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충청도)

속리산 "법주사" 에서 경북대학교 기계과 제1회 동문회 모임에서 가져본 내용을 기록한다.

용암2000 2010. 3. 1. 19:05

 

경북대학교 기계공학과 1회 동창회 모임.

 

1. 첫째날.(2010년 2월 27일)

 

1969년도 청운의 꿈을 품고서 대구광역시 산격동에 있는 상아탑으로 입학 한 30명 학동들이 저마다 사회 한 분야에서 공헌하면서 살아가는 동문들이 잠시 일손을 내려놓고 1년에 한번 씩 부부동반으로 모임 개최한지가, 벌써 수십년이 지나가도 변함없이 모임을 추진하여 주는 운영진에게 감사를 드린다.

올해 모임은 다방 면에서 생활하는 동문들이 참석하기가 제일 용이한 충북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 "법주사" 에서 회의를 가진다고 한다.

목적지까지 움직일 차량이 없어 출근하는 아들 놈에게 사정하여 소형차인 "모닝" 빌려 갈려고 하니 시간 내에 도착하기도 어렵고, 특히 할 일도 별로 없고 남은 것이 시간 뿐이라, 아침 일찍 Wife 옆에 태우고 길을 나서 거북이 같이 달린다.

일찍 출발하다 보니 가는 길에 다소 시간적인 여유가 발생하여 휴게소에 들려 점심도 겸하면서, 동계 올림픽 경기도 실컨 구경하여 본다.

오늘은 매번 법주사를 지나 갈 때 마다 스쳐지나 가면서 휠끈 쳐다만 보고가는 정2품 소나무와 그의 Wife 소나무에 주차하여 한번 찬찬히 구경하기로 마음 가지면서, 속리산 Toll gate에 내려선다.

법주사 가는 길에 나타나는 "서원계곡"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Wife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 352호인 "정부인 소나무" 에 먼저 들린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 정도 된 나무로서 나무 밑 둥지에서 2개의 가지가 벌어져 균형을 유지하면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비록 말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이지만 정2품 소나무의 Wife로서 도도함과 정조를 지키고 있다.

여장부의 위용을 나타내면서 푸르름을 자랑하는 소나무로서, 말하고 움직이는 우리 Wife보다 더 활기차고 당당한 것 같다. 10배나 더 세상 풍파를 꺽어면서도.....

 

< 정2품 소나무의 Wife "정부인 소나무" >

 

만수무강 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그의 남편 소나무인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2품 소나무" 로 길을 제축하여 본다.

정2품 소나무는 조선 제7대 "세조" 가 어린 조카인 "단종" 을 사사하고 왕위 치탈한 죄로 인하여 단종 모친인 "현덕왕후" 가 원한으로 뱉은 침으로 부터 얻은 "부스럼" 치유하기 위하여 온천으로 가는 길에 가마의 연이 닿지 않도록 소나무 가지를 들어주므로 인하여, 정2품 벼슬을 하사받은 나무로서 수령이 약 800년 된 유명한 나무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현재 장관급 소나무이다. 

그런데, 몇년 전 등산 마치고 이곳을 지나가면서 본 나무가 태풍과 낙뢰로 인하여 한쪽 가지가 꺽어져 형편 없는 모양하고 있어 매우 가슴 아파 왔는데, 오늘 가까이서 대면하여 보니 역시 나무 형상이 너무 초라한 것 같다.

 

< 한쪽 방향이 소실된 "정2품 소나무" >

 

식물학자들이 대부분 소나무 수령이 1000년 넘기가 어렵다고 하여, 보은군에서는 이 나무의 씨앗을 받아 제2 아들 나무를 성장시켜고 있다고 하여 그 곳을 둘려보니 어린 나무가 싱싱함을 뽐내고 잘 자라고 있서, 다소 마음의 위안 가진다.

약속 장소인 "연송 Hotel" 에 도착하니까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속리산 산자락 걸으면서 산책길로 접어 들어본다.

작년 겨울 "속리산 묘봉" 등산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서 본 법주사 좌측 뒤편 능선위에 있는 호랑이 형상의 바위가 인상적이라서, 그 곳에 올라가기 위하여 산행초입 찾아 헤멨으나, 결국은 입구를 찾지 못하고 추위로 인하여 포기하고 Hotel로 돌아와야 했다.   

아직 사회에 공헌하는 동문들이 많아 모임의 시간을 오후 5시로 하여도, 북쪽 서울에서 남쪽 창원까지 전국 삶의 보금자리에서 부터 이동하여 오다보니, 부분적인 교통 정채로 인하여 다소 늦게 도착하는 일행이 많다.

저녁 6시 대부분 일행이 도착 되어짐으로 인하여 한 식당에 들려 동문회를 가져본다. 

올해는 매년 모임 숫자보다 다소 적은 15명 동기생이 모여, 먼저 회장님의 건배와 더불어 충무님 경과 보고로 회의가 이어진다.

언제나 변함없이 참석하여 모임을 Leader하는 동문과, 이렇게 시간내여 참석하여 주신 동문과 동문 부인들에게 감사 드린다는 회장님 인사에 간결한 박수로 보답한다.

 

< 저녁 식사와 더불어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면서 >

 

동일한 시간에 입학하여 정든 교정 떠나, 세계의 각 구석에서 일하고 있지만 올해로 교정에서 만남 햇수가 벌써 41년 경과하지만, 이렇게 무심하게 세월이 지나가도 아직도 철이 덜 들어 참석하지 않은 동문들 근황을 일일이 설명하고, 이어서 완전히 연락도 닿지않은 동문들 이름도 거명하니 마음이 다소 무거워진다.       

완전히 연락이 닿지않은 친구도 이 세상 떠나기 전 함께 모여,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희노애락을 술잔에 묻어 보며는 좋겠는데.....

어찌든, 오늘 참석한 동문들 사이도 중간 중간 길흉사 때 만나 얼굴을 본 친구도 있지만, 만 1년만에 한번 보는 얼굴이 있다보니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는지 대화의 종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특히, 1년에 한번 만나는 여자분들은 더욱더 정겨운 이야기로 꽃 피우다 보니, 고요한 속리산 산사의 밤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또 다시, 2차인 노래방으로 장소 옮겨 고래고래 악 쓰면서 흰 머리카락 날리면서 청춘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육체가 KO 상태가 될 때까지 몸을 흔들면서 흥의 기분 속으로 도취 되어진다.      

 

< 노래방에서 악도 써보지만 나이가...> 

 

2. 둘째날.(2010년 2월 28일)

 

간단한 아침식사 마치고 나서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몇명 회원들이 떠나고 나서, 나머지 일행은 걸어서 "법주사" 경내 구경을 가져본다.

 

< 하루밤 신세를 진 "연송 Hotel" 앞에서 >

 

보은 법주사도 우리나라에서 국보 3개, 보물 10개, 시도유형문화재 5개를 보유한 문화재의 보고인 사찰이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인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義信) 스님이 건립한 절로서, 울창한 숲길로 이어지는 길 따라 걷다 보며는 해발 1000m가 넘는 속리산이 병풍같이 둘려 쌓여있는 산맥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속리산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매표소에서 일인당 3000원 입장료를 지불하고 나서, 오솔길 따라 올라가며는 "호서제일가람" 이라는 일주문에 이른다.

 

< 법주사 "일주문" 을 지나가면서 >

 

이 일주문을 통과하고 나면 바로 좌측 개울가 "연리지" 소나무 한 그루 먼저 만나는데, 속리산에는 연리지 나무가 3그루나 자생하고 있는 연리지 나무의 보고 산이기도 하다.

연리지 나무는 모래같이 많은 사람 중에서 배필로 만나 부부의 연(連)이 이루어지는 것 같이, 수 없이 많은 나무 중에서 나무의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연이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희소가치를 가지고 있고, 또한 신비스러운 나무가 아니겠는가?

특히, 법주사 입구에 있는 이 연리지 소나무는 한 가지가 약 5m 정도 자라다가, 다시 자기 몸통으로 붙여지는 형상하고 있어 참 기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 기이한 형상을 가진 "연리지 나무" >

 

일주문 지나 숲길을 따라 조금 산책하다 보며는 이내 법주사로 들어가는 피안교(수정교) 만나고, 그 다음 금강문에 이른다.

금강문을 통과하며는 또 다른 문인 사천왕문 만나고, 이 사천왕문을 통과하며는 눈 앞에 숨이 꽉 막히는 거대한 건축물이 앞을 가로 막는데, 이 건축물이 국보 제55호인 "팔상전((捌相殿)" 이다.

 

< 국보 제55호인 "팔상전" 외형 >

 

법주사 팔상전은 5층 탑으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고, 유일한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목탑(木塔)은 나무로 만든 탑으로서, 초기 삼국시대의 탑은 목탑으로 부터 시작하였으나, 현재는 석탑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목탑은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 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에 높이 80m 목탑(약 30층 높이의 건물)을 건축하였으나, 고려말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버리고,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 초반에 세워진 법주사 팔상전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초 목탑으로서 높이가 22.7m에 달하며,1626년(인조4년) 벽암선사(碧岩禪師)에 의해 중건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팔상전이 건물로 분류되지 않고, 탑으로 분류한다는 것 이번 방문을 통하여 기술된 내용 상세하게 읽어 보고서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 없이 속리산을 찾아 천황봉, 문장대, 묘봉 등 등산하면서 매번 법주사에 들어가 보아도 눈 깔을 어느 전당포에 저당 잡히고 다녔는지, 탑 앞에 기록하여 놓은 안내판도 한번 똑 바로 읽어보지 않고 건성으로 다니다 보니, 지금까지 팔상전을 건물로 알고 지냈는데 오늘에서야 톡톡히 읽어보니, 탑이라고 한다.

탑과 건물도 구별 못하는 나의 현 모습이니 참 기가 찬다. 이렇게 사니까 실업자로서 돈도 못 벌고 못 살지.....

 

< 팔상전이 탑이라고 기록된 "안내문" >

 

탑의 외형을 살펴보면.

 

1층과 2층은 앞과 옆면이 5칸, 3층과 4층의 앞과 옆면은 3칸, 5층은 앞과 옆면 2칸씩으로 되어있고, 기초의 4면에는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매우 안정감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있다.
건축물의 외관 양식구조가 각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쌓은 구조가 기둥 위에 만 있는 "주심포 양식" 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식 양식" 으로 꾸몄다.

2층 처마 밑 4모서리에 이 세상에서 죄지어 벌을 받고 있는 인간이 무거운 건축물을 이고 고행하고 있는 모습이, 강화도 "전등사" 를 건립하던 대목수님을 사랑했던 술집 정부 나상과 유사한 형상하고 있어, 불교 교리를 무언으로 표현하는 형상 보고 있으니 정겹다.

 

< 무거운 건축물을 받치고 있는 죄인? 의 고행 >

  

법주사 팔상전 내부 구경.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으로서 1968년 해체·수리 할 때 "사리 장엄구" 를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대부분 사리는 탑 속에 보관되어 짐으로, 더욱더 탑으로 분류가 되어짐이 자명하여 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 및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벽 면에는 부처 일생을 8장 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그 건물 외부에 팔상전(捌相殿)이라 현판이 붙여져 있다.

그런데, 현판에는 왜 여덟 팔(八)자를 안쓰고, 깨뜨릴 팔(捌)자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석가모니의 여덟가지로 표현한 일생은 도솔래의상(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잉태되는 과정). 비람강생상(세상에 출생하는 과정). 사문유관상(출가를 결심하는 과정). 유성출가상(왕자의 신분과 처자를 버리고 궁중을 떠나는 모습). 설산수도상(보리수 아래서 고행하는 과정). 수하향마상(악마를 물리치고 성도하는 과정). 녹야전법상(수행자를 설법하여 귀의 시키는 모습). 쌍림열반상(80세로 생을 마감하여 열반에 드는 과정) 등 여덟가지 과정으로 요약하여 묘사한 그림이다.

오늘은 결심 하고서, 신발 벗고서 팔상전 내부에 들어가 팔상도 그림을 찬찬히 관람하여 보는데, 내부를 관리하는 보살님이 절대로 사진촬영은 불가능하다고 단단히 주의준다.

팔상도 그림 볼려고 건물 내부를 돌아가니까, 한번 보는데 저절로 탑돌이 한번씩 이루어진다. 

옛날 조상들이 탑돌이 할 때에는 책이나, 기와를 머리에 이고서 돌아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기본 예의도 가지지않고 카메라만 들고 탑돌이 하고 다녔으니, 아마 극락세계 가기는 다 틀렸다.

팔상전을 돌아 본 후, 팔상전 뒤편으로 가며는 "쌍사자 석등" 만나는데, 석등(石燈)은 등불을 안치하기 위한 석조 건축물이고,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 이다.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대석을 두 마리 사자가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상대석을 떠받치는 독특한 양식인데, 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리고 우주를 나타냈다.

 

< 국보 제5호인 "쌍사자 석등" >

 
석등은 불교에서 "불설시등공덕경(佛說施燈功德經)" 이라는 불경에 기록된 "죽은 사람을 위하여 탑묘제불(塔墓諸佛) 앞에 등불을 밝히면 33천(天)에 다시 태여나 다섯 가지 청정을 얻을 수가 있다" 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불교에서 제일 먼저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석등 뒤에는 또 다른 보물 제75호인 "사천왕 석등" 한 기가 더 있으며, 넓은 마당을 지나면 본존(本尊)인 보물 제 915호인 "대웅보전" 만난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인데,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중기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보물 제75호 "사천왕 석등" 과 보물 제915호 "대웅보전" >


대웅보전 내부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소조불 좌상(앉은 키가 5.5m 라고 함)인 3분 "부처님" 을 모시고 있는데, 중앙에는 마음의 부처인 "비로자나불" 이 모시고 있으며, 좌측에는 덕의 부처인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육신의 부처인 "석가여래불" 모시고 있다. 

대웅보전을 빙둘러서 보고 다시 돌아나와, 팔상전 옆으로 오며는 세계에서 제일 큰 높이 33m 거대한 "금동미륵불" 이 서 있는데, 마치 돈으로 도배하여 놓은 미륵불이 사찰의 고유 전통미를 저하시키면서, 세속으로 물들고 있는 형상하고 있다.

 

< 세계 제일 높은 33m "금동미륵불" >

 

이 금동미륵불은 법주사가 "피안교에서 대웅보전까지" 일직선으로 건축되여 있는 가람 배치 방법에 대한 균형을 무시하고 건립되여 있어, 좌우대칭에 대한 균형 미(美)를 흐리게하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법주사 "우백호" 쪽에 근접하게 산과 바위가 놓여 있어 다소 무거운 형태인데, 그곳에다 또다시 무거운 금동미륵불까지 건립하여 놓았으니, 한쪽이 너무 무거운 형상이 되는 것 같다.

금동미륵불 하부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오늘은 내부 수리중이라 출입 금하고 있는데, 수리가 끝나며는 내부를 또 얼마나 잘 치장하여 관람객의 주머니를 흔들어 놓을지 궁궁하여 진다. 

석가모니와 법주사를 처음 건립한 "의신" 스님의 뜻은 이것이 아닐 것 같은데...... 이 땅의 법주사도 나와 같이 돈이 왠수인 것 같다.

이 금동미륵불 오른쪽 마당 앞에는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石蓮池)" 가 있다. 

  

< 국보 제64호 "석연지" >

 

높이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며, 다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 에서 연지(蓮池)라고 부른다.
전체 구조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석조물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과 팔각 기단부, 그 위의 구름과 연꽃의 형상이 조각된 원통형의 중대석, 석연지의 몸체, 그리고 상단의 난간이 그것이다.

기단은 외곽에 장방형 부재로 사각 테를 두르고 안에는 지대석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팔각으로 각 면에 우주를 새겼져 있다. 
이 석연지를 지나 왼쪽 산 기슬에 크다란 바위 몇개가 서 있는데, 그 바위에는 보물 제216호 인 "마애여래의상" 이 세겨져 있는데, 여래상 형상을 찬찬히 보며는 허리가 얼마나 잘룩한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이 잘 되어있어, 미스코리아 허리는 게임도 안된다.

고려초기의 대표적인 여래불이라고 기술되여 있다. 

 

< 허리가 잘록한 보물 제216호 "마애여래불" >

 

이 바위 왼편에 별도 담장으로 구획한 전각이 있는데, 이 곳에 1624년(인조2년) "벽암대사" 가 중창하였다는 능인전(能仁殿)을 비롯하여 사리각, 세존사리탑, 사리탑비 등이 있으며, 능인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법주사 사찰은 구석구석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가 너무나 많이 산재하고 있어 상세하게 다 돌아 보는 것이 오히려 지겨움이 묻어나, 건성으로 사찰 구경 끝내고 징검다리 건너, 사찰을 탈출하여 본다.

바로 헤어짐이 아쉬워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 가지고 헤어지자는 즉석 의견으로, 속리산 가까운 곳에 있는 "화양계곡" 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하고, Hotel 앞에 주차하여둔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한다.

인원 점검도 겸하여 Hotel 출발하여 1차 집결지인 정2품 소나무 주차장에 모여,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 한장 남겨둔다.

 

< 정2품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단체 사진 : 3명(강,조,장) 의리없이 먼저 살아짐 > 

 

화양계곡 방문.

 

"속리산국립공원" 끝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화양계곡까지 한 30분간 이동하여, 계곡 주차장에 도착하니까 전형적인 봄 날씨가 되어 안성맞춤의 산책길이 이루어진다.

작년 여름 화양계곡 뒤편에 있는 "공림사" 사찰에서 낙영산을 거쳐서 이 화양계곡까지 걸어본 길 역행하면서, 다시 걸어보니 새록새록 정겨움이 묻어난다.

오늘은 화양구곡 중에서 제1곡인 "경천벽" 에서 제8곡인 "학소대" 까지 산책하여 본다.

 

< 제8곡 "학소대" 바위 앞에서 >

 

전일 내린비로 인하여 참 많은 물이 기암괴석 사이로 흘려가고 있고, 빼여난 도명산과 낙영산 풍경에 도취되면서 걸어보는 여자분들은 동심의 세계로 빠져지는듯 무척 좋아한다.

되돌아 내려오면서 화양서원 옆에 있는 한 식당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님이 공부하면서 머문곳인 "암서재" 와 제4곡 "금사담" 바라 보면서 매운탕과 도리탕 등 많은 음식과 더불어 동동주에 잔을 기울리면서 늙어가는 인생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보람있게 살아 가보자는 이야기를 장식한다.

 

< "암서재와 금사담" 을 보면서 >

 

충분한 식사를 가진 후, 아쉬운 시간 가져보지만 각자의 갈길이 상이함으로 인하여 짧은 겨울 햇살이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 상호 이별을 하고, 또 다시 병인년도 무탈하게 지내면서 이마에 한개 줄음살 더하고 손가락 한개 더 펼쳐지는 1년 뒤 다시 만남 기약하면서, 각자 발길로 돌린다.

그런데, 태어 날때 두 주먹 불끈쥐고 세상에 왔지만, 이젠 손가락 몇 개만 더 펴며는 지금까지 벌어논 재산과 명예 다 놓고 북망강산 간다.

회장, 총무님 북망강산 가기 전 모임 자주 가져보면 안되겠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