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군 금천면에 있는 "운강고택" 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고 간 "만화정" 돌아보고.(2)
2017년 4월 5일. (수요일)
1. 만화정의 초대.
청도역에서 획득한 지도를 의존하면서 청도군 금천면에 있는 임당리 김씨고택을 찾아가기 위하여 다시 20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운문댐 방향으로 넘어간다.
옛날에는 높은 곰티재를 넘어야 하는 길에 이제는 터널의 관통으로 단숨에 운문댐 아래에 있는 금천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지면서 여기에서 신지리 방향으로 조금 달려가면 운문댐에서 흘려 내려오는 동창천이라는 다소 넓은 강을 만난다.
강을 가로질려 만들어져 있는 금천교를 건너자 마자 왼편의 야산 언덕에 아름다운 정자 한채가 자리하므로 한번 방문하여 보자는 의견이 일어난다.
좁은 골목 따라 조금 내려가면 정자와 더불어 강변에는 고목의 버드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름철에는 강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는 피서객에게는 최상의 장소가 되어지겠다.
< 금천교와 함께 하고 있는 고목의 "버드나무" 군락지 >
더불어 이 버드나무 숲을 앞에 두고 있는 고옥의 "만화정(萬和亭)" 이라는 정자 마루에 앉아 풍류를 즐기는 선비는 어떠한 사람일까 하면서 잠겨져 있는 협문 앞에서 안내문을 읽고 있는 사이, 정자에서 한 사람이 나오면서 옆에 있는 관리사 건물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와 관람하여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여 준다.
< "만화정" 을 홍보하고 있는 안내문 >
그래서 정자 오른편에 있는 관리사로 들어가 정자로 들어가는 협문을 통과하여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어 보는데, 청도에서 거주하는 동문과 이야기를 교환하여 본다.
교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호 연관이 되어져 방으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대접하겠다는 제의로 방으로 들어가 정식적으로 인사를 나누어 보는데, 세상에 여기에서 나의 고등학교 2-3년 후배가 된다.
< 정자와 함께하고 있는 관리사 "안채" 건물 >
< 관리사의 "아래채" 건물 >
현재 주인장은 이곳 청도군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정년 퇴임 후 집안의 후손 가운데 아무도 고택을 지키지 않겠다고 하므로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뜻과 비슷하게 본인이 이곳으로 귀촌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 만화정은 자기의 큰 집이 되는 운강고택의 부속 건물로써, 밀양박씨가 되는 운강 "박시묵(朴時默)" 선조가 1856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숲이 울창한 낮은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한 정자는 동창천을 내려 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져 있으면서 정자의 배치는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서측에 한칸의 방과 동측에 2칸의 방을 두고 누마루 3면에 헌함을 둘려 바닥을 확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건물 또한 매우 견고하고 섬세함을 나타내는 것이 자랑이라고 한다.
<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만화정" 정자 >
< 만화정을 나타내는 "현판" >
이 정자에서 옛날 선조들이 교우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문답 및 정자 처마에 걸려 있는 시(詩)와 주련을 해석하여 만든 책자와 더불어 벽면에는 스크랩이 되어진 신문을 붙어두고 있는데, 신문의 내용에는 6. 25 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만화정에서 머물었다는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었다는 신문 >
주인장 안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었던 방의 내부도 구경하고, 특히 누마루에 앉아 동창천과 더불어 정자 앞 마당에 피어 있는 매화와 더불어 다양한 꽃들을 감상하여 본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데, 조금 날씨가 따뜻하면 꼭 한번 방문하여 풍류를 즐기면서 쉬었다가 가라는 말과 함께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한다.
< 누마루 천정에 붙어있는 "한시와 주련" >
< "용" 으로 장식하고 있는 대들보 >
< 대들보 위를 장식하고 있는 "문양" >
<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금천교" >
< 정자 후원에 있는 "비석과 협문">
그러고 나서 도로를 건너 한 300m 정도의 거리에 운강고택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천천히 함께 걸어서 동네를 통과하여 본다.
동네 어귀에는 이곳 신지리 마을에는 중요 민속문화재 제106호가 되는 운강고택 및 만화정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인 섬암고택, 운남고택, 도일고택, 명중고택 등이 밀집해 있어 신지리 마을은 "고택 마을" 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2. 운강고댁의 방문.
많은 고택 중에 신지리 마을에는 대표적인 3개의 고택은 운강 박시묵 선생님과 3명의 아들이 살았던 고옥으로써, 본인과 첫번째 아들이 기거한 종택의 건물 "운강고택(雲岡故宅)" 와 둘째 아들 박재소씨가 살았던 "섬암고택(剡巖故宅)" 및 셋째 아들 박재충씨가 살았던 "운남고택(雲南故宅)" 이 대표적 고택이 된다고 한다.
3개의 대표적 고택은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세째 아들이 살았던 운남고택이 자리하고 있으며 도로 건너편 동남쪽으로 둘째 아들이 살았던 섬암고택이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주인장은 섬암고택에서 거주하고 있으므로 운강고택의 둘째 아들의 후손이 되어진다고 한다.
고택 중에서 운강고택의 뿌리는 맨 처음 소요당 박하담(朴河淡 :1478-1560년) 선생님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던 집터인데, 조선 순조 9년(1809년)에 현재 소유자의 제6대 조가 되는 박정주(1789-1850년) 선생님이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이다.
이후 순조 24년(1824년)에 운강 박시묵 선생님 및 1905년에 박순병(朴淳炳) 선생님이 크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루고 있는 집인데, 고택의 대지 면적이 약 1.700평에 9개의 건물 80칸이나 되는 저택으로 현재 종손이 거주하지 않으므로 안내인이 전체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다소 넓은 길로 들어가다 90도로 꺽어 조금 들어가면 막다른 골목의 끝지점에 거대한 솟을대문이 자리하면서 대문의 처마에 "운강고택(雲岡故宅)" 이라는 현판 글씨가 운치를 더하여 주고 있지만,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안내인이 없으면 관람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택이다.
< 막다른 골목 안에 있는 "솟을대문" >
< 솟을대문에 붙어있는 "운강고택" 현판 >
운강고택은 크게 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지는데, 사랑채을 중심으로 하는 튼 "ㅁ" 자형 건물과 안채을 중심으로 하는 튼 "ㅁ" 자형 건물이 상호 몰려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 선조의 위패를 모시면서 제사를 올리는 사당 및 후원 영역으로 구획하면서 상호 짜임새가 있는 구조와 더불어 필요에 따라 세분되는 평면 배치로 매우 합리적인 주택이 되어진다.
< "운강고택" 을 홍보하고 있는 안내문 >
솟을대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서면 먼저 중사랑채 건물을 중심으로 하는 튼 "ㅁ" 자 건물들이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자리하고 있다.
넓은 마당의 앞에는 방금 출입한 솟을대문 건물과 더불어 왼편으로 사랑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편으로 곡간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바깥마당의 중심에 있는 "중사랑채" >
< 중사랑채 왼편에 있는 "사랑채" >
< 중사랑채 오른편에 있는 "곡간채" >
중사랑채 건물에는 책방이 1칸 있고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마루방이 있어 서당(書堂)으로서의 규모를 잘 갖추고 있는데, 다양한 수장고(收藏庫)와 내외 분별에 치중한 설비와 공간, 주종을 명확히 구별하게 하는 측간, 서당의 존재 등 건물이 합리적 구성과 다양한 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사랑채 왼편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이 중문채를 통과하면 안채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튼 "ㅁ" 자 형태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도 안채에서 안마당의 왼편으로 행랑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안마당의 끝지점에는 '고방채' 라는 매우 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중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 >
< 사랑채와 동일 선상에 있는 "중문채" 전경 >
< 운강고택의 중심 건물이 되는 "안채" >
5칸으로 건축되어진 행랑채는 방앗간과 더불어 주인과 비복이 따로 사용하는 측간도 자리하고 있으면서 설치의 완벽성을 보여 주고, 건물의 앞에는 떡을 만들 때 사용하는 4각의 떡판돌이 놓여 있는 것도 독특한 사대부의 풍경이 된다.
< 안채의 왼편에 있는 "행랑채" >
안마당의 끝지점에 있는 고방채 건물은 매우 긴 건물이 되어지는데, 건물의 오른편 방향으로는 양통 2칸의 곳간과 장류 및 주류를 저장하는 4칸의 광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왼편으로는 2칸의 방이 있으면서 이 방에는 내당의 여인들 친가에서 찾아온 남자들과 상면을 이루어지는 방이라고 한다.
< 안마당 앞에 있는 "고방채" >
특히 오른편 광채와 왼편의 방 사이에는 마루 밑을 터서 협문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 협문은 안채에서 사랑채 후원을 지나 대문에 이르는 통로(通路)로서 내외가 엄격하게 구별 되어지면서 당시의 부녀자들이 사량채 앞으로 출입하는 것을 피하면서 외부로 왕래가 가능하게 하는 협문이라고 한다.
< 고방채 왼편 친가 손님을 접대하는 "방과 협문" >
마지막으로 주인장이 안채의 방문을 열고 내부로 안내하여 주는데, 먼저 대청 마루로 올라가는 신발을 두는 나무계단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좁은 마루와 대청마루 사이에 천광(天光)을 할 수 있는 들문이 설치되어 있어 여름철 들문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시원하게 넓은 대청마루를 사용하게 만들어져 있다.
< 안채 마루에 올라가기 위하여 신발을 두는 "나무계단" >
대청마루 뒤편으로 안방과 더불어 찬방이 자리하고 있는데, 안방과 찬방에 사용되어진 목재들이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끼어맞춤이 되어있어 기둥으로 사용되어진 나무들이 얼마나 잘 다듬어 졌는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가공이 되어져 있다고 설명하여 준다.
< 들문으로 닫혀 있는 "대청과 찬방" >
다시 안마당으로 나와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안채의 오른편으로 있는 쪽문을 통하여 후원으로 들어가면 아담한 정원과 더불어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사당을 구획하고 있는 또 다른 쪽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3칸의 사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안채 마당에서 중문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장 >
< 사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
<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
< 사당 후원에 피고 있는 "매화" >
이 밖에도 사랑채와 중문채 사이에는 있는 담을 형성하고 있는 벽면에 연속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문양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 조각되어 있어 건물 하나 하나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가 되지만, 앞으로 이 고택을 누가 지속적으로 관리하여야 할 지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 사랑채와 중문채 사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기하학적" 그림 >
< "섬암고택"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운암고택" 을 홍보하는 안내문 >
그러고 나서 후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일을 상의하기 위하여 골목 끝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면서 운강고택을 떠나기로 하는데, 떠나는 길에 2개의 고택이 되는 섬안고택과 운남고택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고 나서 다음 관광지가 되는 대비사(大悲寺) 방향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