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 문화와 산행.

발해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경북 경산시 남천면에 자리하고 있는 '송백마을' 탐방.(6)

용암2000 2025. 3. 27. 08:25

2025년 3월 14일.(금요일)

6. 발해 후손들이 살고 있는 송백마을의 탐방.

오늘 이목회 회원이 경남 밀양시에 산재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재를 관람한 후 대구로 올라가는 길에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마을' 을 탐방하기로 하는데, 송백마을은 '발해(渤海)' 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 '발해미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입석 >

 

동네를 관통하고 있는 중앙 도로 따라 조금 올라가면 마을 중심지에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는데, 공원 중앙에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동상과 함께 추모제 건물 및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입석이 자리하고 있다.

< '송백마을'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공원 >

< 공원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대조영' 흉상 >

< '발해마을'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안내문' 을 정독하고 있는 일행 >

< '추모제' 건물의 전경 >

발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입석에 따르면 고구려의 유민(遺民)이 되는 대조영이 서기 698년 만주지역에 세운 나라로써,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수도는 '상경 용천부(上京 龍天府)' 에 두었다.

한국 고대사에 따르면 8-9세기 남방의 신라와 함께 200여 년간 이른바 남북국 시대를 이룬 발해는 영토의 면적은 확실하지 않지만, 서아므로 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아 역대 국가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한 국가이다.

국호(國號)는 일반적으로 발해로만 알려져 있으나 3대 국왕이 되는 '문왕' 때 대(對) 일본 외고 문서에 따르면 '고려(高麗)' 이라는 이름을 썻고, 또 다른 이름으로 '진국(震國)' 이라는 국호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백두산에서 발생한 화산(火山)으로 인하여 극심하게 국운(國運)이 쇠퇴한 사이 거란에게 침공을 당하여 서기 926년에 멸망을 하였는데, 그래서 발해는 약 229년 이라는 짧은 역사를 간직하다가 살아진 나라이라 하겠다.

여기서 태씨(太氏)는 해동성국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황제의 후손으로써 서기 934년 '대광현' 황태자는 수 많은 민중(民衆)읗 이끌고 고려로 내려 왔는데, 고려의 왕 태조는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면서 벼슬과 전답을 나누어 주었다.

태씨 후손들은 서기 1228년 몽고의 침입에 대하여 크게 공을 세우면서 전국적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1592년 '태순금' 통종대부께서 이곳 경산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으므로 현재 태씨의 후손 약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대(大)씨에서 부터 태(太)씨로 된 이유는 고려사에 대와 태는 통용되어 기록되어 있고, 동사통감에 대조영을 태조영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려 초 부터 태씨로 쓰고 있으며 현재 대씨를 쓰고 있는 사람도 다수 있다고 있다..

전국으로 태씨는 약 8천 가구에 9천여 명이 살고 있는데,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영화배우 '태현실' 및 북한에서 주영 대사를 지내다가 한국으로 귀화하여 국회의원이 된 '태영호' 가 대표적 태씨 인물이라 하겠다.

< '태씨' 의 뿌리를 기록하고 있는 입석 >

< 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발해석등' >

< '발해석등'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공원 내에 만들어져 있는 '정자 및 운동기구' >

< 공원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송백마을' 회관 >

마을의 안길 따라 내부로 올라가면 도로 좌우로 태씨의 문패(門牌)를 달고 있는 집들이 도열하고 있는데, 이들 태씨는 대부분 44세 손(孫) 이지만 간혹 43세 손의 문패도 보이고 있다.

< '마을' 안길 따라 걷고 있는 일행 >

< 발해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 의 벽화 >

< '발해 43세 손' 을 나타내고 있는 문패 >

< '발해 44세 손' 을 나타내고 있는 문패 >

< 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하여 보존하고 있는 '고택' >

< 혼자 기거하고 있는 '태씨' 의 문패 >

< 마을 중간지점에서 나누어지고 있는 '3거리' >

< '대조영' 의 벽화 그림 >

< 말을 타고 있는 '대조영' >

< '대조영' 후순들이 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그림 >

동네에서 마지막 집 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 가기로 하지만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로 거리에는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적막감만 흐르고 있는데, 그래서 일행은 에둘려 승용차에 탑승하여 태씨 집성촌을 떠나기로 한다.

< 계속하여 이어지는 '마을' 안길 >

 

< 다소 좁아지고 있는 '마을' 안길 >

< 마을의 끝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주택' >

마을을 벗어난 일행은 925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큰 고개를 넘어 상대온천을 지나면서 이내 경산시가지 내에 도착하는데, 오늘 무계획으로 나선 트레킹에서 많은 역사를 알게한 하루가 되었다. - 6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