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대구)

대구의 동쪽 관문 망우공원 내에 있는 "영남 제일관, 임란 의병관, 광복회관" 돌아보고서.

용암2000 2014. 2. 20. 20:44

2014년 2월 7일 (금요일)

 

오늘은 경북의 동쪽 방향에서 대구시내로 들어오는 입구 망우공원과 공원 내에 산재하고 있는 영남 제일관 및 임란 의병관, 광복회관 등 대구의 역사적인 유적지를 관람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1. 영남 제일관. 

대구시 동구(東區)를 가로 질려 흘려가는 금호강의 강변 따라 "동촌유원지" 라는 시민의 휴식처와 더불어, 유원지 상류 지역으로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홍의장군을 기리기 위한 "망우공원(忘憂公園)" 이 자리하고 있다.

 

< "망우공원" 을 표시하는 입석 >

 

또한 망우공원의 중간지점으로 경상북도 동쪽 지역에 거주하는 포항, 경주, 영천 방향의 사람들이 들나드는 관문 "영남 제일관(嶺南 第一關)" 이 높게 자리하고 있는데, 대구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반겨주는 관문이 되어진다.

 

< 대구로 들어오는 관문 위에 있는 "영남 제일관" 전면 >

 

< 영남 제일관 전면에 붙어있는 "현판" >

 

이 영남 제일관은 조선 선조 23년(1590년)에 대구의 중심 지역으로 읍성(邑城)이 처음 만들어 질 때,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토성이 허물어진 뒤 영조12년(1736년) 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石城)으로 만들었다,

이 때 성에는 동서남북 4곳으로 정문을 두었는데, 동쪽에는 진동문(鎭東門), 서쪽에는 달서문(達西門), 남쪽에는 영남 제일관(嶺南 第一關), 북쪽에는 공북문(拱北門)이라고 하는 성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구시의 팽창으로 1906년 읍성이 철거할 때 성문도 함께 철거가 되어지는데, 이 영남 제일관은 1980년 망우공원 내에 있는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건한 것으로 형태는 처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규모 면에서는 다소 크게 건축하였다고 한다.

인터불고 호텔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서 비탈면 따라 조금 올라가면 바로 영남 제일관에 도착하여 지는데, 계단을 통하여 관문 방향으로 올라가면 왼편에는 망우공원의 조감도가 서 있으며 오른편에는 준공 기념비와 더불어 2기의 비석이 서 있다.

 

< "망우공원" 을 나타내는 조감도 >

 

< 영남 제일관 후면 앞에 있는 "준공 기념비" >

 

왼편의 비석은 대구 유형문화재 제5호 "대구부수성비(大邱府修城碑)" 인데, 이 수성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金世鎬) 선생님이 경상감영의 성(城)을 대대적으로 보수 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그 옆으로 대구 유형문화재 제4호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 가 서 있는데, 이 축성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閔應洙) 선생님이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석성으로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 과정을 기록하여 영조13년(1737년)에 세운 비석이다.

 

< 영남 제일관 후면 앞에 있는 "대구부수성비와 영영축성비" >

 

그 당시 대구읍성의 크기는 둘레가 총 2.124보(步)이며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화살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하는 담이 819첩(堞)이나 되고, 성의 높이가 서남쪽에는 18척(尺) 남북쪽이 17척이며 뒤 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級)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일단의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영남 제일관의 성문 입구에 도착하여 지는데, 성문 입구에는 밀납으로 만든 병졸이 문의 좌우와 건물 앞뒤에 각각 3명씩 서서 검문하므로 대구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호패(號牌)를 제출하고 통과하여야 한다.

 

< 계단을 올라가면 만나는 "영남 제일관" 후면 >

 

그러고 나서 양쪽으로 만들어져 있는 계단을 통하여 관문의 2층으로 올라가면 관문의 중앙 지점에 대구읍성의 모형도가 만들어져 있는데, 꼬마 전구로 위치를 가르켜 주는 스위치 버턴을 눌리면서 옛 대구읍성과 현재의 시내 위치를 비교 공부하여 본다.

 

< 관문 2층에 있는 "대구읍성 모형도" >

 

이어 금호강이 흘려 내려가는 동쪽 방향을 구경하기 위하여 성문 난간에 서면, 우측으로 대구의 상징인 인터불고 호텔 건물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앞으로 금호강과 더불어 고층 아파트가 시야를 가리고 있다.

 

< 관문 2층에서 내려 보는 "금호강" 전경 >

 

2. 임란 의병관.

영남 제일관에서 금호강 하류 방향이 있는 망우공원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동대구 IC 에서 대구시내로 들어오는 10차선 메인(Main) 도로 위로 건립된 구름다리를 건너가면, 공원의 정점에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아래에는 영남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직한 315명의 영령을 봉안한 충의탑이 서 있다.

 

< 동대구 IC 에서 대구시내로 들어오는 10차선 "도로" >

 

<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 동상 >

 

< 315명의 위령을 모시고 있는 "임란호국 영남충의탑" >

 

이 기념탑을 돌아서 내려가면 1998년 영남의 중심지 역활을 하고 있는 대구 망우공원 내에 "임란 의병관(壬亂 義兵館)" 이라는 1층 건물을 건립하였는데, 건물 내부에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과 동시에 영남의병에 관련된 자료 및 의병들이 사용한 유물, 무기, 서적, 문집, 기록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임란 의병관" 건물 전경 >

 

입구에 들어서서 안내원에게 충의단(忠義團)에 전시하고 있는 내용의 팜플렛 한장을 얻고 내부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먼저 임지왜란에 관련되는 내용이 일목요약하게 기술되어 있다.

 

< 의병관 입구에 있는 "의병장군 어록" >

 

임진왜란은 1592년 부터 1598년 까지 7년 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1592년 4월 13일 총 16만명의 왜군이 부산 앞 바다로 침입하여 14일 부산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후 큰 싸움 한번 치루지 않고 북으로 진격하여 문경새재에서 신립장군을 물리치고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채 두달도 안되면서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한다.

 

< 년도별 "임진왜란" 의 일지 >

 

이에 대항하여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영남에서 제일 먼저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특히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게 한다. 

그래서 1593년 1월 평양성 수복, 2월에 행주대첩 등 공세에 밀린 왜군은 남해안으로 다시 후퇴하여 4년 여 동안 강화회담을 진행하면서 철군 할려다가, 회담의 결렬로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켜 다시 침입하여 삼남(三南)을 유린하였다.

 

< '정유재란" 의 내역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그러나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장기전으로 돌입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죽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하여 1598년 11월 7년간의 전쟁이 종결 되어진다.

이렇게 한반도 국토를 초토화 시키면서 백성을 도륙되는 등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위기로 치닫는 것을 참지 못하여 각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펼쳐지는데.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전직관료나 선비출신이 주축으로 하여 크게 의병활동이 펼쳐진다.

망우당 곽재우 및 송암 김면 선생님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마자 이내 자신의 사재(私財)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수호하는데 신명(身命)을 바쳤으니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의병정신이 바로 이곳에 기록하고 있다.

 

< "영남지역 의병" 의 활약상 >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1593년 1월에 전국적으로 활동한 의병수는 약 22.000여명이며 이 중 경상좌우도의 의병수가 12.000명으로 전국 의병수 반이 넘었고, 영남의 의병은 낙동강 따라 침입하는 적을 막아 무기와 군량 등 군수물자의 전방 수송로를 차단하고 또한 곡창지대인 전라도 침공을 저지하여 전세를 역전 시키는데 크게 공헌한다.

전시장 내부에는 이러한 영남 의병들의 활동 내역을 하나 하나 기록한 서적과 유품 등을 진열하고 있으며, 또한 비디오와 더불어 디오라마(Diorama) 모형으로 만들어서 관람객들에게 쉽게 이해를 도우고 있다.

 

< 임진왜란에 관련하여 만들어진 "서적" >

 

<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사용한 칼과 유품 >

 

다른 한편으로 임진왜란 때 사용한 조선군과 왜군들이 사용한 무기를 비교 전시하고 있는데, 전쟁을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여 침입한 왜군의 무기와 대비하여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싸움에 임하는 우리 의병들의 무기가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왜군이 사용한 "의복과 병기" >

 

< 조선의병이 사용한 "의복과 병기" > 

 

특히 7년의 임진왜란을 꺽으면서 조선의 전후 인구를 살펴보면 왜군의 무차별 살육과 전염병의 만년 및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후 인구가 150만명으로 줄어들고, 토지가 약 50만평이 황폐화가 일어나므로 조선 초기에 비해 3분에 1도 채 안되록 감소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손실은 불국사, 경북궁을 위시하여 궁전과 더불어 대부분의 관아가 소실되고, 홍문관에 보관하고 있는 장서, 3개의 사고 및 각종 서적, 미술품 등 많은 문화재가 약탈 또는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왜적에게 포로로 끌려간 숫자가 자그만치 200.000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중 전후에 공식적으로 포로를 송환하여 온 숫자만 5.000여명이 넘고, 나머지 포로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서양의 노예로 팔려 가기도 하고 일본 전국에 노비로 팔려가는 비운의 나라가 되어진다고 한다.

정말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는 전시관이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도 힘을 키워야 하겠다는 오기를 발동하게 만드는 임란 의병관이 되어진다.

  

3. 광복회관.

임란 의병관 앞에 높은 탑이 서 있어 도로를 건너 그 방향으로 들어가보면, 출입문에는 "광복회관(光復會館)" 이라는 초석과 더불어 수십개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높이 45m "항일독립운동기념탑(抗日獨立運動記念塔)" 이 높게 서 있다.

 

<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을 알리는 안내석 > 

 

이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2006년 6월 15일에 건립한 탑으로 향토 출신 약 2.000여 명의 구국지사들에게 신명을 바치고, 독립운동의 역정(歷程)을 헤아리면서 선열들의 높은 뜻을 추모하며 그 유지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나아갈 징표로 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가 45m로 한 것은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억하기 위함과 동시에 탑신이 동쪽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데, 중간 다이아몬드 형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 같이 강인한 정신과 더불어 불굴의 의지를 표현 한다고 한다. 

 

< 높이 45m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전경 >

 

< 항일독립운동기념탑 뒤편에 있는 2.000여명의 "명각대" >

 

이 기념탑 뒤편으로 돌아가면 2층의 광복회관 건물을 만나는데, 이 광복회관 건물 입구에는 일제강점기에 중국, 만주 등에서 항일민족운동을 펼친 동암 "서상일(徐相日)" 선생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광복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조양회관" >

 

< 조양회관을 건립한 "서상일" 선생님 동상 >

 

광복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대구 달성공원 앞에 1922년 애국지사 서상일 선생님이 "아침 해가 비치는 곳" 이라는 뜻을 가진 "조양회관(朝陽會館)" 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하였다.

한 때 대구 원화여교 교실로 사용하였으나 학교의 이전으로 1987년 대구시가 매입하여 이곳으로 이전 및 복원하였는데, 이 건물은 한국에 있는 등록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 한국 등록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조양회관" 현판 >

 

건물 입구로 들어서니 광복회관에서 근무하는 안내 선생님 한분이 친절하게 인사를 하면서, 나를 전시실 곳곳으로 안내하면서 한자(漢字)를 알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드신 분 같다고 하면서 혼자 천천히 내용을 읽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1층과 2층을 안내하면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나서 자리를 비켜준다.   

먼저 건물 중앙을 관통하는 복도 뒤편에 있는 "대구경북 독립운동 전시실" 로 들어가는데,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활동하신 독립 애국지사의 사진과 더불어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살피면서 독립에 대한 정신을 고취시켜 본다.

 

< 광복회관 1층에 있는 "전시실" 현판 >

 

< 전시실 내부에 있는 3분의 "민족정기" 내역 >

 

한국에서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신 백범 김구(金九), 도산 안창호(安昌浩), 안중근(安重根) 열사 및 매헌 윤봉길(尹奉吉)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에서 부터 대구 및 경북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심산 김창숙(金昌淑), 위암 장지연(張志淵), 동암 서상일(徐相日), 나의 모교 고등학교 출신 김태연(金兌練) 부자 등 한국 광복군 활동상을 일목요약하게 볼 수가 있다.

 

< "태극기" 의 설명서 >

 

<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일대기 >

 

< 매헌 "윤봉길" 의사의 내역 >

 

< 위암 "장지연" 선생님의 활약상 >

 

< 경북 성주 출신의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활동 내역 >

 

< 동암 "서상일" 선생님의 행적 >

 

< 대구 계성고등학교 출신 "김태연" 부자 활약상 >

 

< "한국 광복군" 의 주요 역활 >

 

< 대구 및 경북 지역의 "여성" 운동가 >

 

< 기타 "독립유공자" 선생님 내역 >

 

2층으로 올라가면 강당으로 사용하는 넓은 중앙 Hall 가장자리 주변으로 일본놈들이 한국에서 저질어 놓은 만행의 사진들이 전시하고 있는데, 사진의 내용들이 눈으로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잔인무도(殘忍無道)하여 말로써 표현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 2층 강당으로 사용하는 주변으로 전시하고 있는 "사진전" >

 

< 한국 최초로 사용한 "태극기" 설명서 >

 

정말 이렇게 비극적인 희생으로 획득한 한반도의 평화가 다시 저 무도한 공산당으로 인하여 2개의 땅으로 분열되는 아품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8.15 광복의 실상도 망각하면서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많은 반성의 장소가 되어진다.

오늘 내가 대구에 거주하면서도 이웃하게 있는 광복회관을 살아생전 처음으로 방문하고 나니, 내가 왜 이렇게 한민족의 얼과 혼(魂)을 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이 일어난다. 

나는 정말로 병신 같은 삶을 살아가는 식충이 같은 인생인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