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군 문화와 산행.

경북 군위군에 있는 한국 최초의 추기경 신부로 서임되신 "김수환 생가" 를 방문하면서.

용암2000 2015. 3. 11. 21:50

2015년 3월 1일 (일요일 오후)

 

1. 방가로를 구경하면서.

작은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 건설회사 사장님이 아들에게 방가로 한채를 기증 하겠다는 이야기로 인하여, 현재 내가 귀촌에 따른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기증받은 방가로를 구경할려고 팔공산 언저리 있는 한티재 방향으로 나들이 길을 나선다.

팔공산 언저리에 있는 모처의 장소에 도착하니 폐업한 식당 건물과 더불어 마당 가장자리에 고객용으로 사용한 10개의 방가로가 자리하고 있다.

다소 적은 4-5인용 방가로 5채와 다소 큰 8-9인용 방가로 5채가 매매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 농촌으로 이동하기 쉬운 적은 것 한채를 선정하기로 한다.

 

< 식당의 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가로" >

 

< 다소 적은 형태 "방가로" 한채를 선정하면서 >

 

2. 한우 불고기를 즐기면서.

그러고 나서 기증에 따른 기념으로 아들에게 불고기를 사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팔공산 뒤편에 있는 군위군 군위읍으로 넘어가 "군위민속한우" 식당을 찾아가는데, 이 식당은 금년 1월 백봉산악회에서 군위 조림산 산행을 마치고 방문한 식당이다.

 

< 다시 방문하는 "군위민속한우" 식당 >

 

< 식당 내부에서의 "한우고기" 판매처 >

 

그 때와 같이 푸짐한 불고기를 먹고 나서 Wife가 계산을 하는데, 계산과 더불어 한우를 직접 도살하는 직영 도축장에서 사골용으로 한우뼈를 무료로 준다고 한다.

무료 상품권을 받아 약도 따라 식당의 인접 지역에 있으면서 직영 도축장이 되는 (주) 민속LPC 회사로 찾아가니, 한바구니 소뼈를 주므로 정말로 꿩먹고 알먹는 식당이 된다.

 

< "군위민속한우" 식당의 고기 유통과정 >

 

3. 김수환 추기경 생가를 찾아서.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위군의 명소가 되는 김수환 추기경 생가를 방문하기 위하여 네비게이션에 길을 입력하여 찾아가는데, 김수환 추기경 생가는 군위읍에서 금성면으로 넘어가는 길의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군위읍에서 지방도로 927번을 이용하여 약 10분 정도 달려가면 김수환 추기경 생가 앞 공터에 도착하는데, 공터에 승용차를 주차시킨다.

그러고 나서 주차장 인접하게 자리하고 있는 생가로 들어가면 입구에 간이용 문화관광해설사 대기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면서 늦은 오후라서 그런지 문이 굳게 잠겨져 있다.

 

< "김수환 추기경 생가" 앞에 있는 주차장 안내표시 >

 

< "김수환 추기경 생가" 방향을 가르키는 표시판 >

 

< 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대기소" >

 

아울러 생가 입구에 현수막 한개가 걸려 있는데, 그 현수막에는 추기경 사진과 함께 얼굴 그림 아래에 "바보야" 라는 작은 글씨와 더불어 옆으로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라는 글씨가 방문자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고 있다.

 

<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현수막" >

 

그러고 간이용 문화관광해설사 대기소 옆 "김수환 추기경 생가(金壽煥 樞機卿 生家)" 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데,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 초가(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번지)는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신 김수환(金壽煥 : 스테파노) 추기경께서 다섯살 되던해 이사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 하기 전 까지 사시던 곳이다.

추기경 집안은 원래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 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이신 김요안(金要安) 공은 광산 김씨로 병인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했고 조모 강말손(姜末孫) 여사는 남편의 순교 후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갖은 고생에도 교우들의 뒤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였는데, 당시 유복자로 추기경의 부친이신 김영석(金永錫 : 요셉)이 태어났다.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김보록 신부(대구교구 설립자)의 일을 도왔으며, 동학난을 만나 칠곡 장자동 옹기굴로 피산하게 되었다.

이 때 뮈뗄과 김보록 두명의 신부님 중매로 대구에서 유명한 신자 집안이 되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서용서(徐用瑞) 회장의 딸 "서중하(徐仲夏 : 마르띠나)" 와 혼인하였다.

이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이다.

그 후 왜관 평장목, 김천 지대골의 옹기굴, 대구 남산동으로 전진하던 추기경 부모님은 칠곡 신나무골과 선산을 거쳐 1922년 4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된다.

슬하에는 모두 6남 2녀를 두었는데, 군위에 들어온 해가 되는 1922년 5월 8일(음력)에 낳은 막내가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추기경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추기경이 8살 되던해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 초가에서 공소를 열었다.

추기경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지금 대구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할 때 까지 이 집에서 형 김동한(金東漢 : 가롤로)신부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신앙과 꿈을 키웠는데, 생전에 가끔 이집을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상하셨다.

 

< "김수환 추기경 생가"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찬찬히 내용을 읽어보면 볼수록 김수환 추기경이 생가로 이사한 날짜가 5살이 되었다는 상단의 내용과 하단에 이사하는 해에 외가집에 출생하였다는 이원화로 기술하고 있어 매우 의구심이 발동하게 한다.   

어찌하던 의구심을 가지면서 야산 비탈면에 있는 생가로 올라가면 중간지점에 새롭게 건립되어져 있는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고, 화장실에서 돌 층계를 올라가면 초가 3칸의 생가 집을 만난다.

 

< 김수환 추기경 생가로 올라가는 "돌 계단" >

 

< 돌 계단 아래에 있는 "화장실" >

 

이 집은 약 13평 정도의 매우 작은 초가로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추기경이 선종하기 3년 전 2006년에 구입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집에는 2칸의 방과 더불어 한칸의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약 13평이 되는 매우 단촐한 "초가 3칸" >

 

< 큰방 처마 밑에 있는 "추기경" 사진 >

 

농촌에서 가난에 따라 아무리 검소한 집이라고 하여도 최소한으로 사랑채, 곡간채, 변소 등 다른 부속 건물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추기경 생가에는 변소 한채도 없이 본채만 복원하고 있어 너무나 성의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추기경 생가" >

 

오른편 부엌에는 솥단지 한개만 자리하고 있으며 큰방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한 사진과 더불어 2개의 화환이 놓여 있다.

작은방에도 추기경 사진 아래 작은 창문 위에 분홍색의 꽃이 걸려있고, 왼편 벽면에는 추기경이 마루에 앉아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사진이 붙어있다.

 

< 제일 오른편에 있는 "부엌" 내부 >

 

< 큰방 내부의 추모 "화환" >

 

< 작은방 내부 "추기경 사진과 분홍색의 꽃 " >

 

김수환 추기경은 초가의 마루에 앉아 옛 추억을 더듬어 보는데, 5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하였으며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를 하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고 한다.

아울러 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지만, 태어난 곳이 대구 임에는 틀림 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마을 풍경" > 

 

마루에 앉아 생가 앞으로 펼쳐지고 있는 시골 풍경을 한참 구경하여 보는데, 석양으로 떨어지는 태양의 빛으로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하는 마을이 너무나 아늑함이 묻어나는 전경이 눈 앞에 머물고 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