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전라도)

2박3일 동안 경북대학교 기계과 동문과 함께 "전라도 지역" 에 있는 관광지를 돌아보며.(4)

용암2000 2016. 7. 17. 20:41

3. 셋째날.(7월 3일 : 일요일)

 

1). 지리산 구룡계곡을 찾아서.

다소 일찍 일어난 동문은 모텔 앞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콩나물 국밥으로 해장을 하고 마지막 3일차 여행의 길을 떠나기로 하는데, 계절마다 남원 주민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구룡계곡(九龍溪谷)" 으로 발길을 잡아본다.

이곳 구룡계곡 초입에는 남원의 대표적 인물이 되는 "성춘향(成春香)" 이의 묘소(墓所)와 더불어 육모정이 함께 하는데, 여름철이면 육모정 앞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피서객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다.

아울러 구룡계곡은 지리산에서 유명한 뱀사골계곡 및 칠성계곡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계곡으로써, 상부 구룡폭포에서 부터 하류 육모정 까지 약 6Km 정도의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계곡에는 다양한 폭포와 더불어 소(沼), 담(潭), 기암괴석의 암릉들이 펼쳐지므로, 계곡 트레킹을 하기 위하여 많은 산행인들이 찾아드는 곳이라 하겠다.

나도 이곳의 명성에 이끌려 2012년 8월 11일 대구에 있는 모 산악회에서 백두대간 일부구간이 되는 고기리에서 노치마을 지나 덕운봉으로 올라갔다.

덕운봉에서 백두대간 길과의 반대 방향이 되는 구룡계곡 방향으로 하산하였는데, 구룡계곡 트레킹 산행에 동참하므로 계곡의 미(美)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장소가 된다.

남원시가지에서 19번 국도 및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주천면사무소에서 왼편으로 꺽어 지리산 정령치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맑은 물이 흘려내리는 계곡을 만나는데, 이곳 계곡의 초입에 육모정과 더불어 성춘향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 구룡계곡 초입에 있는 "육모정" >

 

아침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내리는 장마비로 인하여 텅빈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육모정을 구경하여 보는데, 육모정은 용소(龍沼)에서 9 마리의 용이 노닐던 곳이라 하여 용호동(龍湖洞)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약 400여년 전 이 지역의 선비들이 용소 앞 넓은 바위 위에 6각형의 정자를 지었는데, 그 이름을 "육모정(六茅亭)"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변바위 위에 있었던 육모정은 1960년 대 큰 홍수로 소실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복원 하였는데, 육모정으로 올라가 주변 풍경을 감상하여 본다.

계곡 방향으로는 여름철 피서객들이 혹환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넓은 바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반대 방향으로 바라보면 높은 계단 위에 춘향이 묘소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 "춘향묘" 를 알리고 있는 입석 >

 

< 높은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춘향묘" >

 

계곡으로 내려가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다리 위쪽 방향에서 거세게 내려오는 물과 더불어 용이 살았다는 용소를 구경하여 보는데, 용소 위로 안전을 위하여 철망으로 덮고 있어 아름다운 용소의 풍경을 억망으로 만들고 있다.

 

< 철망을 덮고 있는 용소 위에 자리하고 있는 "나무다리"  >

 

< 많은 물이 거세게 내려오고 있는 나무다리 상부 "구룡계곡" >

 

다시 승용차를 운전하여 지리산으로 넘어가는데, 올라가는 길이 너무나 급커브와 경사를 이루면서도 지리산의 울창한 산세와 더불어 계곡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구룡계곡의 하일라이트가 되는 구룡폭포를 알리는 상부 주차장에 도착한다.

 

< 구룡폭포 상부 주차장에 있는 "구룡계곡 트레킹 길" 조감도 >

 

상부 주차장에서는 구룡폭포의 사진과 더불어 폭포까지 산행 거리가 400m 이라는 이정표가 붙어있지만, 대부분 산행길은 급경사 내리막길이 되므로 아침 부터 구룡폭포 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 올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 동문들만 내려보내고 혼자 승용차를 지키기로 한다.

 

< 상부 주차장에서 "구룡폭포" 까지의 거리 및 설명서 >

 

주차장 주변을 배회하고 있으니 멀리 전라도 광주광역시에서 계곡 트레킹을 위하여 한대의 버스가 도착하는데, 트레킹 사람들은 다양한 년령과 더불어 남녀노소로 형상하고 있어 다수의 사람들이 비 속에서 계곡을 걷는 것이 불안하므로 안심하고 걸어도 좋다는 이야기로 위안을 시켜본다.

 

< "광주광역시" 에서 오신 트레킹 사람들 >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구룡폭포" 사진 >

 

< "구룡폭포" 상부에 만들어져 있는 정자 >

 

한참 기다리는 동안 일행들이 무사히 도착하므로 다음 관광지가 되는 남원시가지 중심지에 있는 광한루원을 관람하기 위하여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서 남원으로 달려가기로 한다. 

 

2) 광한루원 방문.

남원의 대표적 관광지가 되는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우리나라 고전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춘향전(春香傳)' 의 산실이 되는데, 최근 나는 2013년 4월 28일 제83회 춘향제를 통하여 광한루원 구석구석을 구경하므로 다소 익숙한 장소가 된다.

광한루원 서문 방향의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광한루원을 감상하기 시작하는데, 2013년도에 대비하여 차이점은 광한루원 북쪽 왼편 구석에 있었던 춘향관(春香館)이 월매(月梅)집 앞으로 이전 함과 동시에 다양한 영상물을 추가하므로 더욱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광한루원으로 들어가는 "서문" >

 

이곳 광한루원 여행기는 서문 매표소에서 얻는 한장의 팜플릿에 나타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므로 2013년 나의 블로그에 기록한 내용과 다소의 차별화를 가지고자 한다.

 

가) 광한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은 우리나라 명승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원으로 정원 내에는 호수와 더불어 호수 속에 삼신산(三神山)으로 영주(한라산)섬, 봉래(금강산)섬, 방장(지리산)섬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오작교, 지기석, 상한사, 돌자라가 놓여 있으면서, 광한루원 구성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 달의 궁전을 상징한다.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가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불러지면서, 그 중에서 으뜸의 누각이 이곳 광한루라 하겠다.

인공의 조원 공간으로 경내에는 32종 55.600여 주의 수목이 조원되어 있고, 또한  잔디공간은 지형을 낮게 변화시켜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걷는 방향에 따라 시각의 변화가 흥미롭게 만들고 있는데, 특히 완월정에서는 누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을 이루고 있다.

 

나) 광한루.

춘향전으로 한층 유명해진 광한루는 황희(黃喜)정승이 세종 원년(1419년)에 "광통루(廣通縷)" 를 세웠으며 세종 16년(1434년)에 중건하였고, 또한 정인지(鄭麟趾) 선생님에 의해 세종 26년(1444년)에 "광한루(廣寒樓)" 라 개칭하였다. 

그 후 정유재란 때 전소되어 인조 4년(1626년)에 남원부사 신감으로 부터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선조 때 남원부사 장의국이 요천(蓼川)으로 부터 물을 끌어들여 광한루 전면 동서 양면에 평호(平湖)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다.

 

< 광한루 앞에 자리하고 있는 "거북이" >

 

못 안에는 삼신도(三神島)를 만들어 방장섬에는 대나무를 심고 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의면서 나머지 한섬이 되는 영주섬에는 연정(蓮亭)을 지었고, 또한 가운데에는 하화연(荷花蓮)을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烏鵲橋)를 놓앗다.

 

< 방장섬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정자" >

 

< "방장섬과 봉래섬" 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 >

 

광한루는 연못을 앞에 둔 누각으로 마루 주위에 난간을 둘렸고, 본채 동쪽에 연접된 두 칸의 부속 건물은 정조 때(1776년 - 1800년) 증축하였다.

기둥 위의 공포 양식이 주심포집에 다포식 계통을 절충한 특수한 건물인데, 건축 양식보다 춘향과 이도령의 아름다운 인연이 얽힌 전설적인 누각으로 더욱더 알려져 있다.

 

<성춘향과 이도령의 아름다운 인연이 맺어지는 "광한루" > 

 

다) 춘향사당.

열녀 춘향이의 굳은 절개를 영원히 흠모하기 위하여 1931년에 건립한 "춘향사당(春香祠堂)" 으로써, 사당 입구의 대문에는 "임향한 일편단심" 을 줄여 단심문(丹心門)이라는 현판도 붙어있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 라는 현판이 있으며 내부에는 춘향이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참배객들이 찾고 있는 사당이다.

이러한 춘향사는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였고, 매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당 내에 있는 춘향영정(春香影幀)는 최초에는 진주 사람인 "강주수" 가 영전을 그려 기증하였지만, 6.26 중에 훼손되어 1961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이 영정을 기증받아 현재 까지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 춘향사당 내에 모시고 있는 "춘향영정" >

 

라) 완월정.

옛날 옥황황제가 계신 옥경(玉京)에는 "광한전(廣寒殿)" 이 있었으며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정결 속에서 풍경을 즐겼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다.

이곳 "완월정(玩月亭)" 은 지상인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하여 전통 조선식 누각을 세워 광한루원과 함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는데, 해마다 이 누각 앞에 있는 수중 무대에서 우리나라 대표적 민속 축제인 춘향제가 열리는 곳이다.

 

< 광한루 중심에 있는 "완월정" >

 

< 완월정 앞에 자리하고 있는 "포토존" >

 

마) 오작교.

지리산 천 갈래의 계곡물이 모여 강이 된 요천강(蓼川江)의 물을 받아 만든 연못에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烏鵲橋)" 를 놓아 성춘향(成春香)과 이도령(李道令)의 사랑이 얽혀 내려오고 있다.

이곳 오작교를 1년에 한번만 밟으면 부부간의 금슬이 좋아지고, 자녀가 복(福)을 받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다리이라 하겠다.

 

< 광한루 앞에 만들어져 있는 "오작교" >

 

< 오작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입석" >

 

바) 월매집.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春香傳)" 의 무대가 되는 집으로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뛰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해 춘향이 살고 있는 월매집 부용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이의 어머님 이름을 따서 "월매(月梅)집" 이라고 하였다.

 

< "월매집" 으로 들어가는 대문 >

 

< 월매가 기거하였던 "안채" >

 

< 춘향이가 기거한 "부용당" >

 

< 부용당 앞에 있는 "춘향과 이도령" 의 백년가약 모습 >

 

사) 춘향관.

고전 소설 속의 춘향이를 디지털 병풍 속 이미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춘향관(春香館)은 춘향제 역사를 담은 포스터와 사진 및 춘향전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뮤지컬, 오페라, 창극, 소설 등 춘향이에 관련 되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이다.

 

< "춘향관" 내에 만들어져 있는 광한루원 역사 >

 

< 스크린을 통하여 홍보하고 있는 "춘향전" >

 

< "춘향관" 내부를 관람하는 동문 >

 

< 춘향관 내에 진열하고 있는 "전시물" >

 

< 책으로 발간 되어진 "춘향전" >

 

아) 기타.

이 밖에도 상시 창(唱)을 공연하는 영상관과 더불어 그네놀이를 즐길 수 있는 체험장을 비롯하여 울창한 숲 사이와 함께 하고 있는 꽃길을 조금 거닐다가, 남원의 또 다른 관광지를 돌아보기 위하여 광한루원을 떠나기로 한다.

 

< 광한루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공덕비" >

 

< 광한루 옆에 자라고 있는 고목의 "뽕나무" >

 

< 장미비 속에서 광한루원을 거닐고 있는 "관광객" >

 

< "그네놀이" 를 체험하고 있는 관광객 >

 

3). 만인의총.

다음 관광지는 남원의 숨은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보기 위하여 남원시가지 북쪽 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만인의총(萬人義塚)" 을 찾아가는데, 광한루원에서 10 여 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 "만인의총" 을 나타내는 입석 >

 

넓은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만인의총의 정문으로 들어가는데,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입구에는 비가 내리는 오전이라서 그런지 개미 새끼 한마리 움직이지 않고 적막감이 흐르는 참배단이다.

 

< 만인의총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입구에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는데, 이곳 만인의총은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전사한 남원 주변에 있는 민, 관, 군을 합장(合葬)한 무덤이다. 

왜군은 7년간 임진왜란이라는 전투를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배가 되는 원인이 전라도 지방을 점유하지 못한 결과에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占領)한 후 북진(北進)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년) 7월 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4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으로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 요충지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구례현감 이원춘, 조방장 김경로의 군사와 명(明)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의 3천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13일 부터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채 민, 관, 군의 1만여 명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16일 남원성은 함락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부사 임현, 판관 이덕희, 구례현감 이원춘 등이 전사하였고, 이 밖에 남문을 통하여 성안으로 침입한 왜군과 싸우다가 순절한 민, 관, 군의 숫자가 거의 일만 명이 달하였다고 한다.

난(亂)이 끝난 후 순절한 시신을 한 곳에 합장하는 한편 광해군 4년(1612년) 사당을 건립하여 정기원 등 8충신을 받들었는데, 처음의 묘소는 구 남원역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넓은 광장과 함께 왼편에는 만인의사를 기리는 순의탑(殉義塔)이 높게 서 있고, 오른편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기념관 부지와 함께 뒤편으로 매점 및 노래탑이 자리하고 있다.

 

<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넓은 "광장" >

 

< 광장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순의탑" >

 

동문들은 내리는 비로 인하여 참배를 거절하므로 혼자 관람하기로 하는데, 넓은 광장을 지나 일단의 축대 위로 올라서면 또 다시 왼편으로 관리사무소 건물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기념관 건물이 보이며 전면에는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다.

 

< 광장의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홍살문" > 

 

홍살문을 통과하면 급경사의 축대 위에 외삼문이 되는 충의문(忠義門)이 자리하고 있고, 외삼문을 통과하여 조금 앞으로 전진하면 사당의 내삼문이 되는 성인문(成仁門)이 자리하고 있다. 

 

< 만인의총 사당의 외삼문이 되는 "홍의문" >

 

< 내삼문 앞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정화기념비" >

 

성인문을 통과하면 만인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충렬사(忠烈祠)" 사당에 도착하는데, 사당 앞에는 향을 피우는 향로 한개가 자리하고 있어 옆에 있는 한개의 향에 불을 붙이고 묵도로 경의를 표시하여 본다.

충렬사 뒤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일단의 축대 위에 거대한 무덤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무덤이 정유재란 때 나라를 위하여 묵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한 민, 관, 군이 함께 매장되어 있지만 밑에서 부터 카메라 전원이 꺼져 기념사진을 남기지 못하여 아쉬움이 발생한다.

 

4). 남원 가나안 한정식 식당에서 점심식사.

이렇게 비가 내리는 주말을 통하여 2박3일간 전라도 지역의 관광지를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구경하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동문이 새롭게 만든 남원역에서 출발하는 2시 발 무궁화 열차를 예약하므로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떠나기로 한다.

그래서 남원에서 다소 유명하다는 한식집을 찾아가기로 하면서 인터넷에서 나오는 많은 식당 중 "가나안 한정식" 식당이 적합하겠다는 의견으로 식당을 수배하는데, 식당 위치가 광한루원 북문 근처에 있다고 하여 다시 시가지 방향으로 들어간다.

식당 주변의 공사로 인하여 몇 번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찾아간 식당에는 많은 손님이 대기하고 있어 다소의 기다림을 가지고 나서 자리에 앉아 정식을 주문하는데, 정식은 인당 2만 5천원에 술값은 별도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처럼 먼길을 온 서울동문과 더불어 비가 내리는 우중에서도 안전을 위하여 운전하는 기사의 노고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남원의 특산품이 되면서 병당 만원의 착한 가격을 받고 있는 "황진이" 이라는 술을 주문하는데, 너무나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어 다수의 병을 추가 시킨다.

 

< 남원의 별미가 되는 "항진이" 술 >

 

아울러 가나안 정식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밥상의 다리가 휘어진다는 전라도 음식이 나오지 않고 일상적인 반찬으로 구성되는 평범한 식사가 나오므로 다소 실망이 일어나는 식딩이 된다.

 

< "가나안 정식" 으로 나오는 반찬 >

 

< "가나안 정식" 를 즐기는 동문 >

 

예약한 기차 시간을 맞추어 더 이상 술을 마시는 것을 중단하고, 식당을 탈출하여 남원역으로 달려가 서울동문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눔과 동시에 대구동문은 88고속도로를 진입하면서 무사히 대구에 안착한다. - 셋째날 관광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