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대구)

70년 대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학생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계산동 골목" 투어.

용암2000 2013. 2. 5. 19:53

2013년 2월 2일.(토요일)

 

오늘도 별일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Wife가 대구시내 구경과 더불어 몇 10년 만에 데이트도 겸하면서 "레미제라불" 영화 한편이나 보자는 요청에 따라 집을 나선다.

나의 집이 있는 남도초등학교 앞에서 극장들이 있는 중앙통으로 가는 길은 삼각로타리를 통과하는데, 계명대 4거리에서 부터 차로(車路)로 걷는 것 보다는 경북공업고등학교 뒤편 조용한 골목길 따라 걷다 보면 제10교구 성당 "성모당" 이 나타나므로 방문하여 본다.

 

1, 성모당(聖母堂).

1918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완성한 대구 성모당은 프랑스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 가브(Gave) 강가에 있는 '루르드의 성모'  동굴과 크기는 물론 바위 모양까지 똑 같다고 한다.

교구청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성모당 건물은 북향으로 배치하고 있는 붉은 건물인데, 외부로는 벽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굴 내부는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고 그 건물 앞으로 넓은 잔디광장을 두고 있다.

 

< "성모당"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성모당" 방향을 알리는 표시석 >

 

기념 돌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 께서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은 루르드의 성모기념 동굴을 모방하였는데,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져 있고 성모당을 바라보며 오른쪽 상단에 "마리아" 상을 모시고 있다.

성모당은 루르드의 성모님이 15세 소녀 "베르나데트" 에게 18번이나 발현 했던 그 모습 그대로 머리에는 흰 수건을 썼고, 청색 띠를 띠었으며 손은 합장하고 팔에는 은알(묵주)이 드리워 졌고 벗은 양발 위에 해당화가 피어있다고 한다.성모당은 전국 천주교 신자들이 가장 즐겨찾은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의 시선한 행사와 종교 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국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성당으로써, 대구 유형문화재 재29호로 지정되어진 성당이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 1918" 에서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한 년도이고,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나님에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르킨다고 한다.

아울러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 이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 "성모당 전면" 위에 붙어있는 글씨 > 

정문을 통과하여 성당 건물 앞으로 올라가면 먼저 넓은 마당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휴식용 벤치에 앉아 미사를 올리는 사람과 더불어 앙상한 나무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빙돌아 서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이곳은 종교의 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 분만하게 미사를 집행하는 것이 특이하다.

 

< 야외 미사를 집도하고 있는 "신부" >

 

< 자유롭게 미사를 드리는 "신도" >

 

< 추운 겨울도 자연과 함께하는 "미사" 모습 >

 

 

2. 이상화(李相和) 고택 방문.

우리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詩)로서 너무나 유명한 "이상화" 선생님의 고택(故宅)을 찾아가기 위하여 성모당에서 시내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덕산 파출소 앞 계산 5거리 신호등 따라 건너면서 높은 "Miso-city"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아파트 뒤편으로 들어가면 대구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근대문화 골목투어" 를 안내하는 간이용 건물이 되는 계산예가 관광안내소(T. 053-661-3323)가 나타나면서 그 안내소 앞에 아담한 기와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기와집이 이상화 선생님의 고택이다.

 

 

 < "골목투어" 를 안내하는 이정표 >

 

< 계산예가 안내소 앞에 있는 "이상화" 생가 >

 

안내소에는 골목투어를 안내하는 봉사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예약팀이나 특별하게 해설을 요청하는 10명 이상의 팀에게 무료로 골목투어에 대한 해설을 담당하여 주는데, 마침 한 무리의 학생들이 해설을 경청하고 있어 같이 동참하여 본다.

 

 

<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단촐한 "이상화 생가" 전경 >

 

< "해설사" 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 >

 

이상화씨의 출생지는 이곳에서 조금 뒤편에 있는 중구 서문로 2가 11번에서 출생하였지만, 1936년 6월에 현재의 고택 자리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단촐한 집이며 마당에는 장독대와 Pumping용 우물이 있는데, 우물가에는 석류나무와 감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이 나무들은 이상화 시인이 살아 있을 때 심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방안에는 이상화 선생님의 일대기와 유품들이 진열하고 있고, 마당에는 이상화 선생님의 대표적인 시 3편을 대리석에 새겨 방문객들이 읽혀지게 만들고 있다.

 

 

< 마루에 진열하고 있는 "유품" >

 

 < 마당에 있는 대리석에 새겨진 "시비" 모습 >

 

이상화 시인은 1901년도 4월 5일 부친 "이서우" 씨와 어머니 "김신자" 씨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 낳는데, 1943년 4월 25일 향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므로 현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9번지의 가족묘소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3. 계산예가(桂山藝家)를 돌아보면서.

이상화 고댁의 뒤문으로 들어가면 계산예가의 건물이 나타나면서 건물은 대구의 역사를 Video로 설명하고 있는 영상관과 한옥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한옥에는 대구 근대 예술인들의 생활생과 더불어 대구 중구의 옛 풍경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 "계산예가" 로 들어가는 영상관 건물 >

 

< 영상관 내부에서 "조각 작품" 을 만들고 있는 예능인 >

 

 < 예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한옥" >

 

계산동과 남성로, 서성로, 남산동, 동산 일대는 20세기 초 한국 근대문화를 이끌었던 예술인들의 삶터와 활동상이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문화 유산의 보고이다.

한국 문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근대 서양음악의 기틀을 다진 김문보, 백태준, 현재명, 대구의 서양미술의 뿌리를 내린 이상정, 박명조, 서동진, 대구가 낳은 천재 화가 이인성 등은 거의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살았다고 한다.

 

 

< 대구가 배출한 "근대 인물" 의 일대기 >

 

이 계산예가는 이들의 삶을 살았던 사진과 그림, 작품들을 진열하고 있어 옛 향수를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 계산예가 내부에 진열하고 있는 "미술 작품" > 

 

< 나의 모교이며 당시 6년제로 1913년도 첫 졸업생을 배출한 "계성학고" 졸업식 모습 >

 

 

4. 서상돈(徐相燉) 고택의 방문.

이상화 고택 정문으로 나오면 정문 입구에 서상돈 고택도 나란하게 건립되어 있는데, 서상돈 선생님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1850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출생하여 9세 때 대구 새방골로 이사와 생활하기 시작한다.

 

 

< "서상돈" 고택을 알리는 안내문 >

 

< "서상돈" 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 >

 

18세 때 대구에서 빈손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크게 성공하여 갑부가 되면서 1897년 47세 때 계산동으로 이사와 많은 사회 활동을 전개하는데, 특히 천주교를 위하여 거액의 자금을 헌납하여 계산성당 등 전국 천주교 건물을 건립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특히 일제들의 수탈로 일본 제국주의로 부터 한국 정부가 1.300만 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므로 빚을 탕감하기 위하여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을 실시하여 대구가 제일 많은 돈을 각출하게 한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국권 회복을 위해 전국민이 단결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 모금운동이 되므로 후에 3.1 운동의 기틀을 만들게 한다.

이 밖에 대구에서 많은 학교를 건립하여 운영하므로써 문맹율(文盲率) 퇴출에 선도적 역활도 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독립 협회에도 가입하였는데,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3년 63세 나이로 별세한다.

 

 

< 서상돈 고택의 "안채" 건물 >

 

 

5. 한의학 박물관 탐방.

대구 약령시장은 조선시대 효종 9년(1658년)부터 이어오는 전국 3대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수백년 간 전국은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유럽 까지 한약재를 공급한 세계적 한약재 유통의 거점이고, 우리나라 한방을 대표하는 곳이다.

 

 

< "한의학 박물관" 입구에 있는 약령문 >

 

특히 이 약령시장 골목 중간지점에 한의학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 박물관은 약전골목의 삶과 체취를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전시문화 공간으로 400여 년 동안 내려오는 역사적인 약령시와 약전골목의 유래를 한 눈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 "한의학 박물관" 건물 전경 >

 

< 건물 입구에 있는 "약탕기" 모형 >

 

먼저 3층으로 올라가면 약령시 역사, 문화 Zone과 한의학 전시 Zone이 마련되어 있고, 2층으로 내려오면 한방 체험실과 한방 Well-Being 실로 구성되어 있다.

 

< 3층 전시실에서 설명하고 있는 "해설사" 모습 >

 

< 전시실 내부에 있는 "한약 제조" 모형도 >

 

< "한약재" 를 조제하는 모습 >

 

< 전시하고 있는 "한약 제조용" 용기 >

 

< 한방으로 사용하는 "동물" 표본 >

 

또한 2층은 한방족탕 체험, 한방 비누 만들기, 각종 제품 판매장, 다양한 약초들이 자라는 약초꽃 동산 등 부대시설을 만들져 있고, 약탕기에서 만든 한약을 바로 시음할 수 있는 공간과 더불어 휴식처를 잘 갖추고 있어 어린들의 천국이 되는 박물관이다.

 

< 즉석 "진맥" 이 가능한 상담실 >

 

< "인체" 의 모형도를 보면서 > 

 

< 한약재를 판매하는 "진열장" >

 

 < 즉석에서 "시음" 이 가능한 약탕기 >

 

6. 골목투어를 가지면서.

골목투어는 대구 중구에서 운영하는 해설사 따라 골목 구석구석을 동행하여 보는데, 처음에는 계산예가와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을 지나면서 약전 골목 방향으로 나아가면 한 고택과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이 고택과 그림이 "두사충(杜師忠)" 의 일대기를 요약한 그림이라고 한다.

 

< "두사충" 의 집과 담벼락 그림 >

 

두사충은 중국 명나라의 장수로써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기 위하여 이여송의 부하이면서 일급 참모로 이국 땅 조선 까지 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인물인데, 선조 임금은 그에게 대구의 중심부인 중앙공원 부지를 하사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자리에 경상감영이 내려오므로 대신 계산동으로 터를 제공하여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 뽕나무를 심어 고향에 두고 온 처 자식과 향수병을 잊기 위하여 농업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 "두사충" 의 일대기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이 두사충 집을 지나면서 약령시장 도로로 나아가면 대구 및 경북에서 제일 오래 된 "제일교회" 건물을 만나는데, 이 교회는 고종 32년(1895년)에 건립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33년도에 재건축하였다.

또한 시도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교회 종탑 건물에 있는 창문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어 아름다운 운치를 보여주고 있다.

 

<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제일교회" 모습 > 

 

특히 교회 내부에 예수님 그림이 있었는데, 화재로 인하여 주변 제자의 그림 까지 전부 불타고 없지만 예수님만 불에 타지않고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기적의 교회이라고 하는데, 일요일 예배시간에 방문하면 그림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이 교회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한의학 박물관" 이 나타나므로 내부로 들어가 설명과 더불어 많은 휴식시간을 가진다.

 

< 한가한 "약전골목" 거리 모습 >

 

이어 다시 약점골목으로 가로질러 현대백화점 뒤편으로 나오면서 벽화가 그려져 있는 집을 통과하면 길가에 많은 안내 표시들이 붙어있는데, 특히 이 길은 옛 선비들이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나타내는 안내도가 이색적이다.

 

< 현대백화점 뒤편에 있는 "골목투어" 길에서 만나는 벽화 그림 >

 

 < 옛 "영남대로" 를 걸어서 한양으로 가는데 요구하는 장소 >                     

                                                                                      

현대백화점 뒤편에서 동쪽 방향으로 조금 이동하면 "염매시장" 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나는데, 염매시장은 서민들이 이용하는 재래시장이 되므로 내부 구경도 겸하는 투어가 된다.

 

< 대구 "염매시장" 을 알리는 간판 >

 

< 활기가 떨어지면서 매우 한산한 "재래시장" 모습 >

 

시장을 통과하여 다시 약전골목으로 들어가면 진골목이라는 소로(少路)의 길로 들어가는데, 또한 이 길을 긴골목이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소로가 너무나 길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진골목" 을 알리는 안내 표시 >

 

이 길이 너무나 협소하여 두명이 겨우 비켜갈 수 있는 좁은 길로 연결되는데, 이 길은 "달성서씨(達城徐氏)" 들의 집성촌으로 대구 시내에서 내노라 하는 거부들이 살았던 골목으로써 좌우에는 100여 년이 지난 고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옛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골목이 된다.

 

 < 좁은 길을 가다가 "골목해설" 도 경청하면서 >

 

골목 길 따라 더 앞으로 전진하면 2층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 건물은 옛 대구의 명소이면서 유명한 정치가와 시인, 한양의 갑부 까지 찾았다는 "미도다방" 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벽에는 시인 "전상렬" 씨가 쓴 "미도다향(美都茶香)"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건물을 돌아서 2층 정문으로 올라가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하여 노인들이 모여 있는데, 30년 간 운영하고 있는 "정인숙" 다방 마담이 한복을 입고 건내주는 커피 한잔으로 오늘의 삶의 고개를 넘는다고 한다.

 

< 전상렬씨가 쓴 "미도다향" 이라는 시도 읽으면서 >

 

< 미도다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 >        

 

여기에서 한 블록을 더 건너 소로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대구에서 부자 중에 한명이 되는 "서병직" 씨가 1931년도에 지은 2층 건물이 나타나는데, 현재 이 건물은 1947년 정소아과 의원장 "정필수" 씨가 인수하여 병원으로 사용한 "정소아과의원" 집으로 마당에 심어진 고목들이 집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 이어지는 "진골목" 안내석 >

 

< 잘 가꾸어진 "정소아과의원" 정원 >

 

< 1931년도 건립한 "의원 건물" >

 

이 소아과 병원을 통과하면서 왼편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한 때 대구 "종로가구" 거리를 만나고, 다시 왼편으로 돌아서면 대구 화교초등학교 입구에 도착한다.

 

 < 대구 "화교초등학교" 입구 >

 

대구에서도 1905년 부터 경부선 철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화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한 때는 많은 화교들이 살고 있었지만 현재는 화교들이 많이 떠나가므로 겨우 명맥만 유지한다고 하는데,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좁은 마당 한 구석에 "장개석(蔣介石)" 총통 동상이 서 있다.

 

< "화교초등학교" 건물 전경 >

 

< 초등학교 운동장 끝에 있는 "장개석" 총통 동상 >

 

그 동상 옆으로 1920년 대 대구에서 제일 갑부로 통하는 "서병국" 씨의 2층 집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건물을 건축하는데 사용한 대리석과 벽돌이 당대의 최고의 고가품이라고 한다.

 

< 1920년 대 초 대구 최대 갑부 "서병국" 씨가 건립한 건물 >

 

초등학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가면 조금 전 잠겨진 대문으로 인하여 그냥 지나친 정소아과 집 건물 내부를 내려다 볼 수가 있는데, 정소아과의원 정원 숲을 감상 할 수 있다.

 

< 초등학교 2층 계단에서 바라보는 "정소아과의원" 내부 건물 > 

 

여기 화교초등학교를 끝으로 문화 해설이 종결 됨과 동시에 아쉬운 이별을 고하는데, 조금 전에 지나친 약전골목을 더 걸어보면서 약전골목의 서문 쪽으로 나와 계산성당 방향으로 길을 잡아본다.

 

< 약령시장 서쪽을 알리는 "서문" >

 

계산성당은 한국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이어 3번째가 되는 1902년 완공한 고딕식 서양 건축물로써 현재 사적 제290호로 지정된 건물인데, 주변의 높은 빌딩과 아파트 숲으로 자연미가 매우 떨어지는 사적지가 되었다.

 

< 대구를 대표하고 있는 "계산성당" 입구 >

 

< 계산성당의 안내문과 제 290호 사적 "표시비" >

 

< 높은 빌딩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계산성당" 옆면 >

 

계산성당은 한 때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는 곳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님이 결혼식을 올린 성당이기도 한데,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내부로 들어가지 못 함이 아쉽다.

계산성당을 나오면 도로 건너편 동산 위에 대구시가지에서 제일 큰 교회 중 하나가 되는 "대구제일교회(大邱第一敎會)" 가 자리하고 있는데, 높은 대리석 건물이 도시의 미(美)를 아름답게 만든다. 

 

 < 동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대구제일교회" > 

 

아, 대구 중구에도 구석구석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과 더불어 긴 골목이 형성하고 있는데, 골목투어가 가능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아침에 계획한 극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