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남쪽에는 해발 1084m 비슬산이 존재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해발 1192m 팔공산이 우뚝 솟아 있는 고산 사이에 넓은 분지를 형성하다 보니, 시민들이 아침에 일어나 눈만 뜨면 높은 산에서 뿜는 맑은 공기와 정기의 힘을 받고 삶의 터를 가꾸면서 살아가는 대구 사람의 자부심을 가질만큼 유명한 명산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이다.
특히 팔공산과 비슬산은 산세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수려한 산이라, 산의 곳곳에는 유명한 사찰과 더불어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를 품고 있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역사에서 반듯히 기록 되는 고려의 창건 역사를 말하는 태조 "왕건" 의 흔적이 팔공산과 비슬산 언저리에 많은 실화를 간직하고 있어, 대구 사람들은 어느 곳으로 여행하여도 왕건의 발자취를 대면하여 진다.
이 중에서 "왕건" 과 "견훤" 과의 싸움 "공산전투" 로 유명한 장소가 팔공산 지맥에 있는 "왕산" 산기슭에서 발생하는데, 그 싸움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 유적지" 가 지금은 대구 도심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한 아파트 숲 사이의 한 가장자리에 존재하다 보니 손쉽게 방문이 가능한 장소가 된다.
이렇게 신숭겸 유적지가 사람들의 접근이 매우 쉬운 곳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사진과 블로그를 통하여 소개하다 보니 눈에 익은 장소이지만, 지금까지 몇 번 방문하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지 않아 기록하지 못하다가 몇일 전 그곳을 방문하여 사진 몇 장을 찍었지만 그것도 차일피일하다가 늦게 등제하여 본다.
신숭겸은 "평산신씨(平山申氏)" 의 시조로써 신라말 전라도 곡성현에서 태어나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적으로 용맹 스러웠으며, 활을 잘 쏘고 무예가 탁월하여 매우 뛰어난 장수의 자질을 겸비한 장군이라고 한다.
장군은 서기 918년 6월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함께 후고구려를 개국한 폭군 "궁예" 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받들어서 "고려" 를 청건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태조왕 10년(927년)인 가을 장군은 왕건과 함께 신라를 치고 돌어가는 후백제 견훤을 팔공산 언저리에서 맞아 싸웠으나 후백제 군에게 포위되어 위기를 직면하는데, 이 때 절대 절명적 상황에 있는 왕건을 숨기고 자신이 왕건의 옷을 입고서 싸움하다가 이곳 왕산 기슭에서 김락 장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다
왕건은 단지 몇 명의 신하 도움을 받으면서 뒤편 왕산으로 피신하면서 밤새도록 걸어 대구 외곽지인 파군재와 반야월 및 안심 방향으로 돌아서, 대구 앞산에 숨어 들어가 "은적사" 와 "안일사" 및 "임휴사" 에서 잠시 머물면서 견훤의 동태를 살피면서 고령 방향으로 도주하여 합천에서 우군을 만나 기사회생하여 지는 절대위기를 꺽는다.
그 후 팔공산에서 전사한 신숭겸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는 후백제 군이 가져가 버리고 몸통만 수습하여 시신을 강원도 춘천시로 이장하여 묻게 하는데, 태조 왕건이 신숭겸의 머리와 동일한 크기의 황금으로 만들어서 매장하라는 지시로 황금 얼굴을 넣었다는 설이 있고 또한 도굴에 대비하는 특수 매장 방법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는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공산댐 아래 파군재 근교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위에는 높은 아파트 단지로 둘려 쌓여 있어 들어가는 출입구를 찾기가 다소 난이하다.
공산댐에서 내려오는 하천 따라 조금 올라가면 제방 옆에 주차장이 있으며, 그 제방 옆에서 한번 꺽어가면 유적지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만난다.
유적지를 감쌓고 있는 왕산은 몇년 전 산불로 인하여 정상 부위까지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을 형성하고 있어 유적지 경관을 많이 흐리게 하고 있지만, 아담한 왕산을 품고 있는 유적지는 출입문 내부에도 주차가 가능 할 정도의 넓은 터를 유지하고 있으며 유적지 입장료와 주차장 사용료가 무료이다.
< 벌거숭이 "왕산" 앞에 자리잡고 있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 전경 >
이렇게 대구시에서 무료로 개방하여도 유적지를 찾는 관광객은 매우 적고, 단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일부 주민들의 산책을 통하여 체력 단련장으로 전락되는 느낌이 발생하는 유적지로 절약하므로 다소 애석함이 묻어난다.
출입문 우측편으로 유적지에 대한 안내 설명서가 있으며 안내 설명서 뒤편으로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표현하는 홍살문이 서 있고 그 홍살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표충단" 이 나오는데, 이 표충단이 만들어진 장소가 신숭겸 장군이 전사한 장소이라고 한다.
<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 안내 설명서 >
< 거대한 아파트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유적지 내부에 있는 "홍살문" >
표충단은 신숭겸 장군과 김락 장군이 전사한 장소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과 외손이 1.35m까지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놓아 전체 높이가 1.8m이며, 4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 장군의 전사한 장소를 기리기 위하여 쌓은 "표충단" >
< "표충단" 의 건립 배경을 설명한 내용 >
표충단 앞 오른편에 "고려장절신공 순절지지비(高麗壯節申公 殉節地之碑)" 가 서 있으나, 순절지지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의 창살문으로 인하여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읽기가 쉽지가 않다.
< 표충단 앞에 자리잡고 있는 "순절지지비" >
이 표충단을 나와 넓은 마당 뒤편으로 들어가면 높게 치솟는 말을 타고 있는 "신숭겸 장군상" 의 동상이 활을 허공에 견주하면서 약진하고 있는 모습이, 장군의 폐기가 서려지게 한다.
이 동상은 장군이 왕건과 같이 평주 삼탄이라는 곳으로 사냥을 나아갔다가 날아가는 3마리 기러기를 보고, 왕건이 지적하는 마지막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날개를 쏫아 떨어뜨려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평주(평산) 이라는 본관과 더불어 많은 토지를 하사 받았는데, 그 후로 신숭겸 장군은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는 일화를 가지고 있으며 사냥하면서 기러기를 쏘는 모습으로 표현하는 동상이라고 한다.
< 유적지 내부에 있는 "신숭겸" 장군 동상 >
그 뒤편으로 신숭겸 장군의 영전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표충사" 사당을 비롯하여 여러 채의 건물이 있으나 관람시간이 지나가므로 표충사로 들어가는 정문 충렬문(忠烈門)이 굳게 닫혀 있어, 내부로 들어가 관람하지 못함이 애석하게 만든다.
< "표충사" 사당으로 들어가는 충렬문 >
충렬문의 높은 담장 따라 오른편 산책길로 걷다 보면 수령 400년 정도된 "팽나무" 한그루를 만나는데, 이 나무 이름을 "왕건나무" 로 명한다는 이름표가 붙어있어 왕건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상징적 나무이지만 4월은 잔인한 달인지 그 나무에도 봄이 오는 소리가 나무 가지끝에 조그마한 싹으로 움틀림 하는 모습이 보인다.
< "충렬문" 따라 만들어진 돌담길 >
< 수령 약 400년 된 팽나무의 "왕건나무" >
오늘도 KBS 인기 드라마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태조왕건" 의 발상지 이면서 우리 대구가 보유하고 있는 역사의 장을 찾아 옛 성인의 발자취 돌아보고, 잊혀져 가는 문화유산에 대하여 되둘아보는 기회와 더불어 평산 신씨 후손이 직접 해설하는 내용을 들어보는 것도 하나의 역사를 조명하여 보는 시간으로 자리 매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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