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째날.(10월 5일 : 토요일)
3). 중명전 영역의 관람. A) 중명전으로 가는 방법. 덕수궁의 석조전 뒤편으로 사잇문이 있어 사잇문을 지키는 관리인에게 중명전으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는데, 이곳 도로에서 왼편으로 조금 내래가면 로타리가 나오면서 로타리에서 오른편의 길로 한 100m 정도 들어가면 정동극장이 나오면서 정동극장의 끝지점에 중명전을 가르키는 이정표가 있다고 한다. < 중명전 입구에 있는 '정동극장' > < '정동극장' 끝지점에 있는 중명전 안내문 >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한 50m 정도 들어가면 중명전 건물을 만나는데, 옛날에는 중명전 영역이 덕수궁 내에 포함되어져 있었지만 덕수궁의 축소 과정에서 중간에 있는 땅을 매각하므로 별도의 건물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B) 중명전의 내력. 증명전(重明殿)은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으로 정비하여 가는 과정에서 황실의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황제의 서재로 지었는데, 1904년 덕수궁에서 큰 화재로 고종이 이곳으로 와서 편전(便殿)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 '중명전' 일대에 있는 조감도 > |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 속에서 중명전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어진 건물인데, 그때 부터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주권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 을사늑약의 현장이 되는 '중명당' >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각계에서 조약체결의 반대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지만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친일내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잠식하는 여러가지 조약의 체결을 강요한 건물이다.
C) 건물 내부의 관람.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중명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 있는 현판의 중명전(重眀殿) 글씨를 세심하게 살펴보면 중간자가 되는 밝을 '명(明)' 자는 날일(日)변에 달월(月)을 합한 것이 아니고 눈목(目)변에 달월(月)을 합한 글자가 되는데, 이 명(眀)자는 '눈을 크게 뜬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 건물의 입구에 붙어있는 '중명당' 현판 >
신발을 벗고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면 4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는데, 중간복도를 기준으로 오른편 제1전시실에는 '사진과 모형' 을 통하여 덕수궁과 중명전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 처음 2층으로 지어진 덕수궁 '중화전' 사진 >
< 제1전시실에 기술하고 있는 '중명전' 내역 >
제1전시실에서 중간복도 건너편에 있는 제2전시실로 이동하면 '을사늑약의 현장' 의 모습을 만들어져 있는데, 실물과 같은 인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제2전시실 내에 있는 '을사늑약' 현장 >
정면에는 이토 히로부미 중심으로 왼편에 5명 및 오른편으로 4명이 앉아 있는데, 왼편에는 앞에서 히야시 곤스케,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의 순서이고, 오른편에는 앞에서 박재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이 품나게 앉아있다.
< 사진으로 찍어진 '을사늑약' 인물 >
< 참석인사 중 을사늑약을 반대한 '한규설' >
< 을사늑약' 의 현실 >
또 다시 복도를 건너 제3전시실로 들어가면 '을사늑약 전후에 따른 대한제국' 의 내용을 전시하고 있는데, 대한제국은 열강과의 외교 관계를 통하여 자주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전 일본은 열강과 각종 협상을 통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한 권리의 확인을 먼저 받는다.
< 제3전시실에 부착하고 있는 '을사늑약 전후 세계정세' >
그로 인하여 불법적으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므로 국내의 각계 각층에서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뚜렸한 성과를 이끌지 못하여 결국 고종은 1907년에 강제 퇴위를 당하고,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므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고종' 의 강제 퇴위에 대한 현황 설명 >
< 고종이 사용한 '옥새' >
뒤편에 있는 제4전시실로 들어가면 '대한제국의 특사들' 이라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자주권에 위협을 받자 고종은 구미각국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당시의 국제질서 속에서 대한제국 특사들의 노력은 외면을 당한다.
< 제4전시실 파견된 '특사' 의 모형 >
이렇게 각 전시실을 돌아보고 나서 현장 해설사의 이야기를 잠시 경청하여 보는데, 중명전은 황실의 건물이 되어지므로 황실의 후손 중 한명이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가 망하여 건물을 매각하므로 개인의 건물이 되었다.
그래서 국가에서 재 매입을 통하여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우여곡절을 꺽으면서 건물 및 주변의 부지를 매입하였지만 전체의 매입이 불가능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출입문이 도로에서 고불고불 들어오게 만들어져 있어 매우 안타갑다고 한다.
4)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중명당에서 나와 다시 덕수궁 방향으로 내려가면 들어올 때 만났던 정동극장(貞洞劇場)이 자리하고 있는데, 내부로 들어가니 건물의 앞에 있는 정원과 노천 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가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 중명당을 떠나면서 들어가보는 '정동극장' >
정동극장에서 다시 100m 정도 내려가면 작은 로타리가 나타나면서 이곳에서 부터 덕수궁의 돌담길이 시작 되는데, 외국인을 포함하여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추억을 만들기 위하여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 덕수궁 끝지점에 있는 '로타리' >
< 돌담길 따라 걷고 있는 '관광객' >
< 거리에서 '행사' 에 동참하는 관광객 >
거리 곳곳에 기념품과 더불어 먹걸리를 판매하는 가판대를 비롯하여 포장마차가 도열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음악을 공연하는 무대까지 설치하므로 걷는 길을 멈추고 노래에 심취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 돌담길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포장마차" >
< 돌담길 앞에서 "노래' 하는 가수 >
< 서울특별시에서 '걷기' 를 홍보하는 조형물 >
< 덕수궁 북편 영국대사관 건물로 덕수궁 내부로 만들어진 '돌담길' >
덕수궁의 뒤편 방향 돌담길도 걸어보고 싶지만, 대학교 모임을 위하여 4시 까지 마포역으로 가기 위하여 덕수궁 앞에 있는 지하철 1호선 시청역으로 내려가 마포역으로 달려간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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