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일.(토요일)
오늘은 한국민들에게 최대의 즐거움을 주는 민속 설날 년휴를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았다가, 다시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는 명절 다음 날이 된다.
많은 차량들이 이동할 것이라는 예측으로 인하여 오늘도 가까운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서부 경남 의령군 및 창령군에 위치하고 있는 "곽재우(郭再祐)" 생가와 더불어 그의 흔적이 살아있는 망우정, 예연서원, 무덤 등 그의 발자취 따라 방문하여 보는 하루로 계획하여 본다.
1. 곽재우 의병장 생가 방문.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현풍 Toll gate에서 내려 인접하게 있는 달성2차 산업단지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낙동강변 따라 조금 내려가면, 창령군 이방면사무소에 이르고 연이어 직포교를 만난다.
이 직포교 다리를 건너면 바로 의병의 고장 의령군으로 들어가는 20번 지방국도 따라 조그마한 야산을 넘어 의령군 유곡면으로 들어가 곽재우 의병장 생가를 가르키는 이정표 따라 세간리 마을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야산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거대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높게 솟아 있는데, 앙상한 줄기가 뻗어 있는 은행나무도 기나긴 겨울잠 속에 머물다가 새로운 봄을 맞지하기 위하여 치장을 하는 듯 하다.
< 곽재우 생가 앞에 있는 수령 500년 "은행나무" >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은행나무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21m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10.3m로써 밑둥에서 2m 부터 가지가 뻗어 나가는 모습이 대단히 웅장하면서도 고목의 년륜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남쪽으로 뻗어있는 나무 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돌기가 여인의 유방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으로 빨면 많은 젖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남쪽으로 뻗어 나간 가지 끝에 "유방" 같이 돌출한 돌기 >
이 은행나무 뒤편으로 곽재우 장군의 생가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을 만나는데, 이 생가는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맨 먼저 민중의병(民衆義兵)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곽재우 의병장의 삶과 더불어 일대기를 살펴보면 장군의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字)는 계수(季綏)로 호가 망우당(忘憂堂)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로써,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공의 셋째 아들로 남명 조식 선생의 외손서(外孫壻)이다.
명종 7년(1552년) 8월 28일 곽재우 장군의 생가가 되는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는 외가집에서 탄생하였고, 선조 18년(1585년) 별시 과거에 급제했으나 글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뒤늦게 파방을 당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기강(岐江)변 돈지에 자그마한 강사(江舍)를 지어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가 되는 4월 22일 장군을 비롯한 17명의 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家財)를 털어 병기와 군량을 마련하여 수천의 민중의병을 거느리고 경남의 중서부로 진격하는 왜적을 섬멸하였으며 기강진, 정암진, 현풍, 창녕, 영산, 진주까지 출병하여 연전 연승의 전공을 세웠다.
신출귀몰한 유격전과 위계에 의한 기습 공격으로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언제나 붉은 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는 뜻을 가진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이라고 불렀다.
전란이 끝나고 나서 유곡 도찰방, 조방장, 성주목사를 지냈으며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 경상우도 조방장에 승차하였고, 영창대군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린 뒤 낙향하였다.
그 뒤 경상도 병마 절도사, 수군 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부총관, 한성 부좌윤, 함경도 관찰사를 잠시 역임하였으나, 당쟁이 극심하고 민심이 불안한 정국이라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낙동강변에 망우정(忘憂亭)을 지어 은둔 생활을 하다가 광해군(1617년) 떄 65세의 나이로 서거하셨다.
활달한 필체에 시문에도 능하여 그의 문집 "망우당집" 을 남겨 셨으며, 장군의 체취가 배어있는 큰 칼 등 유물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받아 의령군에 있는 "충익사(忠翼祠)" 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이곳 생가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지로써 전형적인 구조를 본 따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 등으로 구성된 반가로 2005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대문 문칸채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으며 대문 문칸채의 안쪽 또 다른 대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시 넓은 마당과 함께 안채 건물을 만난다.
< 곽재우 생가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 솟을대문 안에 있는 "사랑채" >
< 대문 문칸채에서 "안채" 로 들어가는 2중 출입문을 가진 건축물 >
이 안채 건물은 대나무 숲이 병풍과 같이 둘려쳐 있는 뒤산을 배경으로 왼편에는 큰 곳간과 더불어 변소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편으로 작은 곳간과 더불어 우물 및 장독대가 놓여 있고, 그 장독대와 우물 사이로 별채로 들어가는 또 다른 담장으로 구획하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 넓은 마당 중앙에 있는 "안채" 모습 >
< 안채의 왼편에 있는 "큰 곡간" >
< 안채 오른편에 있는 "작은 곳간과 우물" >
< 안채의 오른편에 있는 "장독대" >
옛날 별당 아가씨들이 거주하는 별채에도 별도의 화장실 건물과 더불어 독립된 공간을 유지하므로써, 외부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 되는 옛 사대부 집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 여인들이 기거하는 "별당" >
< 별당 건물에 딸린 "화장실" >
2. 망우정.
승용차를 다시 운전하여 낙동강 박진교를 건너 지방도로 따라 남지읍을 통과하여 낙동강 둑방길 따라 조금 내려가서 경남 창령군 도천면 우강리 932번지 옛날 창암진 나룻터 인근에 있는 망우정(忘憂亭)에 도착하는데, 이곳 망우정은 곽재우 장군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말년에 시(詩)와 문(文)을 쓰면서 여유로운 삶을 가진 장소이라고 한다.
< "망우정" 을 가르키는 도로 표시판 >
곽재우 장군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 방어사가 되어 왜병을 물리쳤으며, 그 해 계모가 세상을 떠나자 경상북도 울진으로 가서 바깥 출입을 삼가하면서 3년 상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여러 차례 많은 벼슬을 하사 하였으나 조정의 혼탁과 세상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이곳 망우정으로 내려와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하므로 망우당집을 집필한 곳이다.
현재 망우정으로 들어가는 정식 길이 없어지고 몇 단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동산을 넘어서 망우정 뒤편으로 들어가는데, 동산의 정점에 올라가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앞으로 낙동강이 흘려가고 있으며 그 앞으로 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장소이다.
< 망우정 동산 위에 있는 "느티나무" >
<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 >
이 동산 정점에 한 그루의 느티나무와 함께 곽재우 의병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고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조 13년(1789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워져 있는데, 이 유허비는 높이가 180Cm에 너비가 70Cm이다.
< 곽재우 의병장군을 공적을 기리는 "유허비" >
특히 유허비를 받치고 있는 기초석은 일반적으로 한마리 거북이 등에 세워지는데, 여기에서 사용한 거북이는 4개의 다리도 없고 얼굴 모습도 거북이 보다는 사람 모습과 유사하게 만들어져 있어 매우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 유허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 모습 >
이 유허비 앞에 망우정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정자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관리가 되지않아 억망으로 방치하고 있으며 정자 오른편으로 만들어져 있는 대문이 허름하게 잠겨져 있어 어찌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 본다.
< 관리가 거의 되지않고 있는 "망우정" >
망우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어진 독채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마 밑으로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흥현정(興賢亭)이라는 2개의 현판이 나란하게 붙어있고 왼편 대청마루 위에 곽재우 의병장 이야기를 설명한 안내 현편도 겸하여 붙어있다.
< 건물 처마에 붙어있는 망우정 "현판" >
< 또 다른 현판 "흥현정" >
< 대청마루 위에 붙어있는 "설명문" >
망우정 마루에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어 마루에 앉아 휴식을 가지면서 옛 선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전연 불가능 하고, 또한 망우정 담장 앞으로 무분별하게 자란 대나무 숲이 낙동강 방향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하므로 옛 곽재우 의뱡장이 살면서 문집을 집필한 공간으로는 너무나 차별화가 일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 망우정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대나무" 숲 >
< 망우정의 유일한 부속 건물로써 담장 밖에 있는 "변소" >
다시 임시로 만들어진 대문을 잠그고 뒤편 동산으로 올라와 망우정을 떠나는데, 지방자치단체에서나 문중에서 너무나 무성의 하게 관리 함에 분통이 일어나는 유적지가 된다.
아울러 남지읍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망우정이 있다는 사실도 전연 모르고 있으며, 차량 네비게이션에서도 위치가 전연 검색 되지 않아 길을 찾는데 얼마나 많이 뺑뺑이를 돌면서 시간을 허비하므로 마음 고생이 너무나 큰 유적지이다.
3. 예연서원.
승용차를 몰고 국도 5호선을 이용하여 창령군 영산읍과 창령읍을 통과하여 대구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달성군 유가면에서 달창 저수지 방향으로 들어가니, 저주지 끝지점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 있다는 입간판을 만난다.
< 달창 저수지 끝지점에 있는 "예연서원" 을 가르키는 안내판 >
안내길 따라 2-3분 정도 운전하여 들어가면 아담한 가내리 마을에 도착하면서 마을 입구에 400년 수령을 가진 고목의 느티나무 한 그루와 더불어 신도비를 보호하는 비각 건물을 만난다.
< 수령 약 400년의 "느티나무" >
< 느티나무와 함께 하는 "신도비 비각" 건물 >
느티나무 아래에 주차하고 먼저 마을 풍경을 구경하여 보는데, 앞으로 넓은 들판과 더불어 달창 저수지 일부분이 보이고 있으며 마을 뒤편은 병풍과 같이 둘려쳐 있는 비슬산 지맥(枝脈)의 산맥이 내려와 좌측과 우측으로 능선을 형성하면서 길게 연결하는 금계포란형의 지형으로 매우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마을이다.
< 마을에서 바라보는 "달창 저수지" 전경 >
마을 입구에 있는 비각 건물 내에 2개의 신도비가 나란하게 모셔져 있는데, 한개의 신도비는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충익공 곽재우 장군의 비석이다.
그 옆 신도비는 일본군들이 재 정비하여 대량으로 다시 침입한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을 지키다가 순직한 곽재우 장군의 재종숙 충렬공 "곽준(郭遵)"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라고 안내문이 붙어있다.
< "신도비"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설명문 >
마을 안길 따라 조금 들어가면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와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은행나무도 300년의 수령을 가진 고목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 마을 정자와 함께 하는 "은행나무" >
이 은행나무 뒤편으로 돌아가면 바로 예연서원으로 들어가는 계단 아래에 도착하는데, 이 예연서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님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기 위하여 광해군 10년(1618년)에 솔례동(率禮洞) 즉 지금의 대리(大里)에 충현사를 처음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예연서원" 으로 들어가는 계단 >
현종 15년(1674년)에 세워진 예연서원은 충익공 곽재우 장군과 충렬공 곽준 선생님을 모시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숙종 3년(1677년)에 "예연(禮淵)" 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숙종 41년(171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지만,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진 서원이다.
일제 강점기의 1920년 경 유림에 의해 다시 세웠으나 6.25 전쟁 때 사당과 강당이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전사청과 장판각 건물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2년에 문화재 관리국의 후원과 지방 유림의 성금으로 다시 사당과 강당을 건립하였지만, 서원의 교육기간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동재와 서재 건문을 건축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6.25 동란으로 불타 없어진 건물들은 1977년과 1984년 두번에 걸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다고 한다.
높은 계단 위에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숭의문(崇義門)을 통과하여 아담한 마당으로 들어가면, 일단의 계단 위에 포산 곽씨의 문중에서 경영하는 강당 건물 "경의당(景義堂)" 을 만난다.
< 예연서원의 외삼문 "숭의문" >
건물에는 새들의 출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거물망으로 쳐 있어 내부 관람이 다소 성가시게 하지만, 그래도 방문객이 적은 겨울철 건물을 관리하는데 매우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된다.
< 예연서원의 강당구역 "경의당" 건물 >
< 건물 대청마루 위에 붙어있는 "경의당" 현판 >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서 다시 층층 계단으로 올라가 내삼문의 충의문(忠義門)을 통과하면, 충익공 곽재우와 충렬공 곽준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사당이 되는 "충현사(忠賢祀)" 가 자리잡고 있다.
< 향사 영역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충의문" >
이곳 사당에도 입구에 있는 충의문이 열려 있어 마당까지 들어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현사 문은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여 만든다.
< 선영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현사" >
다시 경의당으로 내려와 사당 오른편 쪽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제례(祭禮) 음식을 만드는 전사청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전사청 건물 오른편으로 장판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장판각 건물에는 곽준 선생님이 집필한 "실기(實記)" 를 경판에 새겨 보관하고 있으나, 여기에도 굳게 잠긴 문으로 인하여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여 다소 아쉬움이 발생하게 만든다.
< 강당에서 전사청으로 들어가는 "쪽문" >
<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 >
< "실기" 경판을 보관하고 장판각 >
예연서원을 떠나 다시 마을로 내려오다가 예연서원 좌측편으로 또 다른 솟을대문과 함께 대궐 같은 기와집이 보이므로 그 곳으로 들어가 보니 계단 입구에 "경충재(景忠齋)" 라는 안내문과 함께 대문이 잠겨져 있는데, 안내문에는 임진왜란 때 충익공(忠翼公) 곽재우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어진 "재사(齋舍)" 장 건물이라고 한다.
< 매우 어수선한 "경춘재" 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
경춘재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18년에 건립되었으며 1992년에 전면 보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솟을대문을 통과하면 여기도 넓은 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 "경춘재" 건물 전경 >
그런데 이 경춘재로 들어가는 출입문 주변에 아직도 작년에 자란 잡풀들이 무성하게 방치하고 있으므로, 건물 내부와 주변 관리가 전연되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발생하는 건물이다.
4. 곽재우 의병장 무덤.
승용차를 이용하여 달성2차 산업단지로 다시 들어가 낙동강변 따라 곽재우 생가가 있는 의령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왼편 야산 기슭에 현풍 곽씨의 문중 산소를 만나는데, 그 산소의 중심지에 곽재우 장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문중 묘역은 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선생의 증조부 "위(瑋)" 로 부터 5대에 걸친 선영 묘지이다.
< "현풍곽씨" 의 문중 묘소 >
묘지 입구에 새로운 입간판이 붙어있어 그 내용을 정독하여 보면, 충익공이 임종 할 즈음 "나를 예장(禮葬)하지 말라, 왜란 때 선왕의 두 능(陵)이 무너지고 불탔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묘의 봉분을 쌓겠는가, 내가 죽거던 구덩이에 묻기만 하여라" 라고 유언하므로 충익공 묘는 1617년 봉분도 없이 평장(平葬)으로 매장하였다고 한다.
그로 부터 114년이 지난 영조 7년(1731년) 한음 이덕형의 후예 현풍현감 "이우인(李友仁)" 이 충익공의 묘소를 참배한 후, 실묘가 염려된다고 하면서 유림의 학자들을 설득하여 충익공의 뜻을 받들어 봉분을 낮게 쌓았다고 한다.
< 낮은 본봉을 하고 있는 "곽재우" 무덤 >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받는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로 부터 비문을, 좌의정 조문면(趙文命)으로 부터는 글씨를 받아 역시 충익공의 유언을 존중하여 1732년 소박한 장식의 조그마한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아울어 충익공 묘소에는 정부이 되시는 "상산김씨(商山金氏)" 와 합장으로 되어진 묘(墓)이다.
< 부인 "상산김씨" 합장하고 있다는 비석 >
이래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남 창령 및 의령군 주변에는 충익공의 생가와 불천위 사우(祠宇) 및 예연서원 등이 함께하고 있는 곽재우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고장이 된다.
5. 기타. (대구 망우공원)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대구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동촌 강변 유원지 옆 동산에 곽재우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만든 "망우공원" 이 자리하고 있는데, 많은 대구시민이 휴식처가 된다.
< 경부고속도로에서 "대구" 로 들어오는 관문 금호강에 있는 화랑교 다리 >
< 동촌 옆에 있는 "망우공원" 을 알리는 입석 >
이 망우당 공원 내에는 임진왜란 때 영남지역에서 장렬하게 싸운 의병들의 전적을 기리기 위한 "임란호국영남충의단" 이라는 전시관과 더불어 공원의 야외 정점에 일본 방향으로 바라보면서 호령하고 있는 거대한 "곽재우" 장군 동상이 우툭 서 있다.
<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 "곽재우" 동상 >
또한 의병의 고장 경남 의령군에도 임진왜란과 의병에 관련되는 박물관 및 전적지 등 곽재우에 대한 자료가 많이 있지만 당일로 모두 관람이 불가능하여, 차차 시차를 두고 방문 후 기술하고자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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