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9일 (금요일)
오늘은 1960년 4월19일 학생 운동이 발생한 63주년 기념행사를 추진하는 역사적인 날이지만, 갈곳 없는 실업자는 혼자 나들이 계획을 수립하여 찾아가는 길은 대구광역시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간직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대구 중구에 자리잡고 있는 3대 공원으로 발길을 잡아본다.
1. 달성공원.
달성공원(達城公園)은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인접지역에 있는 공원으로 학교를 다닐 적 종종 땡땡이 치면서 몇 번 찾아본 공원이지만, 그 이후에는 거의 찾아보지 않고 있어 완전히 머리에서 살아져 가는 공원이 어떻게 변화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길을 나서본다.
달성공원은 옛날 대구의 삼한시대에서 부터 부족국가였던 달구벌(達句伐)의 근거지로 뿌리내려 오면서 한 때는 군사 요충지로 이용되기도 했던 토성(土城)이였으나, 1905년 고종 38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지금 까지 가꾸어진 공원이다.
대구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달성공원은 약 38.000여 평으로 둘레가 1.300m에 높이 4-9m 로써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토성으로 거의 원형을 보존 되어진 곳이고, 토성 주변에는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 토성으로 이루어진 "달성공원" 둘레길 >
공원 내부에는 동물원을 비롯하여 다양한 잔디밭과 꽃밭, 동상, 운동기구,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어린에게는 꿈의 동산으로, 어른에게는 휴식의 장소로, 노인에게는 경로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장소이다.
옛날에 입장료를 징수하였지만 2000년 4월 부터 대구시민을 위하여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달성공원 입구로 들어가 오른편 언덕으로 올라가면 토성의 비탈면 따라 동물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입구에서 부터 사슴을 비롯하여 낙타 등의 사육장 있으며 그 다음으로 독수리 등 맹급류 관리사 건물이 연결된다.
< "달성공원"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달성공원을 거닐고 있는 "어린이" >
< 토성 오른편 비탈면에서 부터 자리잡고 있는 "동물원" >
< "맹급류" 관리사 앞으로 지나가는 어린이 >
이 맹급류 동물 관리사 뒤편으로 관풍루(觀風樓)가 자리잡고 있는데, 관풍류는 조선시대 선조 34년(1601년)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宣化堂)의 정남쪽에 있던 정문이 되는 포정문(布正門) 위에 서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이 관풍루는 1906년 대구읍성이 있었던 경상감영공원에서 이곳 달성공원으로 옮겨졌고, 그 후 건물이 노후하여 1970년도에 해체하였다가 1973년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루각(樓閣)이다.
< 경상감영공원에서 달성공원으로 옮긴 "관풍루" >
이렇게 공원 오른편으로 하여 계속적으로 호랑이, 철새, 곰, 사자, 원숭이, 조류, 물고기 등 수 없이 많은 동물 사육장과 더불어 연못이 자리잡고 있어, 많은 어린이들의 산 교육장으로서 대구 및 경북 지역의 유아들이 방문하고 있는 공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 "철새" 가 노닐고 있는 연못 >
< 새끼를 돌보는 "곰" 가족 >
< 열대지역에서 온 "코끼리" >
<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원숭이" 사육장 >
이 밖에 공원 곳곳에 꽃 동산과 더불어 아름다운 나무들을 가꾸므로 어린이들이 나무 그늘 밑에 머물면서 그림 그리기 대회와 더불어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천진스럽게 보인다.
< 아름다운 꽃 동산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 >
<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림" 을 그리는 어린이 >
< 가방을 모아놓고 "놀이" 를 즐기는 어린이 >
< 약 170년의 수령을 가진 "가이즈까 향나무" >
< 아직 봄을 기다리는 130년 수령을 가진 "참느릅나무" >
< 달성공원 정문에서 들어오는 "어린이" >
특히 공원 곳곳에 이상화(李相火) 시비, 수운 최제우(崔濟愚) 동상, 달성서씨(達城徐氏) 유허비, 허위선생(許蔿先生) 순국기념비 등 대구를 빛낸 많은 성인 및 성현들의 기념비들이 새워져 있으면서 역사를 기리고 있다.
< 한국 최초로 건립한 "이상화" 시비 >
< 동학혁명의 선구자 "최제우" 동상 >
< 달성공원 주변애 많이 거주한 "달성서씨" 유허비 >
< 달성서씨 "서병오" 선생님 예술비 >
<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비" >
< 달성공원 중앙에 있으면서 시간을 알리는 "시계탑" >
특히 공원입구 왼편으로 향토역사관(鄕土歷史館) 건물이 자리잡고 있어 대구의 역사, 민족, 생업과 생활문화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으며,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산 교육장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어 많은 자료를 통하여 공부할 수 있는 학습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 대구의 역사를 알리는 "향토역사관" >
1층 제1전시실에는 선사시대에서 부터 1960년대까지 향토역사와 생활문화의 흐름을 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으며, 2층 제2전시실에는 향토의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농업, 상업, 교육, 약령시, 민속예술, 주거문화와 관련된 문화유산을 전시하고 있어 대구의 발전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향토관이 된다.
< 역사관 내부에 진열하고 있는 "자료" >
< 경상감영에 근무하는 감찰사 "행차도" >
< 대구. 경북 지역민들이 살고 있는 "가옥" 모형도 >
2. 경상감영공원.
대구에서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세워진 것은 400여 년 전의 일로써 조선시대 지방의 행정구역은 전국을 8도(八道)로 나누고 각도에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는데, 이들의 관찰사가 정무(政務)를 보던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대구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치면서 국방상의 매우 중요한 위치에 처하므로 경상감영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정, 사법, 군무를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관청으로 1601년도 부터 대구에 설치하여 1910년 까지 이곳에 자라잡고 있었다.
행정관청이 도심의 여러 곳으로 분산된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중요기관이 모두 한 곳에 집중되므로 당시 대구 중심지는 경상감영을 비롯하여 객사, 진영, 군창 등이 몰려 있었으며, 인근 교동에는 교육기관인 향교(鄕敎)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10년에서 부터 1965년 까지 경상북도의 청사로 사용하였다가 1966년 도청을 산격동으로 옮겨간 후, 그 터를 영구히 보존하자는 취지로 1970년에 공원으로 조성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감영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문화해설사가 머무는 안내소를 지나면 대구의 뿌리를 상징하는 기둥 형태의 대구시목(市木)과 미래를 향해 웅비하는 시조(市鳥)를 조형화하는 대구 "시민(市民)의 나무" 동상을 만난다.
< "경상감영공원" 입구에 있는 안내소 >
< 대구시를 상징하는 "시민의 나무" 동상 >
이 동상 옆에는 옛날 말을 타고 출입하는 절도사(節度使) 이하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서 움직이라는 "절도사이하개하마비(節度使以下皆下馬碑)" 가 있으며, 그 뒤편으로 2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 말에서 내려서 업무를 보게하는 "하마비" >
앞의 건물은 경상감영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선화당(宣化堂)" 건물로써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팔작 기와집으로 주심포 양식과 익공식 양식의 절충형으로 공포를 이룬 2고주(二高柱) 7랑가(七梁架)의 집으로 겹치마를 이루는 매우 아름다운 건물을 나타내고 있으며 순조 7년(1807년) 건축한 건물이다.
< 관찰사가 근무하는 "선화당" 건물 전경 >
< 정면에서 바라보는 "선화당" 현판 >
선화당 뒤쪽으로 "징청각(澄淸閣)"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징청각은 경상감영의 관찰사가 거주하는 집으로 정면 8칸에 측면 4칸의 규모에 단층팔작 기와집으로 2고주 7량가의 익공계 건축물로 큼직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집으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 관찰사가 거주하는 "징청각" 건물 모습 >
< 정면에서 바라보는 "징청각" 현판 >
이 밖에 종각 건물, 역대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림(碑林)" 이 일렬로 세워져 있으며 곳곳에 산책로와 벤치를 만들어서 도심 생활에 찌든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주변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여 주고 있으며, 특히 이웃 노인들에게는 모임의 장소로 활용하는 도심의 공원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 경상감영공원 내에 있는 "종각" >
< 역대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림" 모습 >
< 여가를 즐기는 "경상감영공원" 벤치 모습 >
3.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 하기 위한 통치정치의 일환으로써 경제적 침략을 단행하자, 이에 대항하여 경제적인 자주권을 회복하면서 국권을 수호하자는 운동이라고 하겠다.
1907에서 부터 1908년 사이에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들어온 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대구 광문사의 대표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燉) 선생님을 중심으로 발의된 운동이다.
"일본 차관 1.300만원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를 맞았으니, 담배를 끊어서라도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아 국민의 힘으로 국권과 국토를 보존하자" 는 외침에 200여 명의 회원들이 분발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 대구 국민대회를 통하여 본격적인 국채보상운동의 닻을 올리자 전국각지에서 그 취지에 찬동하면서 수 많은 국민들이 다투어 참가하였으며, 대구 중구 남일동에 거주하는 7분의 부인이 패물을 바침으로써 전국적으로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적인 역활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이름없는 걸인으로 부터 고종황제에 이르기 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운동(求國運動)으로 승화되므로 이 비폭력 항일운동으로 뒷날 3.1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는 계기(契機)로 발전한다.
< "국채보상운동"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도 >
국체보상운동기념공원은 대구여자고등학교가 1980년도 수성구로 이전하므로 그 자리에 조성 되어졌는데, 공원 내부에는 대구에서 매년 새해 첫날을 알리는 타종식으로 유명한 달구벌대종이 자리잡고 있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을 알리는 돌 >
< "대구여자고등학교" 자리를 알리는 비석 >
< 매년 새해아침 타종식을 가지는 "달구벌대종" >
더불어 김광제와 서상돈 동상, 국채보상 여성기념비, 대구광역시 공공기준점, 유치환 시비, 대구광역시립 도서관, 등 많은 공공 시설물이 자리잡고 있어 역사성이 매우 깊은 공원이 된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있는 "정원" >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산책로" >
<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와 서상돈" 동상 >
<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기념비" >
< 해발 43m를 나타내는 "대구 공공기준점" >
< 유치환의 시비 "겨레의 밭" >
< 공원 내에 있는 조형물 "솟대" >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가장자리에 있는 "중앙도서관" >
< 중앙도서관 내부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자료전" >
특히 공원이 대구 도심에 위치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공원 산책길과 더불어 인접하게 있는 중앙도서관에서 공부도 하면서 자료를 찾는 공간으로 널리 애용(愛用) 하므로써, 이곳도 대구광역시의 중심 공원이 되는 곳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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