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문회와 산행.

따뜻한 남쪽 바다가 생각나서 무작정 찾아간 거제도 "옥포대첩기념공원" 을 다녀보고서.

용암2000 2013. 2. 18. 21:24

2013년 2월 15일 (금요일)

 

집 구석에 누워 봄의 소식을 기다리다 지쳐 직접 봄 소식을 마중하기 위하여 친구와 둘이서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발길이 머문 곳이 거제도 끝지점에 있는 장승포(長承浦) 항구이다.

 

< 봄의 소식을 찾아 나선 "장승포" 내항 전경 >

 

우리나라에서 봄의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여 준다는 "지심도(只心島)" 동백꽃 속으로 거닐어 보기 위하여 선착장으로 들어가니, 약 2시간 간격으로 배가 떠나가므로 매표소 앞을 서성이면서 매표원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어 본다.

현재 지심도에 있는 동백꽃은 몇일 전까지 꽃망울이 잘 여물어졌다가 강추위로 꽃망울이 얼면서 다소 꽃의 활동이 움추리고 있어 좋은 구경이 되지 못하며, 3월 부터 유람선이 증편하면서 매시간 마다 배도 출항하면서 화사한 봄의 소식도 볼 수가 있다고 하면서 그 때까지 참으면 좋겠다고 한다.

 

< 먹이를 찾고 있는 "갈매기" 및 장승포 항구 >

 

< "지심도" 행 유람선 >

 

그래서 봄의 전령사도 없는 지심도를 약 2시간 정도 기다리면서 들어가는 것 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생각으로 장승포 항구 주변에서 조금 배회하다가 항구(港口)를 떠나기로 한다.

다시 옥포만으로 들어가 대우조선 해양 주식회사에서 유조선과 특수 선박을 만들고 있는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이 움직이는 공장 옆을 통과하여 가거대교 방향 언덕 위로 올라서면 이내 "옥포대첩기념공원" 입구에 도착하여 진다.

 

< "옥포대첩기념공원" 조감도 >

 

오솔길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 공원 입구에 도착하면서 입장료 1.000원과 주차비를 지불하고 나서 공원 내부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오늘은 날씨가 조금 추우므로 먼저 차를 몰고 언덕 위에 있는 전망대로 바로 올라가 조망을 구경하고 다시 내려와 사당과 기념관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여 준다.

그래서 언덕 위로 올라가 애마를 주차하고 나서 옥포루 방향으로 올라가면 옥포루 입구에 "백송(白松)"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이 백송은 서울 통의동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4호의 2세로 원산지는 중국 북부지역이며 일반 소나무와 달리 나이가 먹으면서 줄기가 흰백색으로 변하는 희귀 수종으로써 일명 기려목이라고도 한다.

 

< 옥포루 앞에 있는 "백송" >

 

희귀나무를 구경하고 나서 몇 개의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면 높은 곳에 2층의 높은 정자가 서 있는데, 이 정자가 "옥포루(玉浦樓)" 이다.

나무 계단을 이용하여 옥포루 2층으로 올라서면 눈 앞으로 거대한 옥포만이 펼쳐지고 있는데, 방금 지나온 옥포만 내부 방향으로는 대우조선 해향 주식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거대한 배들이 정박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 기념공원 동산에 건립되어진 "옥포루" >

 

눈 앞에 펼쳐지는 옥포만으로 고개를 돌리면 푸른 바다 위에는 거대한 배들이 물동량을 소화시키기 위하여 분주하게 항해하고 있지만, 지금으로 부터 520년 전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처들어오는 왜적을 물려치기 위하여 처음 해전을 치룬 장소이라고 한다.

 

< 옥포루 앞에 펼쳐지는 "옥포만" 전경 >

 

안내소에서 받은 팜플릿에 기제된 옥포대첩의 개요(槪要)를 적어보면, 옥포대첩은 무방비 상태의 조선이 일본 수군을 맞아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勝戰)이라고 한다.

옥포만(玉浦灣)은 지형이 복잡한 거제도의 동쪽에 위치한 소규모 어항으로 임진왜란 이후 "구국의 고장" 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당시 이순신을 위시한 우리 수군이 옥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실전 경험의 우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조정은 왜구에 대한 방비를 전혀 세우지 못한 채 당파 싸움으로 혼란 스러웠으며, 무기 또한 왜구의 조총에 대적할 만한 것이 조선에는 없었지만, 그러나 우리 수군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는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충무 정신으로 일치 단결하여 전투에 임하였던 것이다.  

특히 옥포해전은 왜군의 통신 및 보급료를 차단해 왜군의 육상 전진을 저지했으며, 아군의 사기 진작에도 크게 기여한 해전이라고 한다. 

이 옥포루 뒤편으로 조경이 잘되어 있는 공원 속으로 거대한 탑이 솟아 있는데, 이 탑이 "옥포대첩기념탑(玉浦大捷記念塔)" 으로써 이순신 장군이 진도 지휘하는 수군상이 일품의 조각상을 앞 세우고 있다.

 

< 옥포루 뒤편에 있는 "옥포대첩기념탑" >

 

< 기념탑 앞에 만들어진 "수군상" >

 

이 기념탑 뒤편으로 돌아서서 넓은 인도 블록을 지나면 참배단에 도착하여 지는데, 이 참배단에도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사람의 조각상이 이순신 장군의 영전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각상 앞 항아리에는 흰색의 국화꽃이 놓여 있다.

 

< 기념탑 뒤편에 있는 "참배단" >

 

참배단 오른편에는 이순신 장군이 휘하 장군들에게 명령한 글씨 "물금망동정중여산(勿今妄動靜重如山)"  즉,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운 행동을 취하라" 는 글이 관광객 심금을 울리게 한다.

 

< 참배단 오른편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군령" > 

 

승용차를 몰고 입구로 내려와 사당으로 들어가 보는데, 사당 입구에는 먼저 홍살문을 만나고 홍살문을 통과하면 좌우에는 판옥선과 거북선 모형이 만들어져 있으며 그 옆에 판옥선과 거북선의 제원이 기술되어 있다.

 

< 옥포대첩기념공원 내에 있는 "사당" 전경 >

 

< 홍살문을 지나면 왼편에 있는 "판옥선" 모형 >

 

< 판옥선 반대편에 있는 "거북선" 모습 >

 

이 모형 선박을 통과하여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서 외삼문을 만나고, 외삼문 입구에 사당으로 들어가는 예절을 설명하고 있어 한번 숙지하고서 내부로 올라가면 동재가 되는 "거충사(巨忠祠)" 와 서재가 되는 "승판제(勝判祭)" 건물을 만난다.

 

< 동재 건물이 되는 "거충사" 전경 >

< 서재 건물이 되는 "승판제" >

 

이 동재와 서재 건물에서 또 다시 몇 단의 계단으로 올라서면 내삼문이 되는 "경충문(景忠門)" 을 만나고, 이어 최종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효충사(效忠祠)" 에 이른다.

 

<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대는 "경충문" >

 

< 이순신 장군 영전을 모시고 있는 "효충사" >

 

문이 열려 있는 사당 정면에는 방명록과 더불어 향을 피우는 향로가 놓여 있으며 그 뒤편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전이 걸려 있고, 영전 좌우로는 임진왜란의 해전사를 기록한 병풍이 넓게 전시하고 있다.

 

< 효충사 내부에 모시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전과 병풍" >

 

사당 앞에서 간단하게 예절을 올리고 나서 내삼문으로 되둘아 나오면 옥포만의 바다가 그림과 같이 펼쳐지고 있어, 참 좋은 장소에 사당을 건축하였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옆에 있는 기념관으로 들어가 본다.

 

< 효충사에서 바라보는 "옥포만과 대우조선 해양(주)" >

 

< 사당 오른편에 있는 "기념관" 전경 >

 

기념관 1층 입구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벽면에 "옥표대첩의 해질녘" 이라는 Block 조각품을 만나고, 그 조각품을 돌아서며는 제1전시실에 도착하여 진다.

제1전시실에는 임진왜란 때 사용한 무기류과 더불어 일본군이 4월 14일 처음 부산포를 점령하고 나서 5월 2일 마침내 한양을 접수하는데, 다음달 6월 14일 평양까지 침범하였다는 치욕적인 전쟁사(戰爭史)를 기록하고 있다.

 

< 1층과 2층 벽면에 있는 벽돌 "옥포대첩의 해질녘" 조각품 >

 

< 2층 전시실에 기록하고 있는 "왜군 침략 경로" >

 

그 시대 부산에서 한양까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소요되는 보편적인 걸음걸이 날짜가 14-15일 걸린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전쟁하면서 19일 만에 한양까지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내가 알고 있는 동래부사의 저항, 신립 장군과 문경새재, 탄금대의 저항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전쟁이다.

이 옥포대첩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 빼앗기고 난 후 원균의 요청으로 5월 7일 새벽에야 비로써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옥포만으로 들어와 대승을 한 해전이라는 것이다. 

 

< 제1전시실에 진열하고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

 

<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류" >

 

< 화포에 사용한 "회약" >

 

< 왜군이 사용한 "조총" >

 

제1전시실 내부를 돌아보고 나서, 3층으로 올라가 제2전시실로 들어가면 옥포만의 지형과 더불어 거제도 변천사를 기록하고 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진 거제도 모습을 한 눈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음미하여 본다.

 

< 3층 제2전시실에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유품" >

 

<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되는 "학익진법" >

 

< "거제도" 의 발전상을 알리는 설명서 > 

 

단촐하게 진열하고 있는 각 전시실을 돌아보고 안내판에 기록한 이순신 장군의 내력을 간단하게 상기하여 본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은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임진왜란의 3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장군이 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

한 때 원균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옥중생활을 겪고 두 번의 백의종군(白衣從軍)이란 시련도 있었지만, 정유년 일본이 재 침략하자 복위되어 해전에 참석하여 33전 33승이라는 기록적인 해전사를 만든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에서 탁월하였으며, 특히 해전에서의 전략이 뛰어나 학익진법(鶴翼進法)을 비롯하여 많은 전투진법을 개발하여 실전에 적용하여 패전 없이 승전을 거두는 장군이다.

또한 기존 전함 판옥선을 변형하여 거북선을 개발 제조하여 실전에 투입시킴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고,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하게 준비된 군인과 더불어 탁월한 전술, 그리고 거북선과 화포 등의 뛰어난 무기를 잘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祖國愛)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 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써,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 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기록된다.

이렇게 불멸의 이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더 상기시키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는 길은 친구를 위하여 2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김영삼 전 대통령 집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거가대교를 건너 대구로 향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