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문화 및 박물관.

가야국 마지막 비운의 왕 "전 구형왕릉" 과 위패를 모시는 "덕양전" 이 있는 산청군 탐방.(1)

용암2000 2012. 9. 25. 01:12

2012년 9월 22일.(토요일)

 

오늘도 가을철을 알리는 청명한 날씨가 펼쳐지므로 우리집 애마는 부부와 함께 88고속도로를 달려 함양 JC에서 대전 - 통영 간 고속도로로 방향을 바꾸어 남쪽인 통영 방향으로 들어서자 마자 이내 생초IC 에서 내려, 왼편 경호강 따라 지리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청군 유림면사무소에 이른다.

 

< 경호강을 경계로 강 건너편 산청군 "유림면사무소" 전경 >

 

이 면사무소 3거리에서 왼편으로 지방도 60번 따라 안내하는 구형왕릉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구형왕 부부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사적 제214호 "덕양전(德讓殿)" 사당이 먼저 만나지만, 구형왕릉 무덤 부터 먼저 올라가서 참배 드리고 나서 덕양전을 관람하기로 순서를 정한다.

그래서 덕양전 오른편에 있는 해발 923m 왕산(王山)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 따라 지리산 산자락으로 조금 올라가면, 도로의 끝지점에 구형왕릉을 관람하기 위한 주차장에 도착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형왕릉을 알지 못하여서 그런지 아니면 추석이 가까이 오기 때문에 성묘를 하려 갔기 때문에 그런지 텅빈 주차장에는 나의 애마 모닝 한대 만 달랑 중앙에 자리잡고 보니, 주차장에서 최고가의 승용차가 된다.

주차장에서 왕릉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도로 오른편에 돌로 많든 4각 돌탑 위에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이 비석이 서 있는 곳에는 신라가 3국(三國)을 통일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였던 "김유신" 장군이 어릴적 활을 쏘면서 무예를 연마한 "사대(射臺)" 라고 비문에 새겨져 있다.

 

< "김유신" 장군이 활을 쏘면서 훈련한 사대 비석 >

 

구형왕의 증손자가 되는 김유신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의 왕능을 지키면서,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 훗날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명성을 드 높였다는 역사적 인물의 장수이다. 
이 사대에서 부터 왕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변에 무작위로 떨어지는 알밤을 주어 까 먹으면서 한 100m 정도 올라가면 왕산에서 내려오는 2개의 물이 만나는 개울 건너편에 높은 홍살문과 더불어 야산 기슭 따라 만들어진 축대 위에 몇 채의 건물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구형왕릉" 전경 >

 

홍살문 입구로 가까이 들어가면 왕릉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2마리의 사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엄숙하게 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므로, 옷소매 부터 단정하게 하면서 먼저 경건한 마음을 가져본다.

 

< "홍살문" 입구를 지키는 사자와 구형왕릉 유래가 적혀 있는 안내문을 읽으면서 >

 

그리고 나서 입구에 적혀 있는 구형왕릉의 유래를 찬찬히 정독하여 보는데, 이곳에 안치된 무덤은 가야국의 마지막 왕이 되는 구형왕 무덤이라고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이 지방에서 내려오는 구전(口傳)을 바탕으로 추정하였기 때문에 앞에 "전" 자를 붙여서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이라고 칭한다.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 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왕궁(太王宮 : 일명 수정궁)에서 돌아가시자 시호를 "양왕(讓王)" 이라 하였다고도 하며 가락국 제10대 양왕의 릉(稜)으로도 전하여 진다.

양왕은 신라 군사와의 싸움에 패하여 전사하였다고 하는 설(說)과 다른 한편으로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 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는데, 나라를 넘겨 주었다고 하여 양도의 뜻이 있는 사양할 양(讓)자를 써서 양왕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는데, 이것을 석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조문국" 의 탑과 유사 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및 산음현 산천조에 "현(縣)의 40리 산 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 한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이 되는 홍의영의 "왕산심릉기" 에 처음 기록되어져 있는데, 무덤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사찰에서 전하여 오는 "왕산사기" 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안내문을 정독하고 돌길 따라 조금 걸어가면 개울 앞에 솟을대문 형태를 하고 내삼문에 이르는데, 내삼문 중앙문는 굳게 잠겨져 있으며 오른편 문으로 들어가라는 안내 글씨 따라 문을 통과하면 거대한 돌무덤이 눈 앞에 머물고 있다.

돌무덤이 마치 이집트의 수 많은 피라밋트 무덤 중 한기가 이곳으로 공중 낙하를 시켜 머물고 있는 것 같은 이색적인 그림이 펼쳐진다. 

 

< 왕릉 입구에 있는 "솟을대문" 형태의 내삼문 >

 

< 많은 잡석으로 만들어진 7단의 계단 위쪽에 이색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구형왕릉" 모습 >

 

왕릉 가까히 들어가 무덤을 살펴보면, 무덤의 형식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層)이 단(段)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여져 있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데, 석렬(石烈)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에 있는 무덤은 봉분과 같이 타원이면서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 무덤의 최고점 까지의 높이가 7.15m 이고 제4단 위 중앙에 폭 40㎝에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감실이 무엇에 사용했는 것 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 외로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 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 앞에 제(祭)를 올리는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석수가 각각 한쌍 씩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에 만든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다.

 

< 삐뚤하게 넘어지고 있는 무덤 앞 "가락국양왕릉" 비석 >

 

< 무덤 오른편에 있는 "문인과 무인" 상 > 

 

< "문인과 무인" 이 한바탕 싸워 상호 몸을 멀리하고 있는 왼편 석상 >

 

또 다른 전설로는 약 20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와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중, 왕산사 법당 대들보 위에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 "민경원" 이란 사람이 목궤를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 가 발견되어 이를 근거로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및 가을로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왕릉 앞에 서서 간단하게 목례의 인사를 드리고 돌 계단 한단 한단을 올라가 제4단 위에 있는 감심 내부를 들어다 보아도 아무런 흔적이 없어 안내문 기록과 같이 무엇에 사용하였는지 의심을 가지면서 상부 돌무덤 뒤편 까지 올라가 서니, 무덤의 꼬리가 산의 경사면과 자연스럽게 연결 되면서 매우 친환경적 무덤으로 만들어져 있다.

 

< 4번쨰 돌 계단 위 중앙에 있는 "감실" 모습 ; 설명문에는 4째 단에 있는 감실이라고 함 >

 

무덤을 구획하는 담장 돌 따라 오른편 무덤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담장 밖 구석에 무덤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있어 많은 실례를 범하므로, 제단으로 다시 가서 정중하게 사과를 드리고 자리를 떠난다.

 

< 오른편 구석 담장 옆에 "출입금지" 를 표시하고 있는 안내문 >

 

< "구형왕릉" 을 떠나면서 >

 

무덤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왕릉을 보호하는 "호릉각(護陵閣)" 이라는 3칸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나 이 건물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대청마루를 중앙에 두고 양방향으로 방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집이고, 더 옆으로 나아가면 사람들이 출입하는 쪽문이 지어져 있다.

 

< 무덤 오른편에 있는 "호릉각" 건물 >

 

< 홍살문 방향에서 바라 본 "호릉각" 전경 >

 

< "호릉각" 으로 들어가는 쪽문 >

 

이 쪽문을 통하여 한단 아래에 또 다른 3칸 짜리 집이 나타나면서 이 집의 오른편 칸이 부엌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능지기가 거주한 건물 같은데, 이번 태풍으로 주변 나무와 전신주가 파손되어 폐가로 변모하고 있다.

능지기집 앞에 있는 돌다리를 건너 다시 한번 더 비운의 가야국 마지막 왕 구형왕릉을 돌아보고 아쉬운 발길을 돌리고 있는데, 나 만큼 할일 없는 한 젊은 부부가 아직도 열심히 왕릉 주변에 머물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  

 

< 능지기가 살았던 "폐가" 집 >

 

내려오는 길에 다시 몇 개의 알밤을 주어 먹으면서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애마는 야산을 내려와 올라올 때 그냥 통과한 덕양전으로 내려간다.

덕양전은 가락국 제10대 왕이 되는 양왕과 왕비 두 분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으로, 양왕은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水晶宮)에서 생활하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 "덕양전"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그 뒤 제사를 올리다 전쟁 때문에 중단되었으나 1798년부터 다시 항례를 올렸으며 광무 2년(1898년)에 덕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30년 지금 있는 이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1991년 재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락국 마지막 양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은 지난 1983년 문화재 자료 제50호로 지정됐으며, 매년 봄(음력 3월16일)와 가을(음력 9월16일)에 향례를 올리고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삭망 향례를 추가로 올리고 있다고 한다.
덕양전은 홍살문과 함께 직사각형의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영정각, 안향각, 연신문 등 수 많은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비바람에 쓸어지고 있는 홍살문이 비스듬이 흉물스럽게 서 있는 뒤편에 덕양전으로 들어가는 외삼문(外三門)이 있으나 문이 굳게 잠겨져 관람이 불가능하여, 천천히 오른편으로 돌아가니 또 다른 외삼문이 있어 3개의 문 중 한개를 밀어보니 거짖으로 잠겨져 있다.

 

< 덕양전으로 들어가는 태극 문양하고 있는 "외삼문" >

 

< 사당 "관리사" 집으로 들어가는 오른편의 또 다른 외삼문 >

 

덕양전 사당 전체가 중간에 돌담을 쌓아 2개 구간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왼편 구간에는 덕양전 전각이 펼쳐지고 있고 오른편 구간에는 사당을 관리하는 관리사로 구별하고 있다.

관리사 정면에는 "왕산전(王山殿)" 이라는 건물이 보이고 있으며 이 왕산전 오른편에는 덕양전을 관리하는 지킴이 집이 있지만, 주인이 출타하였는지 아무도 보이지가 않는다.

 

< 관리인 집 정면에 있는 "왕산전" >

                                                                    

덕양전으로 들어가는 쪽문 앞에는 덕영전을 건립한 중수기념비가 새롭게 단정하고 있으며,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외삼문에서 들어오는 길과의 교차 지점에 이른다.

이 교차 지점에서 직각이 되는 북쪽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2층의 루각으로 된 중삼문이 되는 "해산루(海山樓)" 가 사당의 중앙을 구획하고 있으며 이 해산루를 통과하면 좌우 동재와 서재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동재와 서재를 품고 있는 마당을 통과하면 사당을 또 다시 구획하는 내삼문 "연신문(延神門)" 이 자리하고 있다.

 

< 덕양전과 구획하는 쪽문 앞에 있는 "중수기념비" >

 

< 덕양전을 구획하는 2층 루각 형태의 "해산루" 전경 >

 

< 나무로 가려져 있는 "동재" 건물 >

 

< 유생들이 기거하는 "서재" 건물 >

 

< 덕양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연신문" >

 

이 연신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써 사당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넓은 마당 끝에 "덕양전(德讓殿)" 사당이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으나, 여기의 덕양전도 모든 문이 굳게 잠겨져 있다.

 

< 제례를 모시는 "덕양전" 전경 >

 

이 덕양전 사당 오른편에는 구형왕 부부가 살았던 또 다른 "수정관(水晶官)" 이라는 건물이 덕양전 방향을 보고 있으며, 이 수정관 앞에는 구형왕 부부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영정각(影幀閣)"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 구형왕 부부가 살았던 "수정관" >

 

< 구형왕 부부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영정각" >

 

이렇게 많은 사당 건물과 유서 깊은 사연이 있는 덕양전 곳곳의 건물과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관광이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건물마다 설명문 하나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지어져 한편으로 태풍으로 쓰러진 상태로 방치하면서 한명의 인적도 볼 수 없는 사당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는지 궁궁하게 만든다.

주말에도 사적을 홍보하는 해설사 한명도 배치하지 못하는 자방자치단체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면서 건립한 사적 건축물이 이렇게 방치 할 것이라면, 차라리 사적을 취소하면 좋겠다.

그러고 공원 등 다른 용도로 대처하여 관광객이 찾고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휴식처가 되는 장소로 변경하였으면 좋으려만,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관광지로 떠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