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4일 (월요일)
연일 내리는 폭염으로 인하여 당분간 산행을 포기하고 대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밀양시가 보유하고 있는 유적지를 관광하기 위하여 Wife와 함께 아침 일찍 길을 나서 보는데, 대구-부산 간 신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약 1시간 정도 달려 밀양 IC를 통과하면서 시가지를 돌아 먼저 영남루(嶺南樓)로 들어가 본다.
영남루 후면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밀양천(密陽川) 강변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영남루와 무봉사 , 박시춘 생가를 함께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1, 영남루
밀양 영남루(嶺南樓)는 밀양강변 야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루대(樓臺)로서 규모나 형태에서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루각으로써,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루각 건물이다.
< "영남루" 로 들어가는 문 >
< 보물 제147호로 지정된 "영남루" 전경 >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인 밀양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742-765년) 때, 이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 부속 루각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 때 김주(金湊)가 밀양 부사로 부임하여 와서 새롭게 다락을 높게 신축하면서 "영남루(嶺南樓)" 라고 하였다고 한다.
< 다락을 높게 만들어진 "영남루 측면" >
현재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년) 이인재(李寅在) 부사가 중건한 것으로, 조선시대 때 부터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名樓)로 일컬어 왔으며 본루(本樓)를 기점으로 하여 익루(翼樓) 건물로 좌측에는 능파각(凌波閣), 우측으로는 침류각(枕流閣)을 거닐고 있는데, 본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형태를 가지면서 2층 다락형으로 웅장한 기풍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 본루와 더불어 왼편 "능파각" 모습 >
마루는 넓게 깔린 2층 평면으로 내외진(內外陳)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위에 난간을 두르면서 기둥 사이로는 사면(四面) 모두를 개방하였고, 건물의 공포는 익공양식의 건축으로는 가장 쇠서가 많은 3익공 계이고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 천장에 겹처마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특히, 우측 침류각과 본루 사이에는 "달월(月)" 자 형태의 층층각이라고 하는 계단식 통로로 상호 연결이 되도록 만들어 지므로 먼 곳에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내고 있는 건물이다.
< 본루와 오른편 "침류각" 과 연결하고 있는 층층식 계단 >
이 영남루는 다른 지역의 루각과 차별나게 하는 것은 관광객들이 좌측의 능파각 건물을 통하여 루각으로 올라가 밀양시가지와 더불어 건축 양식 및 루각 곳곳에 붙어있는 다양한 현판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도 다른 지방의 루각과 차별화를 만들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영남루는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도 조선 16경 중에 하나로 선정되어질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루각으로써, 발 아래에 머물고 있는 밀양천과 울창한 송림 및 아름다운 시가지 빌딩들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루각 난간에서 바라보는 "밀양천" 전경 >
< 영남루에서 바라보는 "밀양시가지" 빌딩 >
또한 건물 내부를 돌아보면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충량(衝樑)과 퇴량(退樑)은 물론 대형 대들보가 화려한 용신(龍身)으로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 문장가들의 시문(詩文) 현판이 즐빈하게 붙어있어 읽은 재미를 극대화(極大化)시켜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광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것과 서예가들로 부터 불가사 한 필력으로 지칭되는 것은 1843년 부터 1844년 까지 이 건물을 중수 할 당시 이인재 부사의 첫째 아들인 11살의 "이증석" 군과 둘째 아들인 7세의 "이현석" 형제가 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와 영남루(嶺南樓) 라는 현판의 글씨이다.
< 11세의 "이증석" 군이 쓴 영남제일루 현판 >
< 7세의 "이현석" 군이 쓴 영남루 현판 >
이 밖에 여러 사람들이 쓴 현판이 곳곳에 붙어있는데, 모두가 이 영남루가 최고의 아름다운 경치에 극찬을 아끼지 않은 명필이라서 그런지 입구에 부언(附言)으로 설명하여 놓은 현판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본다.
< 강과 밀양읍성이 한폭의 그림 같이 어울린다는 뜻 "강성여화" >
< 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매우 아름다운 루각이라는 뜻 "용금루" >
특히 바닥에 깔린 마루가 세월의 무게로 인하여 삐뚤어진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통과하므로 여름철 무더위를 날려 보내면서 한숨의 낮잠을 청하는데 최적의 장소가 되고, 또한 건물 천정과 기둥 및 석가래에 칠하여 놓은 단층 색깔이 퇴색할 때로 퇴색하여 고풍의 빛 바랜 건물로써 인고의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로 내려와 넓은 마당을 통과하여 마당 중앙에 이르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천진궁(天眞宮)" 건물로 들어가는 정문 "만덕문(萬德門)" 에 이르는데, 이곳 정문 오른편 마당에는 "석화(石花)" 라는 편평한 돌이 깔려 있으며 이 돌에는 꽃무늬로 되어있는 문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 영남루 마루에서 바라보는 "천진궁" 전경 >
< 천진궁으로 들어가는 정문 "만덕문" >
< 만덕문 오른편에 있는 "석화" >
정문 왼편에는 둥굴게 만들어진 받침돌 위에 비석이 서 있는데, 이 비석에는 밀양박씨의 원조 "밀성대군상(密城大君上)" 이라는 글씨와 더불어 비석 앞에는 2분의 무인상과 2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석상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 만덕문 왼편에 있는 "밀성대군상" 비석과 석상을 지키는 무인과 사자상 >
만덕문을 통과하면 천진궁 건물에 도착하면 천진궁 내에는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始祖)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중앙 수좌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동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 고려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서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단군과 8왕조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천진궁" >
< 단군의 "영정" 과 오른편 8왕조 위패 >
천진공은 고려 현종 6년(1665년)에 부사 홍성구가 창건한 요선관(邀仙館) 건물이며 현재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년)에 밀양 부사 이인재가 크게 보수하였으며, 고종 연간에는 군수 이재도가 중수하여 객사 건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아담한 정원 속에서 삼신제왕(三神帝王) 석상과 더불어 제단이 만들어져 있으며, 그 석상 오른편으로 三神帝王, 七元聖君, 太上老君이라고 새겨진 비석 한기가 외롭게 석상을 지키고 있다.
< 천진궁 오른편에 있는 "삼신제왕" 석상 >
영남루 전체를 한번 돌아보고 나서 다시 후문으로 나와 대나무 숲을 통과하여 나무 테크로 만들어진 계단 따라 밀양천변으로 내려가면, 숲의 가장자리에 아랑사(阿娘祠)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아랑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고목의 나무가 큰 수술을 하면서도 씩씩하게 생(生)을 영위하고 있으며, 입구 정조문(貞操門)을 통과하면 급경사의 계단 위에 아랑사가 자리잡고 있다.
< 아랑사 입구 인고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고목나무" >
< 아랑사로 들어가는 "정조문" >
< 높게 만든 계단 위에 있는 "아랑사" 건물 >
아랑사는 "밀양아리랑" 을 만들어낸 아랑이라는 처녀의 혼(魂)을 달래기 위한 제당(祭堂)으로써, 아랑의 전설은 아주 많이 들어온 내용이다.
< "밀양아리랑" 의 노래비 >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신관 사또에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나타나면 사또들이 놀래 죽었는데, 기백있는 신관 사또가 아랑의 억울함을 듣고 한(恨)을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아랑사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종 15년(1878년)에 밀양 부사로 재임한 연서 신석균의 영남루 제영(題詠)에 노승원(老僧院)과 열녀사(烈女祠)라는 단편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그 이전 부터 지역민들이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며 영남루 아래 죽림(竹林) 속에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당 내에 있는 영정 그림은 이당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것이며, 아랑 제향은 매년 밀양아리랑 축제 행사를 통하여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祭官)이 되어 음력 4월 16일에 제(祭)를 올리고 있다고 전 한다.
< 아랑사 내에 있는 "아랑" 영정 >
이 아랑사 옆 쪽문을 통과하여 대나무 숲으로 조금 올라가면 아랑 낭자가 피살된 장소가 나타나는데, 그 장소에는 간단하게 철조망으로 둘레를 만들어진 중앙에 "아랑유지(阿娘遺址)" 라고 쓴 비각 한기가 외롭게 서 있다.
< 아랑낭자가 피살된 "아랑유지" 터 >
< "아랑유지비" 가 세워진 내역 >
2, 무봉사
아랑사에서 영남루 뒤문 방향으로 올라와 바로 우측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무봉사(舞鳳寺)" 를 알리는 안내판 따라 조금 올라가면 무봉사 "일주문(一柱門)" 에 도착하여 진다.
< "무봉사" 로 들어가는 일주문 >
일주문에서 돌계단 따라 조금 올라가면 "무량문(無量門)" 에 도착하여 지는데, 이 무량문은 다른 사찰에서 사천왕문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지 양쪽 대문에 사천왕상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 대문에 사천왕상 그림을 그려놓은 "무랑문" >
이 무량문을 통과하여 비탈면 따라 만들어진 몇 개의 돌계단으로 올라서면 무봉사 본찰인 "대웅전(大雄殿)" 건물에 도착하여 지는데, 무봉사는 산의 비탈면 따라 건립되어지다 보니 아주 좁은 마당을 확보하고 있다.
< 좁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무봉사 "대웅전" >
그래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서 밀양강을 내려다 보면,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반사되는 물 빛이 실루엣 같이 아름답기 그지 없는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무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양산 통도사 말사로써, 신라 혜공왕 9년(773년)에 법조(法照) 대사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 부속 암자로 세운 것인데, 고려 공민왕 8년(1359년)에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자 이 암자를 무봉사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에 혜징(慧澄) 스님이 새로 짓고, 1899년도 경봉(慶蓬) 스님이 중건했으며 1942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사찰이라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493호인 "석조여래좌상" 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0.97m 이며 네모난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다.
<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光背)는 2줄의 볼록한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고, 그 안에 덩쿨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겨 넣고 있다.
광배 바깥 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광배 앞면에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를 조각하였는데, 전반적으로 단정하고 양감있는 신체 표현, 간략하게 표햔한 옷주름, 화려하고 복잡하게 마들어진 광배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고 기술되어 있다.
<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석탑" >
< 무봉사에 있었던 "태극나비" 전설 >
3, 박시춘 생가
무봉사를 벗어나서 다시 영남루 뒤편으로 내려오면 "박시춘 생가(朴是春 生家)" 가 있다는 안내문과 함께 생가 입구에 도착하여 진다.
< "박시춘" 생가 터를 알리는 입석 >
입구로 조금 올라가면 박시춘씨 대표 작곡 "애수의 소야곡" 노래 가사와 악보가 그려진 비석과 함께 박시춘씨 동상이 서 있는데, 비석에 부착되어 있는 스피커를 통하여 그의 대표곡 노래가 연속적으로 잔잔하게 울려 펴진다.
< "박시춘" 생가로 올라가는 입구 >
< "애수의 소야곡" 노래 악보 >
< 박시춘 선생님의 "동상" >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가 삼칸의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 초가 집이 박시춘씨가 어릴 적에 생활하였다는 집이라고 하지만 구조가 너무나 단촐하면서 아무 것도 진열하고 있지 않아, 왜 이곳에 생가 터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어떻한 설명이나 해설 하나도 기록하지 없는 무풍지대의 생가이다.
< 매우 단촐한 "박시춘 생가" 건물 >
지방자치 단체에서 이왕 경비를 투자하여 생가 터를 만들었다면, 박시춘씨 성장기 인생이나 음반이라도 조금 수집하여 최소한의 볼거리 관광지로 활용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초가집 뒤편에 있는 정자에 앉아 스피커에서 흘려 퍼지는 노래에 심취하여 본다.
< 생가 뒤편에 있는 "정자" 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
고(故) 박시춘씨는 1913년 이곳 밀양에서 탄생하여 14살 부터 유랑극장 순회 공연단 따라 다니면서 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특히 기타 솜씨가 탁월하였다고 한다.
그 후 20대 중반에 박시춘씨는 작곡가로 데뷔하여 1938년도 남인수씨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하여 작곡가로써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으며, 남인수씨 역시 데뷔 곡(曲)이자 출세의 곡으로 일약 대스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애수의 소야곡 노래는 이별의 회한과 더불어 나라 잃은 슬픔을 비유하고 있기도 하는데, 남인수씨의 독특한 음색과 창법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노래이다.
1940년에는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를 발표하였고, 1948년도 가거라 삼팔선 및 고향초, 1949년도 신라의 달밤, 고향만리,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을 만들어서 희트 시켰다.
6.25 전쟁이 발생한 1950년도에는 님계신 전선, 전우야 잘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봄날은 간다 등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곡(曲)을 많이 만들어 대중적인 작곡가로 성장하게 되어진다.
특히 백설희씨를 일약 스타로 만든 봄날은 간다, 아메리카 타운, 물새우는 강언덕을 부르게 하였으며, 1950년도 후반에는 영화사를 설립하여 딸 칠형제, 가는봄 오는봄 등 직접 영화를 제작하고 주제가도 희트하게 만든다.
1960년도 중반 이미자씨의 벽오동 심은 뜻은, 오기택씨의 우중의 여인 등을 끝으로 1965년 부터 창작 활동을 중단하였다고 하는데, 1930년대 말 부터 1960년대 까지 약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의 대중가요를 작곡하여 수 많은 희트곡을 창작한 근대 한국 가요사에서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하였다.
1996년 84세로 타계하였는데, 선생님은 작사가 반야월, 가수 이난영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 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 박시춘 생가 정원에 있는 "살구 열매" 를 먹어 보면서 >
이렇게 불멸의 작곡가 박시춘씨가 이곳 밀양에서 탄생하였지만, 그의 생가 모습이 너무나 초라함에 비애(悲哀)를 가지면서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하여 영남루를 떠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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