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 산재하고 있는 "유적지" 와 교동 지역에 있는 "교촌마을" 을 돌아보고서.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경주 남산연구소에서 실시하는 "삼릉가는 길" 트레킹 실시하기 전 여분의 시간 동안 경주시가지에 산재하고 있는 문화 유적지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최부자의 99칸 집 및 교동 법주를 만드는 집 등 고옥(古屋)이 밀집하고 있는 "교촌 마을" 을 돌아보는 시간을 진다.
1. 오릉(五陵).
사적 제172호가 되는 신라 오릉(五陵)은 남산에서는 서북쪽에 해당하고, 경주 시내에서는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초기 "박(朴)씨"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사적지에서도 입장료 500원과 주차비 500원을 지불하고, 매표소를 지나 넓은 정원을 통과하면 거대한 "신라오릉 정화사업 기념비(新羅五陵 淨化事業 紀念碑)" 입석이 서 있다.
이 기념비에서 왼편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오릉으로 들어가는 "숭의문(崇義門)" 과 제례용 음식을 보관하는 건물이 있으며 그 뒤편으로 다섯개 무덤이 나타나는데, 이 무덤은 신라 제1대 박혁거세왕,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과 제1대 박혁거세왕의 왕후인 알영부인(閼英夫人)의 무덤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지만, 겉 보기는 경주시가지의 평지 무덤과 같이 둥굴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면서 무덤 주위에는 고목(古木)의 소나무들이 잘 조성되어 있다.
왕릉을 한바퀴 돌아보고 원점으로 돌아와 신라오릉 정화사업 기념비 오른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릉에서 잠들고 있는 왕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숭덕전(崇德殿)" 건물과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 등이 자리잡고 있다.
< "오릉" 입구에 있는 조감도 >
< 오릉으로 들어가는 길과 "오릉 정화사업 기념비" >
< 오릉 앞에 있는 "숭의문" >
< 제1대 "박혁거세왕" 등 오릉 전경 >
< 오릉을 지키는 "소나무" 군락지 >
<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덕전" 전경 >
< 숭덕전 옆에 있는 "신도비" 모습 >
2. 계림(鷄林).
계림은 사적 제457호로써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있는 숲으로 경주 김(金)씨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金閼智)" 가 태어났다는 유서 깊은 숲이다.
신라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무 가지에 빛나는 금궤가 걸려 있어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몸소 숲으로 나와서 금궤를 내려보니 금궤 내에서 사내 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빛나는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 씨로 하였으며 이름을 "알지" 라고 하였고, 아울러 이 숲을 "계림" 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고 계림과 인접하게 북쪽 방향으로 사적 제188호가 되는 신라 제17대 "내물왕릉(奈勿王陵)"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내물왕은 김씨로서의 2번째 왕이며 그 때까지 빈약한 왕권을 강화시켜 고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시킨 왕이다.
< 낙옆이 떨어진 쓸쓸한 "계림" 모습 >
< 계림 숲의 중앙에 있는 "비각" 건물 >
< "계림비각" 모습 >
< 계림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비석" >
< 계림과 함께하는 "내물왕릉" 전경 >
< 신라 제17대 "내물왕릉" 모습 >
3, 첨성대(瞻星臺).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써, 신라 제50대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조성한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렸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 정(井)" 자 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되어 있다고 한다.
정남쪽 방향의 석단에는 아래로 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를 만들어서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으며, 이 출입구 아래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첨성대 크기는 밑면의 지름이 5.17m에 높이가 9.4m 이며 지석대 한변의 길이가 5.35m 로써, 신라시대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의 조형미를 잘 표현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하여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방향에서나 잘 보여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지만, 입장료 500원을 지불하고 가까이에서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입구 매표소 옆에 무료로 첨성대가 만들어진 과정을 비디오를 통하여 상영 함과 동시에 우주 천체에 대한 별자리 모형도를 만들어 놓은 관측 시설도 함께 하고 있어, 어린이들에게 별자리 공부할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다.
< 계림과 반월성 사이에 있는 "첨성대" 전경 >
< 사다리를 놓고 첨성대로 올라가는 사각형 "출입구" >
4. 월성(月城).
월성은 신라 때 궁궐이 있었던 장소로써, 지형이 초승달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신월성(新月城)" 이라고 불렸으며 또한 임금님이 기거하는 성이라서 "재성(在城)" 이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부터 "반월성(半月城)" 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弧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가 어렸을 떄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하겠되므로 신라 제2대 남해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사위로 삼았다가 그 후 석탈해를 신라 제4대 왕으로 추대하었다고 하는 설(說)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성 내부에는 보물 제66호가 되는 "석빙고(石氷庫)" 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 쌓았으며 크기는 길이 19m에 넓이 6m, 높이 5.45m의 직4각형으로 만들었으며 석빙고 내부를 쌓은 돌이 약 1.000개가 된다고 한다.
천정에는 공기를 유통시키는 3개의 구멍이 있으며, 바닥에는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 사진으로 보는 "반월성" >
<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반월성" 전경 >
< 반월성 내에 있는 "석빙고" 모습 >
5, 사마소(司馬所).
경주 남쪽 교촌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사마소는 조선시대 과거를 합격한 그 지방의 원생과 진사들이 유학(儒學)을 가르치거나 정치(政治)를 토론하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자기 수양을 위하여 이곳을 종종 찾은 곳으로 연산군 시대에는 진사(進士). 생원(生員)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또한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식도 빌려주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지식을 연마하는 "사마소" 전경 >
6. 경주 향교(慶州 鄕校).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 지내고, 지방 민(民)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이 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처음 세운 국학(國學)으로써,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써 지방교육기관의 역활을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33년(1600년)에 "대성전(大成殿)" 을 비롯하여 제향 공간을 다시 짖기 시작하여, 광해군 6년(1614년)에 명륜당(明倫堂)을 비롯하여 강학 공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위쪽 높은 곳에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의 대성전과 함꼐 동무(東務)와 서무(西務)를 두고 있으며, 아래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고 생활하는 공간이 되는 명륜당과 함께 동재와 서재를 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공간을 두고 있는 장소이다.
특히 대성전 건물은 보물 제1727호로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가진 건물로써,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한다.
< 경주 향교로 들어가는 "외삼문" >
<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전경 >
<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건물 >
< 유림들이 공부하는 "명륜당" 건물 >
7. 경주 교동최씨 고택(慶州 校洞崔氏 古宅).
이 가옥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 경에 건립된 고택으로써,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라잡고 있다.
고택 구조는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나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도에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고, 안채는 "ㅁ" 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ㅡ" 자 형이며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은데, 최씨 집안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대부분 재산을 영남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대구대학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 "경주 최부자"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
< 대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사당" 건물 >
< 사당 앞에 있는 경주 최부자 집 "교훈" >
< 안채로 들어가는 "내문" >
<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안채" >
< 경주 최부자 집의 집안을 다스리는 "육훈" >
< 경주 최부자 집에서 본인을 다스리는 "육연" >
< 최부자 집에서 키우는 우라나라에서 풍산개, 진도개와 함께 3대 명견에 속하는 꼬리가 없는 "경주개 동경이" >
8. 교동 법주(校洞 法酒).
교동 법주는 경주최씨 종가집과 담장으로 구획한 고옥(古屋)이며, 조선 숙종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는 관직에 있던 "최국선" 씨가 고향으로 내려와서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한 술이라고 한다.
9대 진사(進士)와 12대 만석꾼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 최부자 집 가양주로 300년의 역사를 함께하여 왔으며, 그 뿌리가 깊듯이 맛 또한 깊다고 한다.
누대에 걸쳐 봉 제사와 접빈객을 위하여 사용하여온 법주와 전통 안주가 많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중 1986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는데, 최씨 가문의 며느리 "배영선" 씨가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아 제조비법을 전승하여 왔으며 현재 그의 아들 "최경" 씨가 2대째 기능 보유자로 인정받아 술을 빚고 있다고 한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입구에 직접 구매가 가능한 법주 Sample과 더불어 가격표를 부착하고 있고 마당을 지나면 고옥의 안채를 만나는데, 이 안채도 사람이 거주하므로 출입을 제한 시키고 있다.
< 최부자 집고 나란히 하고 있는 "교동 법주" 만드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
< 진열하고 있는 "교동 법주" Sample >
< 교동 법주 집 "안채" 고옥 >
9. 기타.
이 밖에 교촌 마을에는 집단적으로 많은 한옥 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낮게 둘려쳐 있는 담장 넘어로 펼쳐지는 한옥에는 공예품 전시장, 민속 음악관, 전통문화 체험실, 교촌 홍보관, 휴게소 등이 자리잡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교촌 마을에서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하였다는 장소에 지어진 요석궁(瑤石宮), 최가밥상 등 한정식 식당들과 함께 자리잡고 있어, 전통 음식을 체험 할 수 있는 먹거리 촌에 외국 손님의 발길이 이어진다.
< 경주 "교촌 마을" 을 알리는 입간판 >
< 교촌 마을 돌아보는 "관광객" >
< 교촌 마을 내에 있는 "조각품" >
< "요석궁" 으로 들어가는 대문과 음식 가격표 >
< "요석궁" 식당 내부 건물 >
< 한정식당 "최가밥상"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