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군이 배출한 한강 "정구" 선생님의 회연서원 및 무흘구곡을 돌아보면서.(1)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오늘도 나의 고향인 성주군 용암면 마월동으로 잠시 들어가 간단한 노가다 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대봉동에서 곰지골이라는 두뫼산골 마을 방향으로 길을 잡아본다.
이곳 도로는 나의 고향에서 성주군이 자랑하는 가야산 백운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산골로 운전하면서 수륜면으로 넘어가 지방도로 913번 따라 대가천에 이르는데, 가는길 곳곳에 가뭄으로 저수지 물이 반 이하로 떨어져 농부들이 땀을 흘려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가천 지류에 있는 송계리 앞에 이르니 한 무리의 일꾼들이 대가천 지류에서 도랑을 수리하고 있다.
이 도랑 건너편 한강 "정구" 선생님이 명명한 무흘구곡의 제2곡이이 되는 "한강대" 가 있다는 이정표가 눈 앞에 머문다.
어짜피 이곳까지 왔으니 한강대나 한번 올라가 볼려고 "갖말" 마을로 들어가 정자에 머물고 있는 할머님들에게 길을 물으니 마을 뒤편 산 위에 한강대 정자가 있었지만, 현재는 파손되어 없어졌고 또한 풀과 숲이 너무나 우거져 갈 수가 없다고 한다.
< "갖말"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
그래서,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대가천 다리를 건너 한강 정구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회연서원" 에 도착하여, 한강 선생님의 발자취를 한번 되돌아 보고자 한다.
1.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은 성주군 수륜면 대가천 변에, 조선 선조 때 대유학자이면서 문신인 한강 "정구(鄭逑)" 선생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들에게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인조5년(1627년)에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정구 선생님은 중종38년(1543년)에 태어나 광해군12년(1620년)에 77세에 돌아가셨으며, 판서인 아버지 정사중(鄭思中)과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 태어나 성주에 정착하여 살았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에서 정구 선생님이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한 곳으로 숙종16년(1690년) 현판,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국가로 부터 서원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 되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1970년도에 복원된 서원이다.
서원의 주향(主享)인 한강 정구는 외증조부인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풍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는 우승지,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에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리고 나서, 영의정으로 추증되는 역사적 인물이 된다.
회연서원 마당에 들어서니 옛날 몇 번 방문을 통하여 문화 해설사 이야기를 들어보는 기회를 가진 서원이 되었지만, 오늘은 안내소 문이 굳게 닫혀 있으면서 안내원도 상주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외삼문인 2층 "견도루(見道樓)"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오른편에 있는 "신도비" 방향으로 발길을 잡아본다.
< 문이 굳게 잠겨진 "견도루" 문 >
신도비는 용왕님의 아드님인 거북이 모양의 등에 비각이 서 있으며, 비각 위의 용두에는 용의 형상이 아닌 이무기 형상의 비두가 놓여 있는데, 용 조각은 임금님 외에는 사용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옛날 해설이 생각난다.
< 서원의 오른편에 있는 "신도비" 모습 >
이 신도비 옆으로 대문이 없는 개구멍 출입문이 있어 내부로 들어가며는 한강 정구 선생님이 손수 일구어낸 백매원(百梅園) 정원에 이르면서, 약 400년된 느티나무가 서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 한강 "정구" 선생님이 가꾼 백매원 정원 >
< 400년 된 느티나무와 굳게 잠겨진 "내삼문" >
이 느티나무 뒤편의 내삼문도 굳게 닿혀 있어 바로 서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다가 서원의 왼편에 있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집으로 들어가 보니, 아무도 보이지가 않는다.
< 서원 왼편에 있는 "숭모각" 전경 >
이 관리사 옆으로 서원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어, 문을 살며시 열고 내부로 들어가 보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구(舊)사당, 전사청, 향현사 등의 건물은 닿여 있으며, 오직 강당 및 동재, 서재 건물이 있는 마당으로 미로 같이 찾아 들어 갈 수 있다.
< 굳게 잠겨져 있는 "사당" 문 >
< 서원 오른편에 있는 "향현사" 전경 >
옛날 방문 시에는 이곳 서재 마루에 앉자 문화 해설사의 강론을 들으면서 옛 성현의 발자취를 더둠어보는 시간 가졌지만, 오늘은 옛날 해설만 상기하면서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마당을 배회하여 본다.
< 한 때 마루에 앉자 해설을 들었던 "서재" 모습 >
정면 5칸에 측면 3칸, 맞배지붕의 강당에는 지붕에 비가 세는지 지붕 반쪽 전체를 푸른 비닐로 뎦혀 있어 보는 풍경이 말이 아니다.
< 지붕을 수리하고 있는 "강당" 모습 >
< 한석봉의 글씨인 "회연서원" 명판 >
< 관리가 되지 않고 풀이 무성한 "사원 건물" 전경 >
오직, 강당 처마 밑에 한석봉 선생님이 썼다는 "회연서원(檜淵書院)" 현판만 외롭게 나그네를 마중하고 있어 잠시 머뭄을 가지고 나서, 정구 선생님의 묘소와 더불어 정구 선생님의 발자취와 그의 한시로써 명명을 남긴 "무흘구곡" 을 찾아 나선다.
2. 한강 정구선생님 묘소 참배.
회연서원을 나와 한강 정구 선생님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는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에 있는 선생님 산소를 찾아가 본다.
성주읍에서 초전면으로 가는 길에 먼저 성주고등학교 입구를 만나고, 그 곳에서 조금만 더 초전방향으로 올라가면 정구 선생님의 묘소가 있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 따라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마을 왼편으로 거대한 사찰의 불상이 보이고 있으며,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울창한 느티나무와 더불어 아담한 정자가 나타난다.
< 동서남북 4방향의 거대한 "부처님" 을 가진 불상 >
< 마을 앞 울창한 "느티나무와 정자" 모습 >
이 느티나무 뒤편으로 거대한 4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 뒤편으로 아담한 무덤 몇 기가 보이는데, 이 무덤 제일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무덤이 한강 "정구" 선생님의 무덤이다.
< 한강 "정구" 선생님 무덤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지키는 소나무 >
< 후손들과 함께하는 정구 선생님 "묘소" >
잘 가꾸어진 잔디 밭을 통과하여 제일 위쪽 정구 선생님 무덤 앞에 서면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무덤의 상석 크기에 한번 놀램이 발생하고 무덤 앞면이 둥글지 않고 거의 수직으로 되어 있어 좀 특이한 모습을 한 무덤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영의정이라는 정승의 무덤 형태인지 궁궁하다.
< 정구 선생님의 묘소 : 거대한 "상석과 추모비" 및 좀 특이하게 만든 무덤 앞 모습 >
무덤 뒤편에 서서 풍수지리를 살펴보면 좌청룡과 우백호가 확실하게 거닐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넓은 성주읍시가지와 더불어 멀리 성주의 앞산이 되는 "성산" 모습이 아련하게 보이므로 풍수에 대한 무뢰한의 눈에도 명당이라는 것을 바로 느낌이 오는 장소이다. -끝-
< 무덤 뒤편에서 바라보는 "성주읍시가지 및 성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