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촌 형제로 구성하고 있는 해심회 가을 야유회는 1박2일로 '밀양시' 주변의 관광지 여행.(2)
2019년 11월 9일에서 10일까지.(1박2일)
2. 둘째날 : 11월 10일.(일요일) 1) 영남루 관광. 전일 밤 음주로 인하여 다소 늦게 일어난 일행은 밀양밸리리조트에서 간단한 아침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둘째날 여행을 떠나기로 하는데, 일행 중 경기도 안양시 및 강원도 강릉시에 거주하는 누님 부부의 이동시간을 위하여 오전 관광으로 종결하기로 한다. 그래서 2일차 여행지는 대구 방향으로 올라가기 편리한 고속도로와 인접지역에 있는 관광지를 돌아보기로 하는데, 첫번째 방문지는 밀양시가지 내에 있는 영남루(嶺南樓)를 방문하기로 한다.
동상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가 삼칸의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곳 초가의 집은 박시춘씨가 어릴 적 생활하였다는 집이라고 하지만 구조가 너무나 단촐하면서 아무 것도 진열하지 않아 왜 이곳에 생가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해설 하나도 기록하지 않은 무풍지대의 생가이다.우리부부는 지금으로 부터 6년 전이 되는 2013년 6월 24일에 영남루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장소이라 다소 익숙한 관광지가 되어지는데, 먼저 영남루의 남쪽 방향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주차를 한다. (1) 박시춘 생가 구경. 주차장에서 야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먼저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의 생가를 만나는데, 생가로 올라가는 입구에 박시춘 선생님의 동상과 함께 그의 대표 작곡이 되어지는 '애수의 소야곡' 이라는 노래비가 나란하게 서 있다. 고(故) 박시춘 선생님은 1913년 이곳 밀양에서 탄생하여 14살 때 유랑극장 순회 공연단 따라 다니면서 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탁월하였다고 한다. 그 후 20대 중반에 작곡가로 데뷔하여 1938년도 남인수 선생님이 부른 '애수의 소야곡' 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작곡가로써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남인수씨 역시 애수의 소야곡이 데뷔 곡이자 출세의 곡으로 일약 대스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애수의 소야곡 노래는 이별의 회한과 더불어 나라 잃은 슬픔을 비유하고 있기도 하는데, 남인수씨의 독특한 음색과 창법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노래이다. 1940년에는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를 발표하였고, 1948년도 '가거라 삼팔선', '고향초' 1949년도 '신라의 달밤', '고향만리',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을 만들어서 희트를 시켰다. 6.25 전쟁이 발생한 1950년에는 '님계신 전선', '전우야 잘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봄날은 간다' 등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곡(曲)을 많이 만들어 대중적인 작곡가로 성장하게 되어진다. 특히 백설희씨를 일약 스타로 만든 '봄날은 간다', '아메리카 타운', '물새우는 강언덕' 을 부르게 하였으며, 1950년도 후반에는 영화사를 설립하여 '딸 칠형제', '가는봄 오는봄' 등 직접 영화를 제작하고 주제가도 희트하게 만든다. 1960년도 중반 이미자씨의 '벽오동 심은 뜻은' 오기택씨의 '우중의 여인' 등을 끝으로 1965년 부터 창작 활동을 중단하였는데, 1930년대 말 부터 1960년대 까지 약 40여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하여 수 많은 희트곡을 창작한 근대 한국 가요사에서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하였다. 1996년 84세로 타계하였는데, 선생님은 작사가 반야월 선생님, 가수 이난영씨와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 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2) 영남루 관람. |
박시춘씨 생가를 구경하고 나서 영남루로 들어가는 후문에 설치하고 있는 스피커에서 '밀양아리랑' 이라는 국악의 소리를 들으면서 영남루 내부로 들어가는데, 영남루에는 먼저 넓은 마당을 만난다.
< '영남루' 의 조감도 >
< '영남루'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영남루는 넓은 마당의 왼편 밀양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루대(樓臺)인데, 규모나 형태에서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루각(樓閣)으로써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루각 중에 하나가 되어진다.
< 마당의 왼편 밀양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영남루' >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인 밀양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742-765년) 때 이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루각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 때 김주(金湊)가 밀양 부사로 부임하여 와서 새롭게 다락을 높게 신축하면서 '영남루(嶺南樓)' 이라고 하였다.
현재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년) 이인재(李寅在) 부사가 중건한 것으로 조선시대 때 부터 진주 촉석루 및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名樓)로 일컬어 왔다.
영남루는 본루(本樓)를 기점으로 하여 익루(翼樓) 건물로 좌측에는 능파각(凌波閣)과 우측으로 침류각(枕流閣)을 거닐고 있으며 본루는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지면서 2층 다락형으로 웅장한 기풍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 본루가 되어지는 '영남루' 전경 >
마루는 넓게 깔린 2층 평면으로 내외진(內外陳)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위에 난간을 두르면서 기둥 사이로는 사면(四面) 모두를 개방하였고, 건물의 공포는 익공양식의 건축으로는 쇠서가 많은 삼익공계(三翼工系)이며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 천장에 겹처마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 '영남루' 천정 내부의 모습 >
특히 우측 침류각과 본루 사이에는 '달월(月)' 자 형태의 층층각이라고 하는 계단식 통로(通路)가 상호 연결이 되도록 만들어지므로 인하여, 먼 곳에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이 되어진다.
이 영남루는 다른 지역의 루각과 차별나게 하는 것은 관광객들이 좌측의 능파각 건물을 통하여 루각으로 올라가 밀양시가지와 더불어 건축양식 및 루각 곳곳에 붙어있는 다양한 현판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도 다른 지방의 루각과 차별화를 만들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영남루는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도 조선 16경 중에 하나로 선정되어질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루각으로써, 발 아래에 머물고 있는 밀양천과 울창한 송림 및 아름다운 시가지 빌딩들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영남루에서 '왼편' 으로 바라보는 풍경 >
< 영남루에서 '정면' 으로 바라보는 전경 >
< 영남루에서 '오른편' 으로 바라보는 전경 >
또한 건물 내부를 돌아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충량(衝樑)과 퇴량(退樑)은 물론 대형 대들보가 화려한 용신(龍身)으로 조각 되어있고,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 문장가들의 시문(詩文) 현판이 즐빈하게 붙어있어 읽은 재미를 극대화(極大化)시켜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광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것과 서예가들로 부터 불가사한 필력으로 지칭되는 것은 1843년 부터 1844년 까지 이 건물을 중수 할 당시 이인재 부사의 첫째 아들인 11살의 '이증석' 군과 둘째 아들인 7세의 '이현석' 형제가 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와 영남루(嶺南樓) 라는 현판의 글씨이다.
< 영남루에서 붙어있는 '현판' >
< 영남루의 내부에 붙어있는 '현판'(1) >
< 영남루의 내부에 붙어있는 '현판'(2) >
< 영남루 내부에 붙어있는 '현판'(3) >
이 밖에 여러 사람들이 쓴 현판이 곳곳에 붙어있는데, 모두가 이곳 영남루가 최고의 아름다운 경치에 극찬을 아끼지 않은 명필이라서 그런지 입구에 부언(附言)으로 설명하여 놓은 현판의 내용이 보인다.
< 영남루에 붙어있는 '현판' 의 내용 설명문 >
특히 바닥에 깔린 마루가 세월의 무게로 인하여 삐뚤어진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통하므로 인하여 여름철 무더위를 날려 보내면서 한숨의 낮잠을 청하는데 최적의 장소가 되어지고, 또한 건물 천정과 기둥 및 석가래에 칠하여 놓은 단층이 퇴색할 때로 퇴색하여 고풍의 빛 바랜 건물로써 인고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건물이다,
(3) 천진궁의 탐방.
건물로 내려와서 넓은 마당을 통과하여 마당의 후면에 이르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천진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덕문(萬德門)' 이라는 정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문을 통과하면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천진궁(天眞宮)' 을 만난다.
< 영남루 마당의 뒤편에 있는 '천진궁' 전경 >
< 천진궁의 정문이 되어지는 '만덕문' >
< 만덕문 내부에 있는 '천진궁' >
천진궁 내에는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始祖)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중앙 수좌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여 있고, 동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 고려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서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천진궁 내에 진열하고 있는 '단군' 영정 >
천진궁은 고려 현종 6년(1665년)에 부사 홍성구 선생님이 창건한 요선관(邀仙館)의 건축물인데, 현재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 선생님이 크게 보수하였으며 고종 연간에는 군수 이재도 선생님이 중수하여 객사 건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천진궁의 정문이 되어지는 만덕문 왼편으로 둥굴게 만들어진 받침돌 위에 비석이 서 있는데, 이 비석에는 밀양박씨의 원조 '밀성대군상(密城大君上)' 이라는 글씨와 더불어 비석 앞에는 2분의 무인상과 2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 천진궁의 왼편에 있는 '밀성대군상' >
(4) 아랑각을 돌아보고.
이렇게 영남루를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한번 돌아보고 나서 다시 후문으로 나와 대나무 숲을 통과하여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 따라 밀양천변으로 내려가면, 숲의 가장자리에 '아랑사(阿娘祠)' 건물을 만난다.
< '아랑각'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아랑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고목의 나무가 큰 수술을 하면서도 씩씩하게 생(生)을 영위하고 있고, 입구의 정조문(貞操門)을 통과하면 급경사의 계단 위로 아랑사가 자리잡고 있다.
< 아랑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정조문' >
< 정조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아랑사' >
이곳에는 아랑이라는 처녀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여 신관 사또에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부임 날 나타나면 사또들이 놀라서 죽었는데, 기백있는 어느 신관 사또가 아랑의 억울함을 듣고 한(恨)을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아랑사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종 15년(1878년)에 밀양부사로 재임한 연서 신석균 선생님의 영남루 제영(題詠)에 노승원(老僧院)과 열녀사(烈女祠) 라는 단편적인 기록으로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 부터 밀양의 지역민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면서 영남루 아래 죽림(竹林) 속에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당 내에 있는 영정(影幀) 그림은 이당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그림인데, 아랑 제향은 매년 밀양아리랑 축제 행사를 통하여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祭官)이 되어 음력 4월 16일에 제(祭)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 아랑사 내에 모시고 있는 '아랑' 영정 >
이곳 아랑사 옆에 있는 쪽문을 통과하여 대나무 숲으로 조금 올라가면 아랑 낭자가 피살된 장소가 나타나는데, 이곳 장소에는 간단하게 철조망으로 둘레를 만들어진 중앙에 '아랑유지(阿娘遺址)' 라고 쓴 비각 한기가 외롭게 서 있다.
< 아랑사 옆 대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랑유지' 비 >
< '아랑유지' 비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5) 무봉사로 올라가면.
이렇게 아랑각을 구경하고 나서 다시 영남루 후문으로 올라와서 이제는 야산의 정점 언지리에 있는 '무봉사(舞鳳寺)' 경내를 돌아보기로 하는데, 입구에 있는 일주문을 통과하여 급경사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경내의 입구에 있는 무량문(無量門)을 만난다.
< '무봉사' 를 가르키는 이정표 >
< 무봉사 입구에 있는 '일주문' >
< 일주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무량문' >
무량문을 통과하여 비탈면 따라 만들어진 몇 개의 돌계단으로 올라서면 무봉사 본찰인 '대웅전(大雄殿)' 건물에 도착하는데, 무봉사는 산의 비탈면 따라 건립되어지다 보니 아주 좁은 마당을 확보하고 있다.
< 무봉사의 본찰이 되는 '대웅전' >
무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양산 통도사 말사로써 신라 혜공왕 9년(773년)에 법조(法照) 대사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 부속 암자로 세운 것인데, 고려 공민왕 8년(1359년)에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자 이 암자를 무봉사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혜징(慧澄) 스님이 새로 짓고, 1899년도 경봉(慶蓬) 스님이 중건했으며 1942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사찰이라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493호 '석조여래좌상'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0.97m 이며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및 넓적한 코 등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다.
< 대웅전 내에 모시고 있는 '석조여래좌상' >
또한 사찰 주변을 돌아보면 본당 오른편으로 균형미가 전연 맞지 않는 2개의 탑이 서 있고, 왼편으로는 요사채와 더불어 범종각 건물이 자라잡고 있어 다소 짜암새를 갖추고 있는 사찰이라고 하겠다.
< 균형미가 전연 맞지 않는 '석탑' >
< 대웅전의 왼편에 있는 '요사채' 건물 >
< 요사채 옆에 있는 '범종각' 건물 >
< 무봉사의 '태극나비' 전설 >
이렇게 영남루와 함께 하고 있는 주변을 관람하고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가 승용차에 탑승하고 나서 다음 관광지로 떠나기로 하는데, 다음 관광지는 밀양시기지에서 다소 벗어나는 곳에 있는 위양지를 방문하기로 한다.
2) 위양지 방문.
위양지는 밀양시가지에서 북쪽 방향으로 한 20분 정도 달려가면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자리하고 있는 저수지가 되어지는데, 이곳 '위양지(位良池)' 는 통일신라와 고려 이래로 농사를 짓기 위해 이용되었던 작은 연못이라 하겠다.
위양지 주변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연못이 되어지는데, 이렇게 계절과 무관하게 관광객이 찾아오는 이유는 호수 내에 자라고 있는 버드나무가 경북 청송군에 있는 주산지의 버드나무와 같이 물 속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저수지 입구에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위양지는 '선량한 백성들을 위하여 축조한 연못'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이 이름은 근래에 바뀐 이름으로 본래 이름은 양양지(陽良池)이라고 불려졌다.
< '위양지' 입구에 있는 주차장 >
< '위양지' 를 알리는 설명문 >
위양지는 둘레가 4.5리(약 1.8km)에 이르면서 제방 높이가 6m에 제방 길이가 384m에 이르면서 저수용량 99,000㎡ 인데, 밀양시 부북면 일대 40헥타르(Ha) 농경지에 용수(用水)를 공급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논에 물을 대는 대신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는데, 밀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팝나무 꽃이 피고 아름드리 왕버드나무와 소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두르고 있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운치를 즐길 수 있다.
< 위양지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는 '왕버드나무' >
< 연못 주변 곳곳에 자라고 있는 '왕버드나무' >
위양지의 풍경을 더욱더 빛내는 것은 연못의 중간 정도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인데, 연못에 떠 있는 섬 하나에 1,900년에 지어진 안동권씨 문중 소유의 정자 '완재정(宛在亭)' 이고 정자의 주변으로 핀 이팝나무와 찔레꽃 등이 위양지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주차장에서 연못의 가장자리 따라 걸으면서 연못을 구경하여 보는데, 연못의 주변으로 도열하고 있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들이 물을 경계선으로 하여 반영(反影)하는 그림자로 인하여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 물의 경계선과 반영하고 있는 '소나무' >
< 물 속에서 자라고 있는 '수초' >
가장자리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연못 속에 자리하고 있는 섬으로 들어가 보는데, 섬으로 넘어가는 구름다리를 건너가면 섬의 중앙에 아름다운 정자가 되는 완재정에 도착이 되어진다.
< 섬의 중앙에 있는 완재정으로 들어나는 '구름다리' >
< '완재정' 으로 들어가는 대문 >
< 섬의 중앙에 있는 '완재정' >
정자에서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여 보면 연못의 전면으로 펼쳐지고 있는 소나무가 물과 반영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고, 연못의 오른편으로 조그마한 야산도 물과 반영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 정자에서 바라보는 '나무' >
< '야산' 도 반영하고 있는 연못 >
정자의 주변에는 몇 명의 사진작가들이 거대한 카메라를 의존하면서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가을철 보다 봄철에 피는 이팝나무 및 배롱나무의 꽃과 함께 하는 풍경을 찍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더욱더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연못이라고 한다.
< 단풍과 함께 하는 '연못' >
< 연못 가장자리에 설치하고 있는 '정자' >
일행 중 다수가 연못을 한바퀴 돌아보겠다고 산책의 길로 나서므로 인하여, 몸이 불편한 일부 4촌 형제들은 주차장 주변을 산책하면서 일행이 도착할 때 까지 기다림을 가지다가 단체사진 한장을 남겨본다.
< '단체사진' 을 찍어보는 친척 >
문제는 연못 주변으로 어떠한 편의 시설이 전무하므로 인하여 위양지를 떠나기로 하는데, 일행 모두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대구로 가는 방향의 청도휴게소에서 만남을 가지면서 함께 점식식사를 하고 나서 헤어짐을 가지도록 한다. -둘째날 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