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fe 및 작은 아들과 함께 1박2일 동안 멀고도 먼 "전라도 지역" 의 탐방기를 기록하면서,
2009년 9월 28/29 일.(1박 2일)
아침 일찍 2째 아들이 운전하면서 Wife와 나는 뒷 좌석에서 편안하게 동행하면서 머나먼 전라도 지방으로 장거리 여행하여 본 내용 기술하기로 한다.
승용차는 88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순창 Toll gate에 내려 순창에서 유명한 "고추장 한옥마을" 잠시 돌려보고 나서 국도를 이용하여 담양으로 넘어가는데, 이 길은 한국에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제일 잘 가꾸어져 있는 길로써 차도 양옆 터널 같이 나무가 자라고 있어 Driver 묘미를 주는 길이다.
약 10분 간 달리면 담양읍 소재지가 나오는데, 담양군에는 대나무로 유명한 "죽녹원(竹綠苑)" 으로 먼저 들어가 본다.
< 담양이 자랑하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 >
1. 죽녹원 :
담양군에서 조성한 담양읍 향교리에 있는 죽림욕장 죽녹원은 관방제림과 영산강의 시원(始原)이 되는 담양천을 끼고 있는 향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보이는 대나무 숲이 죽녹원이다.
죽녹원 입구에서 돌계단 하나하나 밟고 오르며 입구에서 대인 1.000원이라는 입장료 징수하는데, 죽녹원 내부 대나무 길 걷는 시간은 약 1시간 소요된다고 매표원이 알려준다.
< "죽녹원" 으로 들어가는 돌계단 >
바로 대나무 숲에 들어가면서 굳어있던 몸을 풀고나면,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대나무 바람이 여행에 지쳐있는 심신에 청량감을 불어넣어 준다.
또한 댓잎의 사각거리는 소리 들으며 빽빽히 들어서 있는 대나무 숲길 걷노라면 푸른 댓잎을 통과해 쏟아지는 햇살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기분 또한 신선하다.
이 죽녹원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인사가 방문한 사진과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사진이 가는 곳마다 전시하여 놓아 걷기에 지루함을 달래준다.
< 죽녹원 내에서 촬영한 "영화 알림판" >
죽녹원 안에는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竹露茶)가 자생하고 있어, 죽림 욕을 즐기고 난 후 죽로차 한 잔으로 마음의 여유까지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 죽녹원 내부의 "산책길" 걸으면서 >
죽녹원 한바퀴 돌고 나오면 이내 시장기가 돌아 죽녹원 입구에 즐빈하게 들어서 있는 식당가 "대통밥 전문집" 으로 자연적으로 발길이 가는데, 1인분 10.000원 하는 별미의 대통밥 먹어보는 것도 이곳 지방의 특색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이어 승용차는 무등산 자락에 있는 "소쇄원(瀟灑園)" 에 들린다.
2. 소쇄원 :
소쇄원은 광주댐을 지나 무등산 내부로 깊숙히 들어가면 송강 정철 선생님 "가사관" 건물을 지나자 마자 바로 주차장인데, 이곳 주차장에도 주차비를 별도 징수하며 소쇄원 들어가는 입장료 2.000원도 별도 지불하여야 한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가 살던 곳인데, 그 당시 정송강(鄭松江) 등 시인, 문인들의 유람지로서, 사미인곡(思美人曲). 속사미인곡, 성산별곡 등 이곳을 배경으로 쓴 명시로서 국문학 사상 중요한 곳이다.
당시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80여 년 전에 중수하여 현재 건물이 남아있다.
1530년(중종 25) 조광조의 제자 소쇄 "양산보" 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건립한 원우(院宇), 전체 면적은 약 3만5천 평이며 이곳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정원이다.
대나무 숲길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오곡문, 애양단, 고암정사 등 10여 동의 건물을 만난다.
<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제월당" 건물 >
제월당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며 제월당 앞에 있는 광풍각은 건물 중앙에 1개 방이 있는데, 그 방 3방향으로 문이 위로 열리게 되어 있는 것과 그 뒤편 마루 밑에 불을 피우는 아궁이가 있는 것이 특색이며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 3개의 방향으로 문이 위로 열리게 하는 "광풍각" >
홍문관 대사헌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賜死)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는데, 이곳도 죽녹원과 같이 대나무 잎에서 품어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문객의 귀를 즐겁게 한다.
이어 승용차는 호남고속도로와 서해고속도로를 연이어 달려 고창 "선운사(禪雲寺)" 에 이른다.
3. 선운사:
옛날 대구에서 선운사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바로 연결되지 않아 그의 반 나절이 소요 되었으나, 이제는 고속도로가 바로 연결되므로 몇 시간 이내에 도달되어 여행 Schedule에 많은 여유를 가지게 한다.
몇일 전 영광 불갑사에서 본 꽃무릇의 매력에 빠져 선운사 꽃무릇도 구경할 겸 찾은 선운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선운사이다.
몇년 전 겨울 나는 등산을 통하여 선운산(일명 : 도솔산)을 종주한 경험이 있어 산의 묘미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선운사 내면의 Software 측면을 상세하게 알고 싶고, 나의 가족도 함께 관광도 할겸 다시 한번 더 찾는 길이다.
선운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면, 좌측 개울 건너편 암석에 붙어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악" 이 그 진귀한 자태를 나타낸다.
(1) 송악 :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다시 주권을 되찾기 직전 그 무엇보다 일본인들이 가져가고 싶었다는 기념물이 선운사의 송악이다.
이름 그대로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소나무이기 때문에 바위와 함께 가져가지 않는 한 가져갈 수 없었다는 선운사의 송악은 그냥 봤을 때는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볼수록 넋을 잃고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나무이다.
밑둥 부터 바위와 함께 15m 높이 까지 함께 자라고 있다니?
< 바위에 기생하고 있는 "송악" 전경 >
전번 등산 길에는 시간이 없어 개울 건너지 못하고 주차장 도로 옆에서 본 송악이지만, 이번에는 개울물을 건너 소나무 밑 까지 가서 바위에 붙어있는 소나무 보고, 또한 향기에 취하여 보니 이렇게 거대한 수림을 눈 앞에서 직접 대면하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 소나무 잎은 침엽수이기 때문에 바늘 같이 뽀죽하여야 하는데, 이곳 송악 잎은 활옆수와 같이 넓다.
송악은 덩굴나무로 원줄기에서 공기 뿌리(식물의 땅위 줄기 및 땅속에 있는 뿌리에서 나와 공기 가운데 노출되어 있는 뿌리)가 나와서 다른 물체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린 가지, 잎, 꽃에 털이 있으나 자라면서 없어진다고 한다.
잎은 어긋나고 윤기가 나는 녹색이며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어린 가지에 달린 잎은 3∼5개로 갈라지고 늙은 나무의 잎은 달걀 모양 또는 사각형이다.
꽃은 10∼11월에 양성화로 피고 녹색을 띤 노란색이면서 꽃이 피기 시작하면 많은 꽃이 달리며, 열매는 핵과(核果)로 둥글고 이듬해 봄에 검은색으로 익는다.
(2) 선운사 :
호남의 내금강이자 일명 "도솔산" 이라고 불리우는 선운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선운사" 는 김제의 금산사와 더불어 조계종의 전라북도 2대 본사로 우리나라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의 다툼이 치열했던 장소이며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 창건하였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 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데, 선운사의 대웅보전과 지장보살이 보물로 지정 되어질 정도로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
< 보물로 지정 된 선운사 "대웅보전" >
사찰 뒷편의 동백나무 자생지로서는 육지 북방 한계선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수령이 평균 500-600년이며 큰 것은 굵기가 지름 80cm가 넘으며 약 1,000그루 이상 군락을 형성하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84호를 지정되어 있다.
< 약 1,000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백나무" >
선운사 주위와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 주위에는 수 많은 꽃무릇이 자생하고 있는데, 9월 말 경 이곳의 방문은 다소 늦음으로 인하여 만개가 넘어 붉은색이 다소 흐려지고 있어 꽃의 생동감이 떨어지고 있다.
< 만개가 조금 자나가고 있는 "꽃무릇" >
이번은 산행이 주 목적이 아니므로 선운산 입구에 있는 등산길을 선택하지 않고, 계곡 따라 만들어진 오솔길 따라 1시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크다란 소나무 한 그릇 장사송에 도달한다.
(3) 장사송 :
천연기념물 제354호로 지정되었으며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로 차지하는 면적이 495㎡이며, 나무의 높이 23m, 가슴높이 둘레 3m, 가지퍼짐 17m, 지상 2m 높이에서 줄기가 크게 2개의 갈래로 갈라지고, 그 위에서 다시 8개 갈래로 갈라진다.
< "장사송" 의 위용 : 뒷편 바위에 진흥굴 입구가 됨 >
가지의 밑 줄기 높이가 높아서 소나무 같으나, 지상 40cm 정도에서 가지가 난 흔적이 있어 "반송" 으로 취급한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진흥굴 바로 앞에 서 있고 가지가 고루 퍼져서 달걀 모양을 하고 있어 수형이 아름답고, 8개 가지는 한국의 8도를 가리킨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이 기거하였다는 진흥굴 입구에 서 있어 일명 "진흥송" 이라고도 하는데, 그 전설을 안내문에 새겨 놓았다.
안내문 내용은 진흥왕이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선운사 건립 배경에서 이야기 했듯이 선운사 건립과 동시에 노후 부인과 딸, 함께 이곳 진흥굴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이 적혀 있으나, 신라의 왕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신빈성이 낮아 읽는 것으로 만족하여야만 할 것 같다.
장사송을 뒤로하고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마애불과 도솔암에 도달한다.
(4) 마애불 :
고려시대에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 가장 큰 마애불상 중 하나이며, 미륵불로 추정된다.
지상 6m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는 5m에 폭이 3m가 되며, 연꽃무늬로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대 까지 갖추고 있다.
머리 위의 구멍은 동불암이라는 누각의 기둥을 세웠던 곳이며, 명치 끝에는 검단스님이 쓴 비결록을 넣었다는 감실이 있다.
조선 말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보다" 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하며 이 비결록은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 이 가져 갔다고 한다.
< 노송 나무가지 하나가 "마애불" 가까이 부채 역활을 하고 있는 모습 >
마애불 왼쪽에는 수백년의 풍상을 꺽어면서 다 죽어가는 노송나무의 가지 하나가 부채 모양을 하면서 마애불 몸 가까이 까지 가서 서 있는데, 한 여름에 마애불 몸에 더위를 시켜주기 위하여 바람을 부쳐주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참 애처롭다.
(5) 도솔암 금동보살 좌상 :
이곳 마애불 뒷편 큰 암벽 사이에 "도솔암" 극락보전이 있으면서 이 암자 내에 보물 제279호 "금동보살" 을 모시고 있는데, 보살의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피모지장 보살이다.
< 극락보전과 두건을 쓰고 있는 "금동불상" >
피모지장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것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처음 등장하여 고려에 전해져 크게 유행한 독특한 "지장보살" 상이다.
특히 고려시대 불화에서 많이 보이는데 이는 경전이나 불교사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고, 당시 중앙 아시아나 고려의 승려가 일상 생활 혹은 특별한 예배 의식에서 두건을 착용하게 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피모지장이며, 이 독특한 두상은 고려시대에 특히 선호하여 조선 10세기 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6) 낙조대와 용문굴 :
도솔암 앞에는 선운산 풍경의 극치가 되는 거대한 바위 "천마봉" 절벽을 형성하고 있어, 선운산 등산길의 하일라이트가 된다.
< 거대한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천마봉" 위용 >
대부분 마애불 앞에 있는 직벽 계단을 타고 올라가 절벽 위 천마봉에 올라가면 선운산과 선운사 계곡의 풍광을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에서 능선 따라 오른쪽 방향으로 조금만 나아가면 "낙조대" 바위에 이른다.
이 낙조대에 서면 서해의 구시포 항구의 앞 바다에 떨어지는 낙조를 보는데 최고의 지점이라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 서해 낙조를 보는 최상의 장소 "낙조대" >
한국 드라마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마지막 낙조를 보면서 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면 이곳에서 촬영한 이유가 짐작이 되겠지...
오른쪽으로 조금 더 하산을 하면 장금이 엄마의 무덤이 있는 "용문굴" 이 나오는데, 이곳 동굴도 매우 아름다운 모양의 형상하고 있어 참 좋은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
< 거대한 "용문굴" 앞에서 >
< 용문굴 내부에 있는 장금이 엄마 "돌 무덤" >
하산 길은 올라왔던 오솔길 반대편 차도를 이용하여 울창한 숲길 따라 걸으면, 숲 사이 나무 밑에 자라고 있는 꽃무릇에 정신을 놓고서 내려오면 시간의 흐름이 망각 된다.
< 아름답게 핀 선운사 "꽃무릇" 전경 >
사찰 입구 쯤 내려오면 넓은 차밭이 나오는데, 이곳 차밭도 대장금의 드라마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상으로 선운산과 선운사의 관광을 겸한 간단한 등산을 끝내고 하루밤 유숙을 위하여 고창읍 내에 들려 시설이 제일 잘되어 있다는 "황토찜질방" 에 여정을 풀고 나서, "고창읍성(高敞邑城)" 을 구경하기로 한다.
4. 고창읍성 :
고창군청 소재지 앞에 있는 고창읍성의 화려한 조명으로 유혹하고 있어 읍성의 야경에 빠져 보는데, 밤에는 읍성 내부 일부분만 걸어보니 시설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산보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읍성의 조명은 11시 까지 밝히고, 그 이후에는 소등이 되므로 시간을 감안하여 에둘러 나와야 한다.
<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하고 있는 "고창읍성" 야경 >
다음날 아침 일찍 운동도 겸하여 읍성에 다시 도착하여 안개낀 성곽 한바퀴 걸어보니 기분이 매우 상쾌하여 지는데,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둘레 1,684m에 높이 4~6m, 면적 16만 6.000㎡이며, 동·서·북의 3곳의 문과 치 6곳, 옹성, 수구문 2곳 등이 남아있는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고 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 고창읍성의 둘레길과 동문 "등양루" 전경 >
읍성 내부에는 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어 버렸고 현재 북문 공북루, 서문 진서루, 동문 등양루와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작청, 동헌, 객사, 풍화루, 내아, 관청, 향청, 서청, 장청, 옥사 등 일부만 복원되어 있고, 건물 마다 밀랍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업무를 보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여 노았다.
이러한 건물 주변으로 사람이 도착하면 스피카의 센셔가 작동하므로 자동으로 안내 방송이 흘려나와 건물의 역사 등을 간결하게 설명하며 읍성 용도에 대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 고창읍성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넓은 "관아" 터 >
다시 다음 목적지 가기 위하여 고속도로를 통하여 북으로 달려, 곰소항에 도착한다.
곰소항은 우리나라에서 바다의 염도가 제일 높아 천일 소금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여 약간의 소금을 구입하고 나서, 국립공원변산반도 내에 있는 "내소사(來蘇寺)" 에 들린다.
5. 내소사 :
"내소사" 를 들어가는 입구 전나무 길은 산림청 지정 "100대 걷고 싶은 길" 로 포함되어 있어, 참 아름다운 길로 만들어져 있다.
< "내소사" 로 들어가는 전나무 길 >
그 길 입구에는 800년이나 되는 할아버지 당산나무(느티나무)가 씩씩하게 자라고 있고, 사찰 내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또 다시 1.000년이나 되는 할머니 당산나무가 세월의 무게에 못 견디면서 힘겹게 서 있다.
< 1.000년이나 되는 할머니 "당산나무" >
내소사 본당은 단청을 칠하지 않아 더욱더 고찰의 느낌을 받아 문화적인 가치를 더하여 주는데,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이유는 내소사의 창건 전설로 내려오고 있는 내용이 너무나 유명하여 다 알고 있으리라.
내소사는 신라 선덕여왕 2년(633)에 혜구대사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 였다고 한다.
< 단층을 칠하지 않고 있는 "내소사" 전경 >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는 중심 법당이 되는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1년(1633년) 청민(靑旻)이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으로 규모는 앞면 3칸에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 하였고, 보의 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건물로 화사함을 더하여 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지붕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우물 천장으로 꾸며져 있고,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 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의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사찰 뒤편의 크다란 암석으로 이루어져 진 내소산 "관음봉" 이 내소사를 품고 있다.
한때 국립공원변산반도 내에 있는 산을 종주하여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남여치" 고개에서 월명암을 거쳐 직소폭포를 보고 나서 관음봉에 올라 갔다가 내소사로 내려오는 5시간의 종주코스 등산을 가진 경험이 있었다.
이곳 등산 길은 걷기에 참 아름다운 길이고, 관음봉에서 내소사와 곰소항 앞 바다를 본 풍광이 아련하게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또 다시 해안길 따라 "채석강" 에 간다.
6. 채석강 :
이곳 채석강과 변산해수욕장은 1977년도 경 경북 안강에 있는 모회사에서 근무 할 때, 입사 동기생 한명의 집이 이곳이라 그 때 그와 함께 한번 방문한 경험이 있어 추억이 새롭다.
< 책을 쌓은 듯 "채석강" 바위 모습 >
채석강이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노닐다가 물에 비친 달빚에 반하여 그 달을 잡을려고 물에 뛰어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수만권의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듯 신비감을 더하여 준다.
< 가족과 함께 "채석강" 을 배경으로 >
30여 년 전 채석강 주변에는 꾸밈도 없이 자연 그대로 모습인 것 같은데, 이제는 너무나 환경의 변화로 옛 모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지만 그래도 크게 변화지 않은 바다와 섬 풍경에 젖어 보면서 새로운 추억을 간직하고 인접하게 있는 "변산해수욕장" 을 잠시 들어가 모래 사장을 걸어본다.
넓은 바다 모래사장과 우측 언덕 위에 있는 삼양사 연수원 건물은 아직도 철거되지 않고 그 때 그대로 자리잡고 있지만, 연수원 주위의 나무가 많이 자라 "삼양사 연수원" 글씨가 나무 사이로 빠꼼히 보인다.
아직도 변화지 않은 글씨도 그대로 둔 것은 그렇게도 돈이 많은 재벌 그룹에서 가공하지 않고 옛 것을 보관하는 모습이 지나가는 나그네 추억과 향수를 불려 일으켜 마음이 쨍하게 만든다.
인접하여 "새만금 방조제" 전시관에 들린다.
7. 새만금 방조제 :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군산시 비응도 및 신시도 까지 바다를 메워 397K㎡(약 1억2천만 평)의 국토를 확장하는 사업으로 방조제의 길이가 33Km로 세계 최장의 길이다.
< "새만금 방조제" 에서 본 변산반도 모습 >
노태우 대통령 정권 때 시작 하였으나 중간에 개발 방향의 모호한 변경으로 지지부지한 사업을 현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토목 대통령이라는 이명박의 지시로 새롭게 부각되는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너무나 거대한 토목사업이 된다.
2011년 까지 외부시설과 내부개발이 끝나면 고군산 국제해양 관광단지개발 및 비응도 관광, 어항 개발 등과 연계되어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부각이 될 것이다.
전시관 1층에는 방조제 내. 외부의 각종 생태계 변화 모습을 짜임세 있게 정리되어 있으며 한쪽에는 이들 내용을 요약한 영화가 10여 분 간 방영하여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 주는데, 그 내용을 보고 있으니 혀가 내 둘린다.
< 방조제의 거대한 "종합 계획도" 를 보면서 >
2층에 올라가면 넓은 군산 내항과 더불어 고군산도와 연결된 방조제 길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도록 하여 놓았는데,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여 방조제 위로 달려 보는데, 방조제의 첫 섬이 되는 가력도 까지 약 4.5km 만 먼저 개통이 되어 관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가력도 섬에는 전망대가 완성되어 내년 2010년 1월 1일 Open식을 맞추어 전면 차량이 통과가 가능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고, 한쪽 끝에는 크다란 배수 갑문의 철구조물이 시운전을 하면서 기계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있어 정말 거대한 철구조물이다.
< 가력도 섬에 설치하고 있는 "배수 갑문" 의 철구조물 >
아마 Open식이 열리고 나면 제일 먼저 시원하게 건설된 33Km 방조제 위로 힘차게 한번 달려 군산 까지 왕복하리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전주시내에 있는 "한옥마을" 에 들어가 본다.
8. 전주 한옥마을 :
한옥마을 전체를 관광 하기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 되므로 한옥촌 중앙에 위치한 "태조로(太祖路)" 의 오목대에서 전동성당 까지 걸어본다.
오목대는 조그마한 야산의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서 태조 이성계가 연회를 열었던 장소인데, 전주 시내와 한옥마을이 한 눈에 둘어온다.
태조로 좌우에 지여진 한옥촌을 통과하면서 한옥을 알리는 "전주 명품관과 공예품 전시관" 에 들어가 보는데, 이곳 한옥의 역사와 조상의 지혜, 전통 음식을 만드는 과정 및 시음을 통하여 옛 풍속에 젖어본다.
이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 창건한 "경기전" 에 들린다.
경기전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홍살문이 마중하고, 왼쪽에는 수십 채의 한옥을 지어놓아 한옥의 모양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 경기전 내부에 있는 "한옥집" 모습 >
넓은 공원 중앙에 "경기전" 사당이 있다.
사당의 중앙 건물 내부에는 태조 "이성계(李成桂)" 왕의 영정과 왕이 타고 다녔든 어가 등이 진열하여 놓고 있고, 건물 좌우 별체에는 조선시대에 다소 이름이 있는 세종, 영조, 정조 등 6분의 어진이 동시에 모셔져 있다.
< 태조 "이성계" 왕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건물 >
오른쪽 옆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소실되지 않고, 많은 사고 중에 유일하게 건제하였다는 "전주사고(全州史庫)" 를 모방한 2층 건물이 외롭게 서 있다.
관람객의 관심 부족 현상인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튼튼한 자물쇠가 잠겨 있어 발길을 돌리게 하여, 실망이 크다.
덕유산 옆에 있는 적상산 상부 댐 인근에 있는 "무주사고" 에는 무주군 지자체에서 2개의 건물을 건립하여 놓고, 사고의 내용을 일목요약하게 진열 해놓고 있으면서 문화 해설사가 상주하면서 잘 설명하여 주던데....
< 2층으로 된 "전주사고" 건물 >
전주사고를 돌아 맨 뒷편 구석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의 시조 "이한" 과 시조비가 되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으나, 내부에 사람이 기거하고 있어 이곳도 문이 굳게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하여 아쉽다.
이성계는 전주이씨의 21대 후손이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사당 주위에는 숲이 울창하게 잘 가꾸어져 있고, 그 숲속 곳곳에 휴식처를 만들어 놓고 있어 많은 관광객과 노인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경기전 정문을 나서면 도로 건너편에 있는 전주에서 제일 오래된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 의 우아한 모습이 관광객의 호기심을 유발하여 발걸음을 옮겨본다.
9. 전동성당 :
1908년도 프랑스 신부님이 건립한 "전동성당" 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하여 건립된 건물이므로, 대구의 계산성당 보다 훨신 더 아름다운 것 같으며 내부에는 많은 신도들이 머리에 하얀수건을 쓰고 기도 드리는 모습이 참 평화롭게 보인다.
< 전주 "전동성당" 의 전경 >
귀가 시간의 지연으로 좀 서둘러 전수시내를 빠져 나와 전주-진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마이산 휴게소에 들려 간단하게 간식을 구입하여 먹기로 하는데, 휴게소 전망대에서 마이산을 관광하며 매우 아름다운 신비감을 주고 있으나 휴게소의 간식 비용이 다른 휴게소 보다 약 10% 이상이나 비싼 것 같다.
< 휴게소에서 본 "마이산" >
다시는 이곳 휴게소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살아지므로, 에둘로 귀가 길을 재촉하여 매우 늦게 집에 도착하는 전라도 지역 여행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