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문화와 산행.

선비의 고장 경북 성주군에서 본(本)을 둔 "성씨" 조사 및 "한개 민속마을" 을 찾아.

용암2000 2012. 3. 31. 20:28

2012년 3월 27일.(화요일)

 

오늘도 문중 업무로 성주군청 민원실로 들어가 토지 경계 측량을 의뢰하고, 다소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여 고댁(古宅)으로 유명한 성주군 월항면에 있는 "한개 민속마을" 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 "한개 민속마을" 입구에 있는 입석 >

 

이곳 한개마을은 내가 성주군에 있는 중학교를 다닐 때, 소풍을 가서 처음으로 구경한 추억의 장소이고 그 후에도 몇 번 다녀 본 곳이지만 처음의 기억을 회상하기 위하여 마을 안길을 걸어본다.

 

< 마을 입구 한개마을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고목" 나무 >

 

성주군 지역 명칭은 가야시대에는 "본피현(本彼縣)" 이라고 불려졌는데, 이후 신라 경덕왕 때에는 신안(新安), 고려 태조에는 경상부(京山府), 경종 때에는 광평부(廣平府), 충렬왕 때는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 충선왕 때는 경산부(京山府) 등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 '벽진(碧珍)' 이라고도 잠시 불리지다가 1895년 부터 성주군(星州郡)으로 불려지면서, 오늘날 까지 그 이름이 내려오고 있으면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선비고을이다.

 

<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성주고을" 전경 >

 

한개마을을 설명하기 전, 오늘 내가 감히 성주군이 선비의 고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성주군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성씨(姓氏)들의 집성촌 마을을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성주지역 명칭을 따서 만들어진 성씨가 자그만치 16개가 된다고 한다.

 

제일 먼저 성주군에서 본(本)을 두고 있는 이(李)씨의 성이 자그만치 6개가 되는데, 그 성씨를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 성주(星州) 이씨로 시조는 이순유(李純由)이며, 성주읍 경산동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후손이 약 153.000명으로 제일 번창하게 살고 있으며,

둘째 : 벽진(碧珍) 이씨로 시조는 이염언(李念言)이며, 전국적으로 후손 약 80.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벽진은 성주의 옛이름이며,

셋째 : 성산(星山) 이씨로 시조는 이능일(李能一)이며, 전국적으로 후손 약 65.000명이고 오늘 방문 할려고 하는 한개마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넷째 : 광평(廣平) 이씨로 시조는 이무재(李茂材)이며, 전국적으로 후손 약 65.000명 살고 있는데, 광평은 성주의 옛이름이고,

다섯 : 경산(京山) 이씨로 시조는 이덕부(李德富)이며, 전국적으로 후손 약 7.90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경산도 성주의 옛이름이고,

여섯 : 농서(隴西) 이씨로 시조는 이장경(李長庚)이며, 전국적으로 후손 약 30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성주이씨에서 분파가 되어진 성씨이다.

 

이어서,

성주(星州) 배씨 시조는 배위준(裵位俊) 씨로써 용암면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후손 약 64.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성주(星州) 도씨 시조는 도순(都順) 씨로써 월항면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후손 약 42.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성주(星州) 여씨 시조는 여어매(呂御梅) 씨로써 벽진면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후손 약 15.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성주(星州) 현씨 시조는 현규(玄珪) 씨로써 전국적으로 후손 약 12.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성주(星州) 황씨 시조는 황세득(黃世得) 씨로써 전국적으로 후손 약 5.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성주(星州) 김씨 시조는 김맹(金孟) 씨로써 전국적으로 후손 약 2.000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으며,

성주(星州) 전씨 시조는 전흥(全興) 씨로써 전국적으로 후손 약 1,10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외 명나라 등 외국에서 이주와 성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성주(星州) 석씨 시조는 석성(石星) 씨로써 중국에서 귀화하여 성주에 안착하였는데, 전국적으로 후손 약 2.70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절강(浙江) 시씨 시조는 시문용(施文用) 씨로써 중국 절강성에서 전쟁으로 조선에 왔다가 성주에 안착하여 살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후손 약 900명 정도가 있으며,

파능(巴陵) 초씨 시조는 초해창(楚海昌) 씨로써 성주에 자리잡고 살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후손 약 100명 정도가 터를 잡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성씨들이 양반으로써 텃세와 더불어 상호 경쟁하여 살다 보니 일제시대에도 학문에 지장이 온다고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압력을 넣어 경부선 철도를 금오산 뒤편 구미 방향으로 우회하게 건설하는 불상사를 만들었는데, 그로 인하여 성주군은 현재까지 낙후된 지역으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꺽고 있는 고을이다. 

그 중에서 크게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한개마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산(星山) 이씨 집성촌은 안동 "하회마을" 또는 안강 "양동마을" 과 같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는 못했지만, 옛 모습이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전통마을이다.

 

< "한개 민속마을" 의 전경 >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조인 1450여 년 "이우(李友)" 라는 선비가 입향하여 약 560여 년의 전통을 가진 마을이다.

후손 월봉 "이정현" 씨의 급제 후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를 배출한 선비의 고을이고, 현재 약 75채의 가옥이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 한개마을에 있는 "고댁" 이 있는 방향 표시 >

 

< 마을 안길로 이어지는 "돌담길" >

 

마을 입구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마을의 대로(大路) 따라 서서히 안쪽으로 올라가면 2개의 길로 나누어지는데, 오른편으로는 성산이씨의 한주종댁과 더불어 진사댁, 하회댁,극와고댁, 도동댁, 첨경제가 자리하고 있다.

반대로 길의 왼편으로는 월곡댁, 교리댁, 북비고댁 및 돈재 이공 신도비 등이 자리잡고 있는데, 각 고댁은 기다란 석축 담으로 잘 구획되어 있다.

 

< 오른편에 있는 "진사댁" 안채 >

 

< 진사댁의 초가집 "사랑채" >

 

< 텃밭이 집 안에 있는 "하회댁" 전경 >

 

< 사람이 기거하지 않은 "극와고댁" >

 

< 빈집으로 남아 있는 "도동댁" >

 

< "한주종댁" 의 사랑채 >

 

<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한주종댁의 별채 "한주정사" >

 

< 왼편으로 있는 "교리댁" 대문 >

 

< "월곡댁" 의 사랑채 >

 

< 돈재 "이석문(이공)" 의 신도비 >

 

특히 북비고댁은 영조 때, 시위선전관(侍衛宣傳官)이 되는 돈재 "이석문(李碩文)" 씨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하여 어린 세자 정조를 등에 업고 영조 앞에 나아가 부당 함을 강력하게 호소한다.

그러나 왕의 노염으로 파직을 당하여 고향이 되는 한개마을로 내려와 대문을 북쪽으로 향하게 집을 지었고, 그 후 몇 번이나 벼슬을 하사 받았지만 일체 사양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하면서 두문불출(杜門不出) 하였다고 한다.

   

< 북비고댁의 "사랑채" >

 

< 북비고댁의 "안채" >  

 

< 북비고댁의 "정원" >

 

그래서 그의 집 대문이 북향을 향한다고 하여 북비고댁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한주종택 등 사람이 기거하지 않은 집들이 허물어지면서 문이 굳게 잠겨있다.

내부 구경이 거의 불가능하여 많이 아쉽지만, 북비고댁과 더불어 사람이 기거하는 몇 채의 집을 돌아보니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집이라 역사적인 민속의 가치를 더하여 준다.

 

< 북향으로 지어진 북비고댁의 "대문" >

 

< 대문 위 돈재 이석문의 아들 "정헌공" 이 공조판서 벼슬을 한 문패 > 

 

마을 곳곳에 빈집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러한 빈집들이 그대로 방치하여 허물어지고 있지만 반대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새로운 집을 건립하는 공사가 곳곳에 벌어지고 있다.

신규로 집을 짖는 것 보다 고옥의 문화재 한점이라도 유지 복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지방자치단체 모습을 보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 까지 차 올라와 건성으로 마을 한바퀴 돌다가 발길을 돌린다.

 

< 곳곳에 "패가" 로 방치하고 있는 고댁 >

 

해발 331.7m의 영취산이 "한개마을" 을 감쌓고 있으면서 그 영취산 8부 정도 능선에는 "감응사(感應寺)" 사찰이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개마을 중앙을 통과하여 약 1시간 정도 걸어가면 사찰에 도착 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지만, 왠지 오늘은 걷기가 싫어 마을 뒤편으로 우회하여 만들어진 차도를 이용하여 편하게 사찰 입구 까지 올라가 본다.

 

< 영취산 8부 능선 쯤에 있는 "감응사" 와 한개마을 전경 >

 

사찰 옆에 만들어진 주차장에서 성주읍 방향으로 내려다 보면 참외의 고향답게 온천지가 하얀 비닐로 덮혀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얼마나 비닐하우스가 많은지 햇빛으로 반사되는 반사 열로 인하여, 성주군 전체 온도가 주변의 지방 보다 몇 도가 높다고 한다.

 

< 성주 참외를 키우고 있는 "비닐하우스" 전경 >

 

감응사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년)에 건립한 고찰이면서 애장왕 아들이 눈이 나빠 앞을 볼 수 없어 온갖 약을 다 써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한 스님의 이야기에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가 앉은 자리에 있는 곳에 나오는 물을 먹고 씻으면서 눈이 나았다고 한다.

 

< "감응사"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바위 틈에 자리잡고 있는 "감응사" 전경 >

 

그 장소에 사찰을 지어 처음에는 "감은사(感恩寺)" 로 불려지다가 현재는 감응사로 불려지고 있는데, 사찰의 대웅전 뒤편에 은해의 샘이 있지만 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봉함하고 파이프를 설치하여 밖으로 물을 빼서 마시도록 하고 있다.

 

< 감응사 "대웅전" 모습 >

 

< 대웅전 앞에 있는 "종각" >

 

한 바가지 물을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시키고 나서, 천천히 사찰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전각들을 돌아보다가 승용차가 주차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와 대구에 있는 집으로 향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