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회.(고등학교 동문 모임)

2011년 우암회 하기휴가는 '수덕사 및 백제의 미소' 가 서린 예산군과 서산군 일원에서 실시.(하편)

용암2000 2011. 8. 10. 21:11

 

2. 둘째날.(8월 7일 : 일요일)

요란스럽게 울려퍼지는 친구의 코고는 소리에 비몽사몽(非夢似夢)으로 밤잠을 지세우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펜션 주변을 한번 산책하는데, 맑은 공기가 폐부를 찔러오는 상쾌한 공기 속에 2일차 하기휴가를 시작한다.

여자 회원이 마련한 조출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하여 밥상 머리에 대식구가 모여 앉자 식사를 하다 보니, 동시에 움직이는 여러개의 숫가락 장단이 별미의 반찬이 되어 한 공기 밥에다가 추가의 공기밥이 필요하여 꿀 맛 같은 아침식사가 된다.

이것이 우리내 조상들이 공동체 삶으로 살아갔던 옛 추억이었는데, 작금의 세월에는 식사마저 혼자서 해결하는 개인주의 팽배로 밥상머리에서 부터 우정과 협동심을 키우는 한국인의 고유 미풍 양식은 급변하게 살아지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풍속의 변화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이젠 친인척 마저 정(情)이 멀어져 가는 세상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무거운 식사를 끝내고 나서 여자 회원들이 설거지와 더불어 뒤 정리하는 동안, 전날 밤 48 Page 파티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본전을 마련 할 기회를 달려고 때를 쓰므로 1시간의 추가 시간을 부여한다.

 

< "신사임당" 과 Meeting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회원 >

 

숙소를 떠나는 준비가 완료하고 숙박비도 정산하고 나서 머나먼 덕산 온천지구 까지 왔으므로 "덕산온천관광호텔" 에서 운영하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피로도 풀겸 온천을 하여 보는데, 온천물이 옛날 덕숭산 산행을 마치고 해본 추억의 물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소 실망이 일어난다.

 

< "덕산온천관광호텔" 의 출입문 >

 

이곳 온천지구에서 온천물의 발견 유래는 500여 년 전 이율곡 선생님의 저서 "충보" 에 따르면 "날개와 다리를 다친 학이 날아와서 물을 몸에 바르면서 치료 한 후 날아가는 것을 보고서, 그 자리를 살펴보니 따뜻하고 메끄러운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고 적혀있다.

덕산온천은 1917년 처음으로 탕으로 사용한 온천을 개장하였으며 게르마늄 성분이 함유된 45도의 따뜻한 온천물이 솟아 오르고 있는데, 물은 알카리성 천연 중탄산나트늄 온천수로 근육통, 관절염, 신경통, 혈액순환, 피하지방 제거, 새포 재생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어 전국 최고의 온천수로 인정을 받고 있는 곳이다.

 

< 원탕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덕산온천관광호텔" > 

 

< 원탕에 표시 할 수 있는 "지구유(地球乳)" 표시석 >

 

주변 여러 개의 온천탕 중에서 덕산온천관광호텔은 덕산온천 지역에서 유일한 원탕을 보유한 온천이라 이곳에서 간단하게 온천을 하고 나왔으나, 여자 회원들의 다소 긴 목욕 시간이 필요하여 기다림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잠시 짬을 만들어 관광호텔 앞에 1-2분 거리에 있는 매천 "윤봉길" 의사님의 유품과 독립운동에 매진한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충의사(忠義祠) 기념관 및 생가를 돌아보기 위하여 길을 나선다.    

충의사 터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중국으로 망명길을 오르기 전 까지 농촌 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면서 살았던 장소이다.

 

< 주차장에서 "충의사" 로 올라가는 계단 >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서 언덕 위에 만들어진 충의사 계단으로 올라가면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으며, 여기서 부터 내부로 조금 들어가면 내삼문이 되는 충의문(忠義門)이 나타난다.

충의문을 통과하여 깊숙하게 들어가면 윤봉길 의사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충의사(忠義祠) 건물이 새롭게 단장하여 참배객을 맞지하고 있는데, 영전 앞에 있는 향로에 1개의 향불을 피우면서 고개를 숙여 묵념하여 본다.  

  

< 내삼문이 되는 "충의문" 전경 >

 

< 윤봉길 의사님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충의사" 건물 >

 

< 충의사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윤봉길 의사 "영전" > 

 

이어 계단에서 내려 오다가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윤봉길 의사의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는 "운봉길 의사 기념관" 으로 들어가는데, 들어가는 통로 오른편으로 옛날 예산과 덕산 지역에서 장사를 하였던 "보부상 유품 전시관" 건물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

 

먼저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들어가 입구 안내실에서 개인당 1.000원 하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나서, 각 부스에 마련된 전시실로 들어가 윤봉길 의사님의 연역 및 독립운동 실상을 차례로 관람하기 시작한다.

 

< 전시관 내부에 있는 "유품" 전시물 >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윤황공" 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26년 19세 때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들이 농촌부흥운동이 애국운동이라고 하면서 탄압이 거세지므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다.

그래서 1930년도 중국으로 망명길로 올라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흥구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리는 천장절(天長節)과 상해사변 전승축하기념 행사장을 폭파하여 수십 명의 일본 간부를 살해하여, 한국에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목숨을 바치면서 독립 정신을 고취시킨 중요한 인물이다.

 

< "물통과 도시락 폭탄" 을 투척하고 있는 윤봉길 >

 

그러나 아쉽게도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형무소에서 충살 당하여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신 독립군 의사님 중에 한분이다. 

각 부스마다 윤봉길 의사님이 항일 운동의 선구적 역활을 하고 있는 내용들이 일목요약하게 진열하고 있으며, 특히 백범 김구 선생님과 조우하는 장면을 밀납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 시대의 독립 투사의 결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 백범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와 만남 >

 

< 김구 선생님 앞에서 수류탄과 건총으로서 결의하는 "윤의사" >

 

< 윤봉길 의사의 "흉상" >

 

재한된 시간으로 이곳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돌아보고 들어올 때 보았든 "보부상 유품 전시관" 에 잠시 들어가 보는데, 벽면으로 빙돌아 조선시대의 보부상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보부상의 행적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가져본다.

 

< "보부상 유물 전시관" 출입구 >

 

보부상은 봇짐 장수가 되는 보상(褓商)과 등짐 장수인 부상(負商)을 합친 말로 조선시대의 행상인(行商人)을 총칭하는데, 조선초기에는 아무나 보부상을 하지 못하고 총 본부가 되는 임방(任房)의 허가를 받아야만 상품의 판매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 "보부상 유물" 전시품 전경 >

  

그 후 나라의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마다 양곡을 운반하는 책임도 가지며 거대한 조식을 형성하여 정찰이나 기타 참여 방법으로 그들의 위상을 강화시켜 국익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조선 후기인 1866년도 보부청(褓負廳)을 두어 전국의 보부상을 통합 관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보부상의 활동을 기록한 "연혁" >

 

보부상 유품 기념관도 빠르게 돌아보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운봉길 의사의 생가 관람은 생략하고, 목욕탕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 회원을 픽업하여 이 지방의 특색있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하여 의견을 종합하여 본다.

대구지방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조개구이로 낙찰하여 삽교천 주변에 있는 식당으로 가기 위하여 팽택 방향의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30분 정도 달려, 서해대교가 내려다 보이는 삽교천 호반 주변에 있는 "조개대학" 으로 이동한다.

 

< 도로 양편으로 도열하고 있는 "조개구이 식당가" >

 

< 서울 친구들이 추천하고 있는 "조개대학" > 

 

< 조개대학 뒤편으로 펼쳐지는 "서해대교" >

 

이 조개대학은 서울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종종 이용한 집이라서 그런지 주인 아줌마와 바로 협상을 통하여 주문한 조개탕을 먹어 보는데, 한 여름이지만 뜨거운 조개 국물도 시원 함을 느끼면서 소주와 함께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양푼이 조개가 이내 소진된다.

 

< 키 조개를 비롯하여 각종 조개가 담겨져 있는 "양푼이" > 

 

< 조개 요리에 전념하고 있는 "요리사" 모습 >

 

이어 또 다른 양푼이에 끓인 "해물 칼국수" 도 주문하여 배를 두두리면서 먹어보는 점심식사도 겸하여 본다.

 

< 이어서 나오는 "해물 칼국수" 양푼이 >

 

썰물로 인하여 멀어져 있는 바다 물이 서서히 식당가로 들어오고 있는 서해의 갯뻘을 감상하면서 충분한 휴식과 더불어 많은 정담으로 시간을 소모하다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각자의 보금자리로 떠나는데, 금년 하기휴가의 모임도 대과없이 무사히 마침표를 찍는 하루가 된다. -하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