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우암회 정기총회 및 송년회 모임과 더불어 "융릉 및 건릉" 을 찾아 관람하면서.
2013년 12월 14-15일 (1박2일)
1. 첫째날.(14일 : 토요일)
고등학교 동문으로 구성된 "우암회(友巖會)" 는 2013년 12월 14일 정기총회 및 송년회를 수원에 있는 회장 자택에서 오후 4시 부터 부부 동반으로 개최한다는 연락을 받고, 몇일 전 부터 수원으로 올라 갈려고 기차표 예매를 시도하렸으나 철도노조 파업으로 많은 기차가 운행되지 않아 약 1시간 30분 정도 빨리 도착하는 새마을호 특실만 겨우 예약을 한다.
오후 2시 경 수원역에 도착하여 다소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여 주변에 있는 애경 백화점으로 들어가 Shopping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3시 30분 회장의 Pick-up으로 병점 인근지역에 있는 회장댁 아파트로 방문하는데, 영남지역에 살고 있는 3명의 회원이 불참하므로 총 8명 중 5명(부부포함 : 10명) 및 비회원 한명이 추가로 참석하므로 총 인원 11명이 모임을 가진다.
< 회장이 살고 있는 "아파트" 전경 >
저녁식사와 더불어 간단하게 정기회의를 끝내고 풍족한 음식과 주류를 통하여 밤 늦게까지 이야기 삼매경(三昧境)에 빠지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지는데, 내가 심하게 코를 골므로 친구들이 다 도망가고 혼자 독방을 점유하는 행운을 가진다.
< 아파트 "거실" 에서 식사와 여가를 즐기면서 >
2. 둘째날.(15일 : 일요일)
아침 늦게까지 꿈 속에 머물다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경기도 수원시의 또 다른 명소이면서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비극적인 역사가 숨어있는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잠들고 있는 "융릉(隆陵) 및 건릉(健陵)" 을 관람하기 위하여 길을 나선다.
아침 11시 경 아파트에서 출발하여 10분 거리에 있는 왕릉 앞에 있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매표소로 올라가니, 10명 이상는 단체가 되므로 인당 800원의 입장권을 구입하고 첫 관람지로 매표소 뒤편에 있는 재실(齋室)을 먼저 방문하여 본다.
< "융릉과 건릉" 을 알리는 입간판 >
< "재실" 담 모퉁이를 이용하여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 >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재실 정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매표소 뒤편 쪽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는데, 하얀 눈으로 치장하고 있는 정면 6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재실 건물이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 제례를 주관하는 "재실" 모습 >
마당 가장자리에는 개 비자나무 한그루와 그에 대한 설명문 붙어있는데, 이 개 비자나무는 비자나무와 비슷하지만 비자나무는 따뜻한 남쪽 지역에 많이 자생하지만 개 비자나무는 추운지역 까지 자생이 가능하여 진다고 한다.
< 재실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개 비자나무" >
재실을 나와 매표소 건너편에 수령 140년 정도 되어진 향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나무의 북쪽 방향의 가지는 죽어 앙상한 뼈로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면 남쪽 방향의 가지에는 푸른 잎에 보여주고 있어 힘겨운 삶의 끈기를 보여주고 있다.
< 수령 약 140년 된 "향나무" >
검표소 입구로 올라가면 입구 가장자리에 세계유산 조선왕릉이라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융릉과 건릉" >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승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王)과 왕비(王妃)의 릉(陵)을 엄격하게 관리 되는데, 총 42기의 릉(陵)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 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祭禮)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검표소에서 입장권을 보여주고 왕릉 내부로 이동하면서 걸어가면 왕릉 주변 모두가 하얀색의 눈으로 덮혀져 있어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렇게 백설의 길을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걷기에 안성맞춤의 산책길이 된다.
< "융릉과 건릉" 이 자리하고 있는 조감도 >
< "왕릉" 으로 올라가는 초입길 >
산책길로 조금 올라가면 길이 좌우 2개로 나누어지는데, 왼편으로 정조대왕의 무덤인 "건릉(健陵)" 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隆陵)" 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어 대부분 사람들은 존경심의 발로로 어른인 사도세자가 잠들고 있는 융릉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 "융릉과 건릉" 으로 나누어지는 갈림길 >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길 따라 조금 걸어가 작은 돌다리의 금천교(禁川橋)를 건너면 융릉의 구역으로 들어서는데, 왼편으로 곤신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고 하지만 백설로 인하여 연못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왕릉으로 바로 올라가는데, 왕릉 입구의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과 더불어 신과 왕이 구분하여 걷는 참도(參道)의 길과 더불어 제례를 올리는 T자 형태의 건물 "정자각(丁字閣)" 이 자리잡고 있다.
<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이어지는 "왕릉길" >
< 제향 공간으로 들어가는 초입 "홍살문" >
< 제례를 드리는 "정자각" 건물 >
이곳에 잠들고 있는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生父)의 무덤으로써, 사도세자는 어려서 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가 뛰어나므로 영조는 자신을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담당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론(老論)과의 마찰로 인하여 "나경덕" 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세자로써,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로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 으로 올렸고, 광무 3년(1899년)에 "장조(莊祖)" 로 추존되어 죽어서야 비로서 왕으로 등극하는 비극적인 인물이 된다.
또한 우리들이 배운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서 잘 알려져 있는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 씨의 딸로 영조 20년(1744년) 세자의 빈으로 책봉 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에는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내렸으며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화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閑中錄)" 을 남기는데,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 받을 때 함께 "헌경왕후(獻敬王后)" 로 추존 된다.
정자각 뒤편으로 잘 관리되어진 잔디밭 넘어 무덤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무덤이 장조와 헌경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능침(陵寢) 공간이지만 접근이 불가능하므로 먼 발치에서 사진 몇 장을 담아본다.
< "장조와 헌경왕후" 가 잠들고 있는 융릉 전경 >
사도세자의 초기 무덤은 경기도 양주 매봉산 영우원에 묻혀있는 시신을 정조 13년(1789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으며, 그후 순조 16년(1899년)에 혜경궁 홍씨의 헌경왕후가 돌아가므로 이곳에서 합장을 하였다고 한다.
< 가까이 당겨서 보는 "융릉" 모습 >
왕릉 주변에 있는 비각(碑閣)까지 구경하고 나서 왼편으로 이어지는 허리길 따라 정조대왕이 묻혀있는 건릉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눈으로 길이 매우 미끄러움이 발생하여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천천히 걸으면서 상쾌하게 뿜고있는 피톤치드로 삼림욕에 빠져본다.
< "장조와 헌경왕후" 를 기리는 비석 >
< 융릉에서 건릉으로 넘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묘목나무" >
< 피톤치드가 발산하고 있는 "산책길" >
나즈막한 구릉 한개를 넘어가니 주변에 있는 나무가 참나무로 수종의 변화를 가져오므로 앙상한 나무가지로 다소 썰렁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참나무 밑 둥지에 시들음 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검은 비닐로 감쌓고 있어 더욱도 삭막감이 일어난다.
< 참나무 "시들음" 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비닐로 감겨져 있는 모습 >
참나무 숲속으로 한참 올라가면 정조대왕이 묻혀있는 건릉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도 융릉과 동일하게 홍살문과 참도 및 정자각 건물이 보이지만 정자각에서 부터 보수로 펜스를 치고 있어 더욱더 쓸쓸함이 묻어난다.
< 참나무가 도열하고 있는 "건릉" 입구 >
< 건릉 입구에 있는 "홍살문" 앞에서 >
이곳에 잠들고 있는 정조(正祖)는 조금 전에 구경한 추존 장조의 둘째 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英祖)가 승하(昇遐) 하자 왕위에 오른 왕인데, 즉위한 후 "과인은 사도세자 아들이다" 라고 천명하므로 사도세자를 제거한 노론의 벼슬아치들이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된다.
그러나 문무를 겸비한 정조는 규정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 가면서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는 최참판 청원부원군 김시묵씨의 딸로 영조 38년(1762년)에 세손의 빈으로 책봉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 된다.
1.800년 정조가 승하를 하자 처음 무덤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있는 융릉으로 올라가는 길의 오른편에 초장으로 묻었으나, 순조 21년(1821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효의왕후와 합장으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여기 건릉도 앞에서 보았던 융릉과 비슷하게 넓은 잔디밭 넘어로 능침 공간으로 구획하므로 가깝게 접근이 불가능하므로, 먼 발취에서 능침과 더불어 비각 등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오솔길 따라 왕릉을 떠난다.
< "정조와 효의왕후" 가 잠들고 있는 건릉 모습 >
< 왕릉 앞 오른편에 있는 "비각" >
< "건릉" 을 떠나는 일행 >
그런데 내려오는 길의 중간지점에 융릉과 건릉 뒤쪽 산맥(山脈) 따라 둘레 산책길이 만들어져 있어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 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지만, 눈으로 인하여 걷는 사람도 없고 또한 출입 통제 표시로 더 이상 걷지 않고 입구로 내려간다.
<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둘레 "산책길" 방향 >
원점인 왕릉 입구에 도착하면 우측편으로 정조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융릉 및 건릉 역사문화관" 이 만들어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 영조와 정조대왕의 가계도를 비롯하여 많은 자료를 구경하여 보는데, 한번 더 사도세자와 정조의 일대기를 상기시켜 본다.
< 출입문 왼편에 있는 "융릉 및 건릉 역사문화관" 건물 >
< "역사문화관" 내부를 관람하는 일행들의 부인 >
< "정조와 효의왕후" 일대기 설명서 >
그러고 나서 왕릉 앞에 있는 "원조 닭 한마리" 라는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가지는데, 닭을 이용하여 한가지 특색있는 요리로 만들어지므로 별식의 식사 시간이 된다.
< 왕릉 앞에 있는 "원조 닭 한마리" 식당 >
< 특별하게 요리하는 "닭 한마리" 식당 >
< 식사를 즐기는 "우암회" 회원 >
풍족하게 음식을 즐기고 나서 식당 앞에서 회원간의 헤어짐을 가지는데, 내년에도 건강하게 다시 만나 더욱더 빛나는 우암회 모임을 지속시키자는 약속을 다짐하면서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