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및 트레킹.(전라남북도)

전라남도 강진군에 자리하고 있는 "만덕산" 및 "다산초당" 에서 발자취를 찾아보면서.

용암2000 2010. 3. 16. 10:05

2010년 3월 14일.(일요일)

 

오늘 모처럼 전국적으로 오전에는 화창한 날씨가 유지되고 오후에만 다소 흐려진다는 일기예보가 내려지지만, 현 사회에서 거짖말 잘하기로 유명한 "기상청" 이라 반신을 하면서 다시 먼길을 나서본다.

따뜻한 남쪽도 그립고, 또한 봄 꽃의 전령사가 되는 동백꽃을 찾아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만덕산" 과 만덕산이 품고 있는 "다산초당" 을 찾아 길을 재촉한다.

여명이 열리기도 전에 아침 6시 부지런 함에 부산을 떨면서 버스에 올라타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모두다 나와 같이 봄과 꽃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인가 보다.

이제는 전라도 끝 지방에 있는 산들은 다소 많이 찾아가 본 길이라,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의 졸음 속에도 가는 길의 형태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만덕산 산행은 2개의 코스로 나누어 선택 산행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제 1팀은 만덕산 등산에서 제일 짧은 코스 "옥련사" 에서 만덕산 정상 "깃대봉" 에 올라 "다산유물전시관" 까지 약 4Km의 3시간 코스와 제 2팀은 "용문사" 에서 "깃대봉" 에 올라 "다산유물전시관" 까지 종주하는 약 6Km의 4시간 30분 코스로 분산하여 진행시킨다.  

전라도 강진땅에 들어서니가 역시 일기 예보관들의 명성에 걸맞게 하늘이 우중충하여 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므로, 가능한 산행 길에서 비를 맞지 않기 위하여 짧은 코스로 선택하여 산행을 시작하여 본다.

실제로 날씨는 핑게에 불과하고 이젠 등산하기에 겁이 나서 자동적으로 짧은 코스로 몸이 움직이는데, 이것이 늙어 짐의 초기 현상이 발동한 것 같은 기분이다.

강진읍에서 옥련사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1차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형버스가 운행하기가 난이 하지만 기사 아저씨는 서비스 차원에서 끝까지 운전하여 10시 40분 주차장에 하차 하니까, 밑에서 부터 걸어서 올라오는 수십 명의 등산팀과 흡수되어 산행길로 접어 든다.

산행 초입에 조그마한 "옥련사" 사찰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고, 몇 사람만 사찰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 몇장을 찍고 일행의 후미에 따른다.

 

< 산행길 초입에 있는 "옥련사" >

 

숲길을 따라 한 20분 정도 고도를 상승하면 해발 190m "필봉" 봉우리에 이른다.

 

< 해발 190m의 '필봉" 정상 이정표와 강진만을 배경으로 >

 

여기서 부터 뒤돌아 보면 강진의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왼쪽에는 "강진만" 의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으면서 그 너머로는 장흥군의 야산이 펼쳐진다. 

오른쪽에는 해남 땅끝마을로 가는 도로 건너편에 작년 3월 15일 "덕룡산과 주작산" 종주하면서 산행 초입 바위를 올라가다가 진달래꽃 밭으로 넘어져 큰일 날뻔했던 능선이 전개되지만, 흐린 날씨로 인하여 조망이 선명치 않다.

그런데 오늘은 작년 3월 15일 보다 1일 빠른 3월 14일 이지만, 이곳 남쪽 만덕산에도 진달래꽃에는 아직 망울도 올라오고 않고 있어 올해 기후 변화가 심하여 봄소식이 많이 늦어지는 것 같다. 

몇 개의 능선을 넘고넘는 암릉길로 이어지는 만덕산도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산길이 펼쳐지고 있어, 걷는 산꾼들에게는 정겨움이 돋아난다.

 

< 아기자기한 암릉 길을 걸어야 하는 "만덕산" >

 

기본적으로 산행 시간이 짧아 산천구경을 만끼하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뒤쪽 한무리가 따라 오는데, 그 팀이 대구에서 온 "해병대 OB" 산악팀이라고 한다.

나와 같이 걷는 일행 중 이름 모르는 한 여인이 해병대 대원과 같이 산에 대한 공통 분모로 하고 또한 상호 아는 전문 산악인을 매개체로 하여 함께 동행하면서 산행 이야기에 끝없이 이어지는데, 나는 산에 대하여 쥐뿔도 몰라 그냥 귀동냥을 하면서 그들의 뒤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산의 지식을 얻어본다. 

필봉에서 약 1시간 정도 느릿느릿 걸어도 12시 30분 경 해발 408.6m 만덕산 정상 "깃대봉" 에 이른다.

 

< 해발 416m의 만덕산 정상 "깃대봉" 을 배경으로 >

 

< 만덕산 정상에서 본 "백련사" 와 동백숲 전경 >

 

깃대봉을 정점으로 주위에 많는 산악인들이 점심을 즐기고 있지만, 약간의 바람이 일고 있는 쌀쌀한 날씨로 헬기장 방향으로 조금 하산하여 포근한 장소를 선정하여 해병대 팀과 같이 점심식사 시간을 가져본다.

즐거운 만찬을 끝내고 식사 자리를 뒷 팀에게 인계하고, 한 30분 정도 숲길 따라 하산하면 "백련사" 사찰이 이르는데, 백련사는 신라 말기에 지어진 고찰로써 매우 오래된 사찰이지만 사찰의 명성에 비하여 우아함이 느끼지가 않는다.

이름도 없는 건물(불교 상품과 차를 파는 찻집의 공간으로 지어진 상점 건물)의 중앙 돌계단 올라서면 "대웅보전" 이 바로 눈 앞에 가로 막고 있는데, 사찰의 구조가 너무나 답답하게 건축되어져 있다.

대웅보전 건물은 조선 후기에 재축되어 졌으며 내부에는 "목조3존불" 이 모셔져 있는 것이 특색이고, 대웅보전 정면 현판 옆에는 청룡과 황룡의 2마리 머리가 나와 사찰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있다.

룡의 몸통은 사찰 내부에 있는 기둥 전체를 감쌓고 있어 사절 내부의 불상을 보호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용의 건축물이라 하겠다.

또한 곳곳에 학, 봉황, 불사조 등 수 많은 조각품이 용의 몸 사이에 붙어있어, 천정을 쳐다 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가 아파진다.   

건물 외형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겹치마의 "다포식" 으로 건립이 되어져 있어, 다소 고풍이 풍겨나오는 건물이다.

 

< "백련사" 대웅보전 건물의 전경과 청룡 및 황룡 머리 형상 >

 

이곳 백련사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 "동백림" 숲이 자라고 있으며 사찰 왼쪽 노거수 밑으로 "동백림" 탐방로가 이어지는데, 탐방로 곳곳에 한무리의 사진 작가들이 모여 아직 만개되지 않는 동백꽃을 배경으로 작품사진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 꽃망울만 품고 있는 "동백나무" >

  

탐방로 끝자락에 "다산초당" 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고,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조그마한 둔덕을 올라서면 사찰에서 돌보고 있는 야생 차밭이 나오면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오솔길로 열린다.

 

< 사찰에서 관리하는 야생 "차밭" >

 

이곳 오솔길이 그 유명한 다산 선생님이 거닐었던 길인데, 이 길은 "초의선사" 와 "혜장법사" 등과 함께 차와 시국담을 논하면서 산책하는 숲길이다.

다산초당 "천일각" 너머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오솔길로써 대숲과 동백숲으로 지나면 다산이 혜장법사를 만나려 다녔던 백련사가 나온다.

혜장법사는 다산 선생님 보다 10년이나 아래이고 스승으로 모시는 사이로 변하지만, 다산이 혜장법사를 찾아려 다니는 뜻은 무엇인가?

혜장법사와 초의선사가 만들어 내는 차(茶)이다.

매년 곡우 전후에 참새 혀 끝 만큼이나 자란 차나무 잎(세작 : 細雀)을 따서 찌고 볶아, 엽차(葉茶)와 병차(餠茶)를 만들어 주으로 인하여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 할 계기가 된다. 

"초의선사" 도 혜장법사 보다는 어리지만 인접한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 에서 차를 생산하여 혜장법사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다산과도 각별한 친분 만들므로 번번히 차를 선물하는 사이로 유지 발전된다.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오솔길" >

 

오솔길의 끝부분 고개마루에 3거리가 나오면서 이 3거리에서 왼편으로 100m 정도 가면 강진만을 내려다 보이는 "해월루(海月樓)"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 해월루는 최근에 건축한 건물로써 4모서리 다 팔작지붕의 형태로 건축이 되어져 매우 아름답다.

 

< 최근 새롭게 건축된 "해월루" 정자 >

 

2층에 올라서서 앞으로 내려다 보면 강진만 갯벌을 막고 있는 "방조제" 위에는 기다란 길이 이어지고, 그 너머에는 바다와 더불어 장흥군 끝자락에 이름없는 산들이 가로 놓여 있어 조망이 한폭의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 해월루에서 본 강진만과 장흥군의 끝자락의 "만" >

 

고개 마루로 뒤돌아 나와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 내려가면 "천일각" 이라는 정자가 나타나는데, 이 천일각 터에서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정약전" 을 그리고 또한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최근 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 정자를 돌아서면 우람한 숲속에 "다산초당" 의 집에 이르는데, 다산초당은 중앙으로 하여 동암 및 서암의 별채를 거닐고 있다.

 

< 숲속에 숨겨져 있는 "다산초당" 의 전경 >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 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잡은 "다산초당" 은 조선시대 후기에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가 되시는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여 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 "공리공론적" 이며 관념론적 학풍을 실용적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형조참의 등 벼슬을 지냈으나, 1801년 "신유사옥" 으로 경상도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 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 되어진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기거했던 장소로써,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 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 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 과 제자들의 유숙처 였던 "서암" 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의 재취가 남아있는 "다산 4경" 이 건물 주위에 산재하고 있다.

다산 선생님이 해배(解配)을 앞두고 초당 서편 뒷쪽에 있는 병풍바위에 "丁石" 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와

 

< 다산이 직접 쓴 "정석" 이라고 새긴 글 > 

 

초당 뒤편에 있는 샘으로 다산 선생님이 직접 수맥을 찾아 만들었으며 절대로 물이 마르지 않고, 차를 끓인데 사용한 약수 "약천(藥泉)" 의 샘,

 

< 다산 선생님이 직접 수맥을 찾아서 만든 샘 : 약천 >

 

마당 앞에 놓여 있는 평평한 돌로서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라는 뜻을 가지며 솔방울을 따서 차를 끓였던 반석이 되는 "다조(茶漕)" 의 바위,

 

< 차를 끓이는 부뚜막 바위 : 다조 >

 

초당 오른쪽에 인공으로 만든 연못으로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돌을 석가산이라 하며, 이 연못을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이라 하면서 이 모든 4곳을 "다산 4경" 이라 한다.

 

< 잉어를 길렸던 연못 : 복판에 있는 작은 돌탑이 석가산이라 함 >

 

다산 선생님이 초당에 머물면서 귀양살이 적적함에 달래기 위하야 한 Love 스토리가 발생하는데, 그 여인은 다산이 유배지로 왔을 때 22살의 청상과부 "표" 여인이다.

표 여인은 15살에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무슨 돌림병으로 사별하자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 죄로 친정으로 돌아온다.

찢어지는 친정 생활에 호구를 덜기 위하여 양반댁 참모로 들어가 음식 솜씨 배우고 있었는데, 주인 양반의 음심에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다시 돌아와 머물고 있는 사이 다산 선생님이 이곳으로 유배와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와 하는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사람으로 변화 한다.

그러고 때로는 밤마다 "동암" 에서 몸을 썩은 연인으로 변하여 딸 자식이 되는 "홍님" 을 생산 한다.

유배지를 떠날 때 이 "표" 여인은 다산 선생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하기 위하여 딸 홍님과 함께 살아짐으로 고향에 돌아가 죽을 때까지 다산 선생님과 그 후순들이 이 여인을 찾았으나, 연이 닿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나 고향이 되는 남양주시 "능내리" 로 돌아가 1836년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렇게 초당마당에 머물면서 뜰에 피어 있는 동백꽃에 매료되어 찬찬히 구경을 하다가 숲길로 조금 내려오면 길가에 죽은 고목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며, 그 나무 밑에 마을로 넘어가는 "오솔길" 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 이정표 따라 조그마한 고개마루에 이르니까 산자락 끝부분에는 현재 차밭으로 개간이 되어져 있어, 길이 단절 된다.

 

< 다산초당 마당에 핀 "동백꽃" >

 

<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거닐었던 오솔길 >

 

뒤돌아 나와 마을을 빙돌아 다시 고개마루를 넘어 "다산유물전시관" 에 이른다.

 

< "다산 유물전시관" 전경 >

 

< 유물전시관 앞에 있는 "다산 동상" >

 

< 다산 유물전시관 내에 있는 "다산의 유배 기록" > 

 

이곳에서 다산의 발자취 되돌아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만 다른 일행의 지연으로 전시관 앞에 있는 "전통찻집" 에 들어가 다산(茶山)의 정기를 받고, 자연산 녹차로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추위에 웅크린 몸을 길게 녹여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