불놀이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22호가 되어지는 하회마을은 풍산류씨(豊山柳氏)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 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고,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에 일컬어지면서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江)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는데,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는데,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가 되어지는 겸암 '류운룡' 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柳成龍)'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로써 조선 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는데, 마을 내에는 총 127개 가옥이 있으면서 그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혼용되어 있는 '하회마을' >
하회마을에서는 국보 제121호가 되어지는 '하회 및 병산탈' 과 국보 제132호가 되어지는 '징비록(懲毖錄)' 을 비롯하여 4개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고, 10개의 중요민속자료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보고의 마을이 된다.
그 중에서 하회탈춤 공연은 연중으로 공연을 하지만 겨울철이 되는 1월과 2월에는 주말이 되는 토요일와 일요일 만 공연하므로 금일이 월요일 되므로 공연은 하지 않지만, 마을 입구 주차장 인근에 있는 세계탈박물관은 꼭 관람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해설을 종료한다.
마을 안길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서 골목 골목을 구경하면서 마을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신목을 구경하여 보는데, 신목이 되어지는 느티나무는 600년의 수령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로써 나무 주변에 소원을 쓴 종이가 가득하게 메여있다.
< 마을 안길을 걷고 있는 '관광객' >
< '하회탈' 을 판매하고 있는 거리 풍경 >
< 600년의 수령을 가지고 있는 마을 '신목' >
다시 골목으로 나와서 조금 걸어가다가 하회류씨의 대종가(大宗家)가 되는 '양진당(養眞堂)' 으로 들어가 보는데, 양진당에도 사람이 기거하므로 안채의 관람은 불가능하지만 사랑채는 개방하고 있다.
< 아기자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골목길' >
< 까치를 위하여 남겨두고 있는 '감' >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 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하는 당호가 된다.
< 멀리서 보는 '입암고택' 의 전경 >
당호가 되어지는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고,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 또는 양진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열러있는 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아담한 마당이 자리하면서 마당의 뒤편 축대 위로 사랑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사랑채 건물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 입암고택 사랑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 작은 마당과 함께 하고 있는 입암고택 '사랑채' >
양진당을 나와서 남쪽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이제는 왼편으로 '충효당(忠孝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충효당 건물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종택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애종택' 이라고 불려진다.
< 서애종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대문간채' >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이 아닌데,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말년을 보냈으며 서애 선생님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경북도청 옆에 있는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한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으로 서애(西厓) 류성룡 선생님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의 사람들이 십식일반 도움으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 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기념 식수가 되어지는 구상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고, 대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이곳에도 사랑채만 관람이 가능하여 진다.
<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식수한 '구상나무' >
사랑채에서 오른편 모서리를 돌아서 가면 서애 선생님의 유물과 더불어 서적을 전시하고 있는 영모각(永慕閣) 건물이 자리하는데, 이곳 영모각에는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물을 보존 및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대문간채 바로 앞에 있는 '사랑채' >
< 사랑채 뒤편에 있는 '제실' >
< 사랑채 오른편 모서리에 있는 '영모각' >
영모각이라는 명칭은 서애 선생이 쓴 ‘영모록(永慕錄)’ 에서 따왔으며 풍산류씨 세계(世系)를 집록한 책으로 영모는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뜻 이라고 하는데,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박물관 내부에는 국보 제132호가 되어지는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 160호가 되는 '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 11종 22점과 보물 460호 '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가운데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 영모각 내에 있는 '서애' 선생님의 모습 >
< 영모각 내부를 관람하는 '관광객' >
< 전시하고 있는 '서적' >
< 국보 제132호' 징비록' >
보물 160호는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서애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과 자료들이 일괄 지정된 것이다.
보물 460호는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쓴 것과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조정에서 선생에게 내린 여러 문서 등이 전시하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라 하겠다.
< 서애 선생님이 사용한 '유품' >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영모각을 관람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 하회마을 휘감고 돌아가는 낙동강 강변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만송정 숲과 더불어 강의 건너편에 있는 부용대(芙蓉臺)를 구경하면서 하회마을 떠나기로 한다.
< 기념품을 판매하는 '초가집' >
< 겨울을 보내고 있는 '고목' >
주차장으로 나와 조금 기다림을 가지고 있으니 버스가 도착하는데, 버스에 승차하여 마을 밖에 있는 주차장으로 나와 세계탈박물관의 관람은 생락하고 인접하게 있는 병산서원으로 달려간다.
< 주차장과 가까이 있는 '세계탈박물관' >
3, 병산서원의 관람.
병산서원은 고려말 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前身)이다. 선조 5년(1572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 선생이 31세 때에 후학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1607년 서애선생이 타계하자 광해군 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 '병산서원' 으로 들어가는 복례문 >
< 복례문 통과하면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광영지' >
< 북례문을 통과하여 오른편 구석에 있는 '재래식 변소' >
< 복례문을 통과하면 만나는'만대루' >
< 강당 앞에서 바라보는 '만대루' 전경 >
< 강학 영역이 되는 '병산서원' >
< 병산서원 앞 오른편에 있는 '동재' >
< 병산서원 앞 왼편에 있는 '서재' >
< 서애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존덕사' >
< 존덕사 오른편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
< 존덕사 왼편에 있는 '장판각' >
< 약 350년 수령을 가지고 있는 '배롱나무' >
< 병산서원의 명소 '달팽이 뒷간' >
< 병산서원 앞에 있는 '병산' >
광해군12년(1620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인조9년(162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으며 매년 3월 초정일(初丁日)과 9월 초정일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병산서원 자료 옮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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