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흥덕왕릉, 양동마을, 옥산서원, 독락당, 대흥사" 의 관람.
오늘(2010년 10월 9일),
한때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모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면서 몇년 간 머물면서 살았든 추억의 고장을 다시 찾아 보는데, 읍사무소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문화재를 한번 찾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본다.
1. 흥덕왕릉(興德王陵).
먼저 안강읍에서 기계면으로 가는 68번 지방도로 따라 한 5분 정도 가다가 또 다시 왼편으로 5분 정도 더 들어가면 한적한 시골 마을이 나타나면서 마을 뒤편에 울창한 숲에 이른다.
그 숲속에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기간 : 826-836년)을 모신 사적 제30호 "흥덕왕릉"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라 왕릉은 경주시내 인접지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유독 이곳 흥덕왕릉 만이 경주시가지를 떠나 이렇게 머나먼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기도 하다.
1977년도 국립경주박물관 사적관리사무소에서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碑片)과 함께 "흥덕(興德)" 이라고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 무덤 임을 밝혀졌다.
흥덕왕은 "장보고" 를 통하여 전남 완도에 청해진 두고 해상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茶) 씨를 들어와 지리산 기슭에 재배 토록하여 문화적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통치력으로 국력을 장악한 왕이라고 알려진 사람인데, 그의 무덤이 이곳 안강읍에 있다는 것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매우 길지(吉地)라서 그런지 궁궁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 흥덕왕을 추모하는 "흥모제(興慕齊)" 사당이 있는데,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왕릉 입구에 있는 안내문을 정독하고 나서 내부로 들어가면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길이 이어지는데, 왕릉 주변으로 그렇게 많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하지만 나무 모두가 바른 것은 하나도 없고 고불고불하게 희어져 있는데, 흥덕왕 영혼이 무슨 조화를 부리는지 아니면 강력한 곱슬머리를 가진 왕인지 모르겠다.
200m 정도 걸어가면 울창한 나무 사이로 넓은 잔디 광장이 나오면서 좌우 4기 "문인석과 무인석" 이 서 있는데, 무인석 모양은 외국인 형상하고 있다.
석상에서 한 50m 정도 잔디밭 속으로 걸어가면 밑면의 둘레가 65m이면서 직경이 22.2m에 높이가 6.4m의 거대한 왕릉 한기가 앞을 가로 맊고 있다.
이곳 왕릉의 밑 모서리에는 돌 난간을 두고 있으며 능의 둘레석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십이지신상" 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정교하다.
왕릉에서 한 2m 정도 일정한 간격 두고서 4모서리에는 "돌사자" 가 앉아 있는데, 돌사자는 왕릉 내부로 침범하는 잡귀와 액운을 막으면서 또한 수호하고 있다.
이곳 왕릉은 삼국유사 "왕력편" 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자리하고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花婦人)과 함께 매장했다" 라고 적혀져 있다.
무덤에서 돌아 나오면서 왼편 숲속으로 걷다보면 문인석 뒤편에 거대한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하나가 있는데, 거북이 등에 비석이 있었다는 흔적이 있으나 파손되어 전연 알 수 없다고 한다.
경주시내에 있는 많은 무덤은 문화재로써 해택을 받고 있어 관리도 잘 되고 또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지만, 이곳 왕릉은 외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보니 방문객 한명 없어 매우 쓸쓸함이 묻어난다.
<흥덕왕릉 입구에 있는 "흥모제" 사당 >
< 왕릉 주변에 자라고 있는 굽은 "소나무" >
< 숲을 지나면 만나는 "흥덕왕릉" 전경 >
< 왕릉 좌우에 자리하고 있는 "문인석상" 형상 >
< 왕릉의 형상과 "둘레석" 전경 >
< 둘레석에 만들어져 있는 "십이지상" 모습 >
< 왕릉을 지키는 "돌사자" 상의 모습 >
< 비석이 파손된 상태의 "거북이" 돌 받침대 >
2. 양동(良洞)마을.
양동마을은 경주시 중심 시가지에서 동북부 포항 방향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는데,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조선 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 역사 마을로 등록이 되었다.
마을은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 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유복하(柳復河)" 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손씨(月城孫氏)" 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 "여강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의 선구적 인물이 되는 "이언적(李彦迪)" 을 낳아 번성하게 되었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 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 유지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사(大事) 또는 소사(少事)의 일에도 상호 협력하면서 살고 있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 40여 가구 및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 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는데, 월성손씨의 종손인 "손동만(孫東滿)" 은 손소의 19대 손이고 여강이씨의 종손인 "이인식" 은 이언적의 15대 손이다.
주요문화재로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향단(보물 제412호) 등 보물 3점과 ·양동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민속자료 12점 등 문화재를 보유한 마을이고, 가옥은 "ㅁ" 자형이 기본형이면서 정자는 "ㄱ" 자형 및 서당은 "一" 자형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마을 높은 지역에는 대부분 기와집으로 형성되어 지고 낮은 지역에는 초가집이 많이 산재하고 있는데, 초가집은 기와집에 살고 있던 양반들이 거닐었던 노비들이나 소작인들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양동마을을 효과적으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마을입구에 있는 "문화해설집" 에서 팜플릿 한장 얻어 보면서 마을의 중앙 길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포항시민들에께 식수원으로 제공하고 있는 "안계댐" 에서 부터 천천히 내려오면서 민속마을의 풍광에 젖어보는 것이 좋다.
마을의 1/3 지점 까지 내려오면 오른편으로 손씨들의 종택인 "서백당" 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깊숙히 들어가면 한 고택을 만나는데, 이 고택이 이조판서를 지낸 우재 "손중돈" 선생님과 동방오현 중 한명인 회재 "이언적" 선생님 외가집이면서 그들 2명은 이집에서 태어난 곳이다.
되돌아 내려오면서 오른편 야산으로 올라가 고개 넘어면 보물 제411호로 지정된 "무첨당" 으로 가는 것이 효과적인데, 무첨당은 이언적 선생님의 종가 별채로 새운 건물이면서 별채 건물에서는 "불천위제사" 모신다고 한다.
여기서 마을 중앙으로 다시 내려와 마을 길 반대편 야산 기슭에 있는 "삼수정" 건물 및 "강학당" 관람하고, 다시 마을회관 쪽으로 내려와 또 다시 마을길의 반대편에 있는 보물 제412호 "향단" 방향으로 올라간다.
향단은 회재 선생님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국가에서 건립하여준 99칸 집이었으나, 현재는 56칸 보존하고 있으며 마을 전체에서 가장 눈에 잘 띠는 위치에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그 옆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마을의 끝단 언덕 위에 거대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는데, 수령이 500여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목의 나무이다.
이 은행나무를 돌아서면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 이라는 아담한 건물의 외삼문이 나타나는데, 외삼문에 들어서면 기다란 건물이 앞을 가로 막는다.
건물의 왼편 마루 위에는 "관가정(觀稼亭)"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그 옆에는 거대한 향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힘에 부쳐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사랑채를 통과하면 안채가 되는 건물이 "ㅁ" 자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여기가 조선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 우재 "손중돈" 선생님이 기거하면서 살림을 하였던 집이다.
마당에 서서 마을 앞으로 내려다 보면 양동마을을 홍보하기 위한 전시관을 건립 중에 있고, 마을 앞 기차 철로에는 한칸의 기차만 외롭게 지나가고 있으면서 그 뒤편에 거대한 안강평야의 넓은 들력이 지평선 형성하고 있다.
마을로 내려와 우측 도로 따라 한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야산의 중터에 "수운정(水雲亭)" 이라는 정자가 고즈늑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정자는 청허재 "손엽" 이 건립한 집이다.
수청운허(水淸雲虛) 라는 문구에서 "수" 자와 "운" 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올라 주위 풍경 돌아보면 넓은 안강 평야에서 익어가는 곡식과 더불어 안강읍 도시풍광이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양동마을 입구에 수 많은 버스와 승용차가 주차하여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나, 이곳 수운정을 찾는 사람 한명도 없어 외로움 속에 묻혀있다.
비싼 기름값을 허비하고 양동마을 까지 와서 이곳을 돌아보지 않은 이유 모르겠는데,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 오늘 세계문화유산 답사했다고 자랑하겠지?
양동마을 자체가 너무 넓은 터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구석구석 다 돌아보면서 견학을 할려면 적어도 1박2일 정도 시간이 필요 할 것 같은데, 3-4시간으로 머물면서 수박 겉 할키로 관광을 끝내고 돌아가는 나도 똑 같은 인간이라 할 말이 없다.
아쉬운 것 중 하나는 대부분 고택에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음으로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 대문이 닫혀 있어 견학의 어려움이 발생하고, 또한 휴식을 가질려고 하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 걷기만 하다가 돌아가야 하는 실정에 다소 짜증이 난다.
< 기와집과 초가집이 혼재하고 있는 "양동마을" 전경 >
< 손씨 종택인 "서백당" 으로 가는 길의 표시석 >
< 거대한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는 "심수정" 전경 >
< 심수정 건물 내부에서 "다도회" 공부하고 있는 모습 >
< 학문을 공부했던 서당 "강학당" 건물 >
< 회재 이언적 선생님이 기거한 보물 제412호 " 향단" 건물 전경 >
< 관가정 앞에 있는 수령 500여 년 정도 "은행나무" >
< 보물 제442호가 되는 "관가정" 의 전경 >
< 관가정 옆에 자리하고 있는 "향나무" >
< 관가정 언덕에서 바라보는 "기차길" 과 안강들력 전경 >
< 양동마을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수운정" 전경 >
< 수운정에서 본 안강시내와 "안강평야" 전경 >
3.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제154호가 되는 옥산서원은 이언적(李彦迪) 선생님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5년(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 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하여 1574년 "사액(賜額)서원" 이 되었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울창한 숲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서원 앞으로 흘러가는 "자계계곡" 에는 조그마한 소(沼)가 하나 있으면서 소로 흘러 들어오는 물과 폭포 형상을 보고 있으니 정겹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 하나로서, 경내 건물로는 외삼문인 "역락문" 을 들어서면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 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이어 계단 올라가면 마당이 전개된다.
정면에는 "구인당" 이라는 당호의 강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구인당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의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구인당 좌우에는 "민구재", "암수재" 재실이 있어 원생들이 기거하는 집이고, 강당을 옆으로 하여 뒤로 돌아가녕 이언적의 위폐를 모신 "체인묘(體仁廟)" 라는 사당이 나타나고 주변에 "장판객", "전사청", "신도비" 등 건물들이 나름대로 자리잡고 있다.
신도비 전체 높이가 320cm이고, 비신 높이 204cm이며, 호남 거유였던 고봉 "기대승(奇大升)" 이 글을 짖고, 아계 "이산해(李山海)" 가 썻다.
서원에 보관되고 있는 이언적의 수필 고본이 보물 제586호로 김부식(金富軾) 의 원저 이곳 (삼국사기) 원본 9책이 보물 제525호로,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이 보물 제524호 및 해동명적(海東名蹟)에는 2개의 2책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는 이러한 문화재을 볼 수가 없지만, 서원 입구에 년말까지 박물관 건립하고 있는 중이라 내년부터 이들의 보물급 문화재를 대면 할 수 있단다.
< 옥산서원 앞에 자리하고 있는 "소와 폭포" 전경 >
< 옥산서원의 입구에 있는 자리하고 외삼문 "역락문" >
< 유생들의 휴식공간이 되는 "무변루" >
< 김정호 글씨의 "옥산서원" 현판이 붙어있는 "구인당" 강당 전경 >
< 이언적의 공덕을 새긴 "신도비" 비각 전경 >
<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체인묘" 로 들어가는 내삼문 >
4. 독락당(獨樂堂).
옥산서원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회재 "이언적" 선생님이 퇴거하여 수도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자리하고 있는데,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님이 조선 중종 27년(1532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사랑채인데. 중종 11년(1516년)에 지은 안채에 부가하여 지었다.
독락당을 일명 "옥산정사" 이라고도 하는데, 독락당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형의 집으로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되어있다.
독락당 옆쪽 담장 방향에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살창을 통해 앞 냇물 바라보게 한 것은 독특한 공간 구성인데. 독락당 뒤쪽 "계정"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보여준다.
이곳에도 사람이 기거함으로 인하여 내부로 들어감이 불가능하여 담장 따라 외곽만 보고 돌아서야 하는데, 독락당 내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15호로써 450여 년이나 되는 "주엽나무" 도 함께 관람이 불가능하여 애석함이 묻어난다.
< 독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솟을 대문" >
< 이언적의 손자 형제가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건립한 "경청재" >
< 보물 제413호인 "독락당" 전경 >
5. 안강 대흥사(大興寺).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좌측편의 야산 기슭에 새롭게 건립된 거대한 사찰 하나가 보이고 있는데, 그 사찰이 자옥산 "대흥사(大興寺)" 이다.
대흥사는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이사(理事) 종단인 보국불교 "염불종(念佛宗)" 의 총본산이 이 곳에 건립되어 있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크기 면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다.
면적 12.400여 평의 대지 위에 건평 1,400여 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한국 대도시는 물론 미국, 캐나다 등 외국까지 기도 포교회관 설립하여 50여만 명의 신도를 거닐고 있는 "생활불교실천도량" 이라고 한다.
입구 좌우 높은 계단을 통하여 올라서면 거대한 "사천왕문" 이 나타나고, 내부 마당에 크다란 인공 연못 속에 "해수관음보살" 상이 자리하고 있다.
해수관음보살 주위에 사람의 손으로 돌리는 "마니주" 가 있으며 조금 뒤편 좌우에는 "법륜상 및 금강저상" 이 있고, 중앙으로 화엄 52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계단 끝에는 "안양문(安養門)" 이라는 돌기둥 문이 놓여있다.
안양문 통과하면 거대한 "극락보전(極樂寶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극락보전 내부에는 초 호화판의 시설과 더불어 "아미타 삼존불" 모시고 있다.
사찰 왼편에는 "미륵존불" 이 서 있고 오른편에는 흰색의 돔형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돔형 건물 내부에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모시고 있다고 한다.
사찰 주위에는 조경이 너무나 잘 되어있는데, "전두한" 전 대통령의 기념 식목나무도 보이고 있으면서 대단한 사찰이라 입이 다물지 못하게 한다.
건축비는 아마도 수100억원의 돈이 들어 갔는 것 같은데, 건물 속속들이 정밀하게 돌아보면서 구경 할려고 하면 아마 한달(?)은 소요될 것 같다.
이렇게 대단한 사찰을 보유한 안강 시민들은 정말 축복을 받을 곳의 지역이 자명하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극락보전에서 극락왕생을 빌어주기 때문이 아니겠나?
< 자옥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대흥사" 입구 >
<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펼쳐지고 있는 "해수관음보살" 상 >
<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법륜상" 전경 >
<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는 "금강저상" 형상 >
< 화엄 52계단 위 중앙 통로에 자리하고 있는 "안양문" 전경 >
< 대흥사의 본당이 되는 "극락보전" 전경 >
< 극락보전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미륵존불" >
< 극락보전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돔형 "사리탑" 전경 >
이상 당일로 안강 주변에 있는 문화재를 돌아보는 하루가 되지만, 시간 관계로 인하여 옥산서원 근교에 있는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 방문하지 못함이 아쉽게 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