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있는 "운문사" 와 더불어 한국 5대 기도성지 "사리암" 을 찾아서.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오전 경산에 있는 경산시립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청도군 운문면의 천년고찰 "운문사(雲門寺)" 를 관람하기 위하여 경산시 용성면과 청도군 운문면의 경계점에 있는 고개 마루에 도착하여 진다.
고개 마루에서 바라보는 운문댐과 주변 산의 풍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비록 댐 안에 많은 물이 빠졌지만 그래도 파란색의 물과 하얀색 눈으로 치장하고 있는 산맥과 더불어 또 다시 흰 구름을 품고 있는 파란색으로 채색(彩色)하는 하늘이 마치 한폭의 동양화 그림 속으로 머물고 있다.
< 댐과 산 및 하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운문댐" 전경 >
겨울이라서 그런지 한적한 댐 가장자리로 만들어진 도로 따라 조금 하부로 내려가다가 댐의 뚝방 아래 방향에 있는 다리를 건너 다시 댐 상부로 한참 올라가면, 운문사 경내 앞에 있는 먹거리촌에 오후 12시 30분 경에 도착 되어진다.
< "운문댐" 을 알리는 입석 >
< 겨울철 물이 많이 빠진 "운문댐" >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속담과 같이 한 식당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시작하는 매표소 앞에 도착하여 인당 2.000원의 입장료와 1.000원의 주차료를 지불하고 사찰 방향으로 운전하여 올라가면, 도로 가장자리 따라 새롭게 트레킹 길을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 운문댐 먹거리촌 식당 뒤편에 있는 "산과 눈" >
< 매표소에서 운문사로 들어가는 "소나무 숲" 길 >
오늘 관광 일정은 "사리암(邪離庵)" 을 먼저 관람하고 나서 내려오는 길에 운문사로 들어가 구경하는 방향으로 결정하므로 계속적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이어지는 도로 따라 운전하여 계곡 깊숙하게 들어가는데, 도로변으로 만들어진 트레킹 길에는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한 10여 분 정도 운전하여 사리암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니, 너무나 많은 차량들이 주차하고 있어 거목의 2그루 소나무 아래 겨우 빈 틈을 찾아 주차하고 나서 사리암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 사리암 주차장을 지키는 "소나무" 와 만차의 주차장 >
< "사리암" 으로 올라가는 세멘트 길 >
사리암 관람은 기억의 저편에 있는 까마득한 옛날에 한번 방문한 경험이 있었지만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모든 풍경이 새로운 운치로 전개 되어지는데, 특히 해발 1241m 가지산 방향에 있는 산맥과 사라암 뒤편의 산 정점으로 하얀 눈으로 채색하고 있으며 산맥의 하부 방향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도 한폭의 선경(仙景)으로 머물고 있다.
< 사리암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가지산" 설경 >
< 사리암 뒤편에 있는 "능선" 에도 하안색 눈 >
다소 아쉬운 점은 사라암으로 올라가는 초입 길에서 부터 중간 지점까지 세멘트 포장 길로 되어있어 걷기가 다소 불편하지만 그래도 중간 지점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올라가는 길은 1.008개 돌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계단 개수를 머리로 Counting 하면서 올라가는데, 반대로 무척 많은 에너지를 요구되어 진다.
< 내 같이 늙은이를 위한 준비하고 있는 "나무 지팡이" >
이 1.008개의 계단은 대부분 납작한 자연석으로 깔려져 있는데, 신도들이 전일 내린 눈을 어느 정도 치웠지만 그래도 자연석 사이에 아직도 많은 눈이 붙어있어 매우 미끄러운 길이 되어진다.
< 아직도 많은 눈이 쌓여있는 "자연석 계단" >
더구나 불공을 드리고 나서 하산하는 많은 여자 신도들로 인하여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길을 양보하다 보니, 올라가는 몇 명의 사람은 많이 기다림을 가지는 계단길이 되어진다.
< 많은 사람들이 하산하는 "계단길" >
사찰에서 제공하여 주는 나무 지팡이를 최대한 이용하고 발에 힘을 주면서 고불 고불한 낭터리지 옆으로 만들어진 계단길로 한참 올라가면, 암자 가까운 지점에서 부터 세멘트 계단으로 이루어지면서 낭떠리지 방향에는 안전 난간대가 설치되어있어 다소 수월하게 올라 갈 수 있다.
< 안전 난간대가 없는 "세멘트 계단길" >
수 십번의 휴식을 가지면서 한참 올라가면 오후 2시 경 계곡의 골짜기에 기대면서 건축되어진 사리암 입구에 도착하여 지는데, 그 때가 예불 시간이라서 그런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잔잔한 염불소리가 산 속으로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 마지막으로 "안전 난간대" 가 있는 세멘트 계단길 >
사리암 앞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서 암자 앞으로 연결 되는 계단을 통하여 위로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불자들의 수행공간으로 사용하는 불사전 건물과 왼편으로 신도들이 머물 수 있는 요사채 건물에 붙어서 건축되어 있다.
< 왼편 요사채와 오른편 불사전이 연결되어 지어진 "사리암" >
오른편 불사전 건물 1층에는 여기까지 올라오는 모든 불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주는 공양간으로 활용하고 2층과 3층에는 기도를 드리는 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왼편 요사채 건물 1층에는 창고 2층에는 기도를 접수하는 접수처와 더불어 불공을 드리는데 필요한 물건을 판매하는 편의점 3층에는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 "요사채" 건물 2층 앞에 있는 장독대 모습 >
이곳 사리암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공간이 너무나 협소하여 층층의 언덕을 이용하여 건물이 자리잡고 있어 다시 최후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사리암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과 더불어 동일 선상으로 자인실(慈忍室)과 더불어 "관음전(觀音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암벽 아래 동일 선상으로 건립되어진 "안내문과 자인실 및 관음전" >
< 관음전 처마에 있는 "고드름" >
사리암은 고려 초기 930년 고승 "보량국사" 가 초창하였으며 조선 헌종 11년(1845년)에 정암당 "효원대사" 가 중건하였고, 1924년도 새롭게 증축하고 나서 1985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관음전 앞에 있는 조그마한 마당이 왼편 요사채 건물의 옥상이 되고, 또한 이 옥상 마당을 통과하여 관음전 오른편 방향으로 돌아가면 바위 난간에 "나반존자(那畔尊者)" 를 모시고 있는 "천태각(天台閣)" 이라는 작은 불당 건물을 만나고 그 불당 옆으로 거대한 바위동굴이 자리하고 있다.
< 관음전 오른편 절벽에 기대고 있는 "천태각" 건물 >
< 천태각 내에 모시고 있는 "나반존자" >
< 사리암의 중심 건물 "관음전" >
이 바위동굴에는 운문사 사굴 중에 하나로 옛날에는 이곳에서 한사람이 살면 한사람 분의 쌀이 나오고 두사람이 살면 두사람 분의 쌀이 나오고 열사람이 살면 열사람 분의 쌀이 나왔는데, 하루는 더 많은 쌀이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욕심을 부려 구멍의 크기를 넓힌 후 부터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동굴이다.
특히 관음전 내부에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별도의 불단이 없고 건물 오른편으로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천태각을 바라 볼 수 있는 통 유리로 되어 있는데, 마침 기도 드리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관음전 내부와 마당 및 동굴 내부에는 인산인해의 불자들이 나반존자 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경건하여 불자가 아닌 나도 그들과 함께 묵념의 고개를 숙여 본다.
< 관음전으로 들어간 신도들의 "신발" 모습 >
< 관음전 앞 옥상 "마당" 에서도 염불을 외우고 있는 불자 >
< 쌀이 나왔다는 "바위동굴" 내에서 기도하는 불자 >
우리나라에서 기도발이 제일 잘 받고 있는 불교성지로는 강릉 낙산사의 홍련암, 강화도 낙가산에 있는 보문사, 대구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 남해 금산에 있는 보리암과 더불어 이곳 운문사 사리암이 한국 5대 기도성지로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정말 많은 불자들이 찾고 있는 암자이다.
반면에 이곳 사리암에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용화산 도솔천에 머물고 계시는 미륵불이 56억 7천만년 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내려올 때 까지, 현세(現世)의 중생을 보살피고 있으라는 유언을 수행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제자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암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반존자는 인도나 중국에는 없는 한국 불교 고유의 신앙 대상으로 말세의 복전(福田)이라 하여 신앙하는 아라한, 즉 홀로 도(道)를 이루었다고 하여 "독성(獨聖)" 이라고도 불려진다고 한다.
어찌하던 나반존자가 석가모니 제자이거나 말거나 홀로 도를 이룬 독성이든지 말든지, 내가 원하는 길과 나의 소원을 이루어 지도록 마음의 위안을 내려 주신다면 천번이고 만번이고 이곳으로 올라와 기도를 올리면서, 나의 노후 삶에 대하여 영생(永生)하기를 기원하여 보겠는데....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천태각 뒤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작은 건물 "산신각(山神閣)" 이 건립되어 있는데, 계단을 통하여 산신각 앞으로 올라가니 여기에도 좁은 공간으로 단지 몇 명의 사람이 불공을 드리고 있어 나는 기원도 드리지 못하고 그냥 내려온다.
< 천태각 뒤편에 있는 "산신각" >
요사채 마루에서 장시간 머물면서 불자들이 소리치고 있는 나반존자라는 4개의 단어를 그들과 같이 반복하다가 운문사를 방문하기 위한 시간적인 촉박으로 1.008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는데, 그 동안 포근한 날씨로 많은 눈이 녹아지면서 계단길에는 미끄러움이 살아져 안전하게 하산이 가능하여 진다.
< "요사채 마루" 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와 승용차를 몰고 운문사로 내려가는데, 올라올 때 도로에 다소의 눈이 있었지만 그 사이 여기에서도 많은 눈이 녹으므로 안전하게 운문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진다.
< 운문사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고목나무" >
운문사는 몇 번이나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찰로 대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의 말사인데,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초창되어 처음에는 "대작갑사(大鵲岬寺)" 라 하였으며 제1차 중수는 진평왕 때 원광국사가 제2차는 신라 말 보량국사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서기 937년 고려 태조왕이 많은 전지(田地)를 내리고 운문선사(雲門禪師)라는 사액을 내리면서 "운문사(雲門寺)" 라고 불려졌다고 하며, 고려 숙종 때 원응국사가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고려 고종 때 일연스님이 주지로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1958년에 비구니 전문 선원을 개설한 이래 한국의 대표적인 승가대학으로 승격 되었는데, 경내에 7개의 보물급 문화재와 더불어 1개의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고 있는 가람이다.
운문사는 일반적인 사찰에 있는 일주문이나 사천왕문 등 복잡한 문이 없고, "호거산운문사(虎踞山雲門寺)" 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2층의 범종각 건물 밑으로 들어서면 이내 경내 마당에 이른다.
< 운문사로 들어가는 "범종각" 건물 >
이 범종각 건물 앞으로 중앙 통로가 만들어져 있으며 중앙 통로를 기준으로 운문사가 2개의 영역으로 구획되어 지는데, 오른편 방향으로 일반 신도와 함께 불경을 올리는 사찰영역이 되고 왼편으로는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 건물과 더불어 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는 수행공간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오른편 입구 처음 만나는 건물이 각종 기념품과 더불어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500여 년의 수령을 가진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소나무" 가 운문사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 운문사 입구 오른편에 있는 "기념품 및 서적" 판매소 >
< 진열하고 있는 "기념품" >
< 판매하고 있는 "서적" >
처진소나무는 운문사에서 거주하는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서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나무의 높이가 6m 가슴 둘레가 3.5m 이며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점이 일반 소나무와 차별화가 발생되고 있다.
< 운문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처진소나무" >
특히 이 처진소나무에는 매년 봄에 막걸리 10말을 물에 타서 뿌리 가장자리에 뿌려 주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의 크기로 둥굴 모양을 하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소나무라 하겠다.
<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 >
이 소나무를 통과하면 "만세루(萬歲樓)" 라고 불려지는 거대한 루각 건물을 만나는데, 건물 마루는 사찰에서 열리는 법회나 공연을 전문적으로 열리는 장소로써 활용하고 있으며 건물 한 측면에 공연 무대와 더불어 양쪽 모서리에 아담한 범종과 북이 설치되어 있다.
< 법회 및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세루" >
< 만세루 마루 구석에 있는 "범종" >
이 만세루 뒤편으로 넓은 마당이 나타나면서 이 마당을 중심으로 운문사의 본찰의 건물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자리잡고 있는데, 대웅보전 오른편에는 응진전(應眞殿)과 조영당이라는 현편으로 같이 붙어있는 한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운문사의 본찰 "대웅보전" >
< 대옹보전 내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 >
< 대웅보전 오른편에 있는 "응진전 및 조영당" >
마당 왼편으로는 고옥의 "전향각(篆香閣)" 이라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지만 문이 굳게 닿혀 있으며, 그 앞으로 감로수가 흘려내리는 우물과 더불어 부처님의 교법(敎法)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항상 돌아가면서 전달하여야 한다는 "법륜상(法輪相)" 조각품이 자리하고 있다.
< 대웅보전 왼편에 있는 "전향각" >
< 전향각 앞에 있는 "법륜상" >
이 법륜상 왼편으로 또 다른 보물 제835호 "대웅보전" 건물을 만나는데, 이 대웅보전 건물은 운문사의 본찰의 건물 대웅보전 보다 규모 면에서 매우 작은 건물이지만 건립 시기가 훨신 오래 되어진 문화재 급 건축물이라고 한다.
< 보물 제835호 "비로전" 건물 >
이 건물 내부에는 비로자노불을 모시고 있어 건물 명칭이 별도로 "비로전(毘盧殿)" 이라고 하지만, 운문사 본찰의 건물이 되는 새로운 대웅보전을 건축하면서 비로전이라는 명판으로 교체 하여야 하나 옛 이름 그대로의 명판 대웅보전을 사용하고 있어 관람들에게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
< 비로전 내에 모시고 있는 "비로자나물" >
비로전 건물 앞에 보물 제193호 "석등(石燈)" 과 더불어 제678호 "삼층석탑(三層石塔)" 2기가 나란하게 서 있는데, 석탑의 높이가 5.4m 인 쌍탑으로 9세기 통일 신라시대에 축조 되었으며 상층 기단부에는 앉아 있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개의 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이 뚜렸하게 만들어져 있는 탑이다.
< 비로전 앞에 있는 보물 제678호 "삼층석탑" >
이어 비로전 건물 왼편으로 "오백전(五百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중앙에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 오백나한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면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정겨움이 묻어난다.
< 비로전 왼편에 있는 "오백전" 건물 >
< 오백전 건물 내에 있는 "부처님과 오백나한" 모습 >
오백전 건물 뒤편으로 넓은 공터와 더불어 사찰의 담장으로 구획하므로 뒤돌아서 나오면 비로전 앞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과 사찰영역으로 소통하는 작은 쪽문 불이문(不二門)이 있지만, 이곳으로 출입이 금지된다는 안내문 붙어있다.
< 수행공간과 사찰영역을 구획하는 "불이문" >
불이문 바로 뒤편이며 만세루 앞으로 "작압(鵲鴨)"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정면 1칸 및 측면 1칸의 작은 '작압전" 건물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 중앙에 보물 제317호 "석가여래좌상(石迦如來坐象)" 을 모시고 있으나 좌상의 모양 자체가 나약하고 위축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형식화가 많이 진전되어진 점으로 보여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어 진다고 한다.
< 운문사에 제일 작은 건물 "작압전" >
< 작압전 내에 있는 보물 제317호 "석가여래좌상" >
또한 석가여래좌상 좌우에 보물 제318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를 모시고 있는데, 4기의 사천왕상 돌 기둥은 반대로 신체가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가냘픈 체구와 더불어 부드러운 인상 및 갑옷의 굵은 띠 주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 작압전 내에 있는 보물 제318호 "사천왕석주" >
작압전 건물 옆에 "관음전(觀音殿)" 건물과 "명부전(冥府殿)" 건물이 나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명부전 앞으로 칠성각(七星閣) 건물과 더불어 또 다시 승가대학과 요사채로 왕래할 수 있는 넓은 문이 있지만, 이곳에서도 발길을 돌려 주시면 좋겠다는 안내문 따라 돌아서면 칠성각 건너편으로 3개의 비각 건물이 나란하게 서 있다.
< 작압전 오른편에 있는 "관음전" >
< 관음전 오른편에 있는 "명부전" >
< 명부전 앞에 있는 "칠성각" >
< 칠성각 앞 "승가대학과 요사채" 로 들어가는 문 >
중앙 비각 건물 내에는 보물 제316호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가 서 있는데, 원응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써 운문사 중창과 더불어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석이라고 한다.
< 칠성각 건너편에 있는 보물 제316호 "원응국사비" 비각 건물 >
고려 인종 22년(1144년)에 원응국사가 93세로 입적하자 인종은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우게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비석이 3개로 파손되어 있는 것을 비편을 상호 조합 연결하여 관리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운문사의 사찰영역이 되어지는데, 오늘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관람을 끝내고 다시 범종각 건물 밖으로 나오니 운문사 5개의 암자 중에 하나인 해발 659m 지룡산 암벽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북대암" 이 새집과 같이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고 있다.
< 운문사 마당에서 바라보는 "북대암" >
언제 저 곳으로 올라가 반대로 운문사 전경을 내려다 보면서 구경하여 보리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길게 이어지는 운문사 돌담 길 따라 주차장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데, 아직도 많은 관광객과 더불어 한무리의 사진 작가들이 단체로 사진을 찍기 위하여 운문사를 찾고 있다.
< 운문사를 떠나는 "돌담 길" >
나도 언젠가 다시 운문사를 찾아와서 트레킹 풀 코스를 걸어보면서 힐링(Healing)하여 보겠다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오후 4시 경 운문사 경내를 떠나 집으로 향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