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서악지구" 유적지 및 시내 지역의 문화재를 함께 돌아보고.(1)
2013년 2월 19일 (화요일)
국립공원과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루어진 경주시가 보유하고 있는 유적지를 몇십 년 전 대충 구경하여 보았지만, 추억 속으로 완전히 망각된 유적지를 다시 한번 더 회상 함과 동시에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Wife와 둘이서 경주시내로 떠나본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경주로 내려가다가 건천휴게소로 잠시 들어가 경주시가 보유하고 있는 유적지 관련 지도 한장을 얻어 관람할 곳을 Check 하여 보는데, 작년부터 경주 남산과 더불어 몇 곳을 방문한 곳을 제외하고 다시 관람하여 보고 싶은 "서악지구" 와 경주시가지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지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돌어본다.
1. 김유신 묘(金庾信 墓).
경주시가지에서 서쪽 방향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묘(墓)는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松花山)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에 위치해 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모양의 무덤이다.
김유신 장군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이 되는 "구형왕" 의 증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으며, 무예와 지락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앞장서서 지휘하였다고 한다.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합병하였고, 이어 문무왕 8년(668년)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한반도 전체를 부속 시킬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다.
문무왕 때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직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 으로 추대된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하면서 삼문(三門)을 통과하여 능선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김유신 장군의 릉(陵)을 만나는데, 릉의 밑둘레가 50m에 지름이 18m, 높이가 5.3m로써 릉의 아래쪽에서 높이 1.2m의 십이지상을 새긴 보호석이 둘려져 있다.
십이지상(十二支像)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머리는 십이지의 동물 머리를 하고 있다.
< "김유신 묘" 로 들어가는 출입문 >
< "김유신 묘" 의 전경 >
< 비석의 뒤편에 "태대각간" 을 새긴 비석 >
< 무덤 왼편에 있는 "흥무대왕" 을 나타내는 비석 >
< 무덤 돌레 보호석으로 만들어진 "십이지상" >
< 많은 누수로 혼탁하여진 "십이지상" >
< '뱀' 의 머리를 하고 있는 십이지상 >
< 무덤 뒤편에서 본 "김유신 묘" >
2. 숭무전(崇武殿).
김유신 묘의 입구로 다시 내려와 오른편 산 골짜기로 내려가면 넓은 공터가 나타나는데, 공터의 입구에는 "十" 자 모양의 금산교육관(金山敎育館)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주차장과 함께 숭무전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숭무전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먼저 홍살문을 만나고 그 뒤편으로 숭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지만,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관람이 불가능하게 한다.
이곳 숭무전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흥무대왕(즉: 김유신 장군)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으로, 1992년에 전각을 세우고 1993년에 부속 건물을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 김유신 묘 입구에서 "숭무전" 으로 가는 이정표 >
< 숭무전 입구에 있는 "금산교육관" 건물 >
< 숭무전 입구에 있는 "홍살문" >
< 굳게 잠겨져 있는 "충의문" >
< 숭무전 내에 있는 "건립기념비" >
3. 신라 무열왕릉(新羅 武烈王陵).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기간 : 654-661년) 릉은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말단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무열왕 김춘추는 신라왕 중에서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에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릉의 밑 둘레가 114m에 높이가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릉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무덤 입구에 있는 무열왕릉 비(碑)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문화재가 되는데, 현재 빗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세긴 머릿돌만 남아있으면서 길이가 333Cm에 너비 254Cm, 높이 86Cm이다.
이 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라는 글씨가 돋을 새김되어 있어, 이 곳이 무열왕의 릉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비석의 받침돌에 만들어진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어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높이가 110Cm인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위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 선도산 기슭에 있는 "무열왕릉" >
<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쌓여 있는 "무열왕릉" >
< 무열왕릉을 알리는 국보 제25호 "비" >
< 태종 "무열왕릉 비"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4. 서악리 고분군(西岳里 古墳群).
태종 무열왕릉 뒤편으로 돌아가면 4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은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는 않지만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의 무덤이거나 왕족의 무덤이라고 추측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덤의 크기는 본붕 높이가 15m이내 이지만, 밑둘레가 110m에서 140m로 대단히 큰 무덤에 속한다고 한다.
이 무덤 군을 통하여 뒤편으로 나아가면 경주 북서쪽에 해발 390m의 선도산(仙桃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선도산 주변에는 많은 사적을 포함하여 영경사지, 애공사지 등 사찰 터가 자리잡고 있고 산의 정상에는 높이 7m의 선도산 불적(佛跡)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마애여래입상 삼존불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선도산으로 올라가는 임도 변에 또 다른 4기의 왕릉이 나타나는데, 이 왕릉은 신라 제 46대 문성왕릉을 비롯하여 제 24대 진흥왕(眞興王), 제 25대 진지왕(眞智王), 제 47대 헌안왕(憲安王) 릉으로 밝혀 졌다고는 하나 왕릉로서의 관리가 매우 미흡하다.
이 왕릉 앞으로 보물 제65호 "서악리 3층석탑"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으로 높이가 4.06m로써 바닥 돌 위에 다듬은 돌맹이 8개를 어긋 물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1층 몸체의 남쪽 문틀 양쪽에 인왕상의 돋을세김을 한 탑이다.
이 석탑 옆으로 선도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로 1.3Km 올라가면 선도산 정상 부위에 보물 제62호 "마애여래입상" 삼존불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나 승용차는 올라가기 어렵다는 주민의 이야기로 포기한다.
< 무열왕릉에서 "서악리 고분군" 으로 올라가는 길 >
<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4기의 무명 "서악리 고분군" >
< "서악리 고분군" 을 설명하는 안내문 >
< 앞쪽에 있는 제일 큰 "무덤" >
< 선도산 가장자리에 있는 4분의 "왕릉" >
< 제 46대 "문성왕릉" 모습 >
< "문성왕릉"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보물 제65호 "서악리 3층석탑" >
< 선도산 정상과 "마애여래불" 로 가는 안내판 >
5. 서악서원(西岳書院).
태종 무열왕릉으로 다시 내려와 왕릉 옆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서악서원을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이내 주차장에 도착하므로 주차하고, 서악서원으로 발길을 잡아본다.
서악서원은 경주 부윤 "이정(李楨)" 선생님이 조선 명종 16년(1561년)에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당시 경주지역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 선생님의 위패도 함께 모시자는 의견을 듣고, 퇴계 이황 선생님과 의논하여 함께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이곳 서원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건립하여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는데, 서원 현판은 그 당시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元振海)" 선생님이 쓴 글씨라고 한다.
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앞면 5칸에 측면 1칸의 2층 "영귀루" 누각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누각을 통과하면 동재와 서재 건물과 더불어 서원의 강당 "서악서원(西岳書院)" 을 만나는데, 강당 안쪽 벽면에는 시습당(時習堂)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강당을 돌아서 뒤편으로 나아가면 김유신 장군과 설총, 최치원의 위패을 모시고 있는 사당 건물을 만나지만, 어느 사당과 동일하게 내삼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로 들어감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서악서원" 으로 들어가는 문 >
< 서원을 들어가면 만나는 "영귀루" >
< 사람이 기거하는 "동재" 건물 >
< 유생들이 기거하였던 "서재" 건물 >
<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서악서원" >
< 조선 서예가 "원진해" 선생님의 글 >
< 김유신 장군과 설총, 최치원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전경 >
오전 관광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보문단지 입구에 있는 "맷돌 순두부" 집으로 들어가니, 기다리라는 순서의 증표(證票)로 밥퍼 주걱하나를 주는데, 그곳의 숫자가 55번이 되어 한없이 기다림을 가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