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5일.(수요일)
1. 보물 제302호가 되는 청도 석빙고를 돌아보면서.
금일 대학교에서 같이 공부하였던 3명의 동문이 청도에서 유명한 복숭아꽃 구경이나 하여 보자는 이야기로 인하여 길을 나서는데, 3명 중 한명이 태어나서 자랐던 옛고향이 되는 청도군 화양읍(華陽邑) 방향으로 넘어가 청도역 앞에 있는 추어탕 골목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도 겸하자고 한다.
대구에서 팔조령 고개를 넘어 청도군 이서면을 통과하여 화양읍으로 들어가는데, 동문의 집은 청도에서 창녕으로 넘어가는 20번 지방도로의 확장공사로 인하여 고향마을이 완벽하게 살아졌다고 하면서 마을 주변에서 화양읍 뱡향으로 이동하면서 옛추억의 길을 회상하여 보기로 한다.
청도군에는 2개의 읍(邑)이 있는데, 그 중 많은 인구가 살면서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청도읍은 당년하게 읍으로 승격 되었지만, 청도읍 옆에서 작은 시골을 형성하고 있는 화양면(華陽面)이 읍으로 승격하기에 너무나 적은 주민이 살았지만 군청소재지가 실개천 다리 하나 건너 화양면에 자리하므로 인하여 어부지리(魚父之利)로 읍으로 승격되어진 고을이라고 한다.
골목골목 마다 옛 추억이 서려있는 이야기와 더불어 이곳에서 친척 및 친구들이 살았던 집을 회상하면서 화양읍을 감싸고 있는 청도읍성 따라 운전하여 가는데, 거의 파손되어진 읍성을 복원하고 있는지 곳곳에 공사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 새롭게 복원하고 있는 "청도읍성" >
이렇게 화양읍을 감싸고 있는 청도읍성 따라 야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화양읍이 자랑하는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가 자리하고 있어, 관람을 하기 위하여 도로변에 주차하고 나서 석빙고로 들어가 본다.
< "청도 석빙고" 를 나타내고 있는 전경 >
이곳 청도 석빙고는 겨울철에 자연적으로 생산 되는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또는 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얼음 창고로써 석빙고 입구 우측에는 숙종 39년(1713년)에 세운 비(碑)가 자리하고 있는데, 축조 연대와 더불어 만든 내력 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 청도 석빙고는 바닥의 한변 길이가 14.75m이면서 폭이 5m가 되는 장방형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내부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 바닥이 미세한 경사면으로 이루어 지면서 바닥의 중앙으로 배수구가 있어 물이 자연적으로 외부로 배출하게 되어진다고 한다.
< "청도 석빙고"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4면의 벽에는 잡석으로 쌓아서 벽을 형성하면서 그 위로 석빙고 천정을 만들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다듬은 돌로 반원형이 되는 "홍예교(虹藝橋)"를 만들어 놓고, 홍예교와 홍예교 사이에 넓은 판석(版石)을 걸치면서 공간을 채우고 나서 그 위로 흙을 얹어 석빙고 천정이 만들었다고 한다.
< 바닥에 경사면을 가지고 있는 "석빙고" 내부 모습 >
그런데, 현재에는 천정을 덮고 있었던 흙과 판석은 살아지고 없으면서 오직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4개의 홍예교만 외롭게 걸쳐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애초롭게 보이고 있는데,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면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모습이 한국이 아니고 머나먼 로마의 유적지와 같이 자연 미(美)를 가진다고 보아야 할 지 모르겠다.
현재 전국적으로 6기(基)의 석빙고가 국가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면서 그 가운데 이곳 청도 석빙고가 최고로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렇게 국보급 문화재가 아무런 발굴 및 조사도 없이 그대로 방치하고 있어도 되는지 의심을 가져본다.
동문은 어릴적 이곳에서 술래잡기 등 놀이를 하면서 홍예교로 올라가 놀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석빙고 주변으로 어떠한 울타리 또는 보호 시설도 만들어지지 않고 방치하고 있으므로 인하여 어린들이나 야간에 구경하는 사람에게 안전에 매우 취약한 장소가 되어진다.
< 나의 동문이 올라가서 놀았던 "홍예교" 단면 >
아마 청도군은 부정 선거로 매번 군수를 다시 선출하여야 하는 불행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보호시설 하나 만들수 있는 예산 부족으로 인하여, 그냥 방치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면서 인접하게 있는 항교로 올라가기로 한다.
< "안전시설" 하나 없는 청도 석빙고 주변 >
2.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07호가 되는 청도 향교 방문.
청도 석빙고에서 남산 방향으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마을의 중앙에 작은 주차장과 더불어 "청도 향교(淸道 鄕敎)" 의 동쪽이 되는 곳에 작은 쪽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쪽문 오른편으로 향교를 설명하는 안내문 있어 내용을 정독하여 본다.
< "청도 향교" 로 들어가는 동쪽에 있는 쪽문 >
향교는 문묘(文廟)와 부속된 학교로 고려시대에 비롯하여 조선시대 까지 이어진 지방 국립 교육기관으로 이곳 청도 향교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선조 1년(1568년)에 고평리에 세웠던 것을 인조 4년(1626년)에 합천리로 옮겼다가 영조 10년(1734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향교의 배치는 강학을 하는 명륜당과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이 앞 뒤 일렬로 놓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 배치가 원칙을 하고 있으나, 이곳 청도 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 건물이 좌우로 놓여 있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독특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 "청도 향교" 를 설명하는 안내문 >
향교를 구획하고 있는 좁은 문이 되어지는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의 좌측편 언저리에 고목의 느티나무 2그루가 향교의 역사를 대변하여 주고 있으며, 마당의 중앙에서는 향교를 관리하는 지인재(智仁齋)라는 새로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향교의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는 "느티나무" >
< 향교 마당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지인재" 건물 >
이 지인재 건물 좌측 옆면으로 들어가면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내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대성전(大成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대성전 앞 오른편에는 낮은 정료대가 자리하고 있으면서 마당 좌우에는 동무(東蕪)과 서무(西蕪) 건물이 상호 대칭형으로 지어져 있다.
<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내삼문" >
이 대성전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면서 주두에 익공을 짜고 초각 없는 화반을 네모 판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검소한 외곽을 갖추고 있는데, 내부에는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하면서 5성(五聖)과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을 배향하고 있으면서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 공자 및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 >
< 대성전 건물 앞 오른편 가장자리에 있는 "정료대" >
< 대성전 건물 앞 오른편에 있는 "동무" >
< 대성전 건물 앞 왼편에 있는 "서무" >
대성전과 담으로 구획하고 있는 오른편 쪽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지방 유생들이 강학(講學)을 논(論)하였던 명륜당(明倫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명륜당 건물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건물로 전퇴가 되어지는 마루가 놓여 있다.
< 대성전에서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
< 유생들의 강학 공간으로 사용한 "명륜당" >
명륜당 건물의 양식은 대성전과 동일하게 팔작지붕에 이익공집으로 하고 있으면서, 마루에는 어칸과 좌우 협칸에는 대청으로 우물 청판을 깔았고 좌우 툇마루에는 통칸 온돌방을 드리우고 있다.
이 명륜당 앞에도 넓은 마당을 품고 있는데,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건물이 좌우 대칭형으로 지어져 있으며 마당의 전면에는 명륜당으로 들어오는 외삼문(外三門) 격이 되어지는 "사락루(思樂樓)" 라는 2층의 누각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명륜당 마당 오른편에 있는 "동재" >
< 명륜당 마당 왼편에 있는 "서재" >
<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이 되는 "시락루" >
이 사락루를 벗어나면 오른편으로 서문이 되어지는 또 다른 쪽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서문을 벗어나면 바로 사람들이 기거하는 민가들이 자리하므로 인하여 전통의 향교 풍경을 다소 흐리게 만들고 있다.
< 향교를 들어오는 서쪽의 "족문" 과 민가의 사물 >
또 다시 승용차를 두고 있는 동문 방향으로 걸어가면 향교의 바운다리 내의 왼편 구석자리에 현대식 건물이 되어지는 유림문화회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외형이 전통의 향교 건물과 상반되어 거부감을 발생하게 만든다.
< 향교 바운다리 내에 있는 "유림문화회관" >
3. 청도역과 함께 하고 있는 추어탕 거리 방문.
승용차는 이내 화양읍을 벗어나면서 청도읍으로 넘어가는데, 청도읍 시가지는 화양읍과 대조적으로 다소 번잡한 빌딩의 숲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중앙거리 따라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 언덕 위로 청도역(淸道驛)이 자리하고 있다.
< 청도역 주변에 있는 "거리" 풍경 >
먼저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청도역 인접지역에 있는 추어탕 거리로 들어가 옛날 자주 찾아던 의성 추어탕 식당을 찾았으나 그 자리에 역전 추어탕 집으로 간판이 바꾸어져 있는데, 이렇게 간판을 변경한 것은 이곳 청도지역에서 의성이라는 지역의 상호를 쓰는 것이 정서면으로 맞지 않아 변경되었다고 한다.
< 청도역 주변에 있는 "추어탕 거리" 입간판 >
< 추어탕 거리에 비치하고 있는 "봄꽃" >
<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역전 추어탕" >
< 추어탕을 즐기는 "고객과 가격표" >
다소 늦은 점심시간이 되어지므로 인하여 내부에는 몇몇 고객들이 추어탕을 즐기고 있어 일행도 추어탕을 시켜서 먹어보는데, 하도 오래 만에 찾아오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맛 보다 시장기로 인하여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빈그릇을 생산한다.
<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보는 "추어탕" >
그러고 나서 다음 관광지로 청도에서 유명한 "내시(內侍)" 고택을 방문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니, 청도군에서 거주하는 동문은 약 60여년 동안 청도에 살았지만 그런 집은 없다고 빡빡 고집을 부리므로 역으로 들어가서 역무원에게 문의 하자고 제의를 한다.
< 추어탕 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청도역" >
그래서 모처럼 청도역을 한번 방문하여 보는데, 청도역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 8리에 자리하고 있는 역(驛)으로 원래는 이곳 보다 100 여m 북쪽 지점에 있으면서 초라한 목조단 건물로 옛날 남성현역 보다 규모가 더 초라하였으나 복선공사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역사(驛舍)를 2008년도에 새롭게 축조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점점 줄어지는 승객으로 인하여 역사에서도 손님을 위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많은 기념품과 더불어 옛 조상들이 사용하였던 농기구 및 영상기기, 유물, 휴게소, 정자, 폐차가 되어진 새마을 객차 등을 전시하므로 인하여 구경도 겸하면서 방문하는 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 역사 내에 있는 "소달구지" >
< 역사 내에 비치하고 있는 대형 "영사기기" >
< 역사 내에 만들어져 있는 "초가집" >
< 한국 최초의 "새마을 객차" >
더불어 역무를 보고 있는 역무원에게 청도의 유적지와 더불어 내시가 살았던 고택이 어디에 있는지 문의한 결과, 청도군 관광지도 한장을 주면서 청도군에 산재하고 있는 관광지 및 문화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정3품 내시가 낙향하여 살았던 고옥이 지도에는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 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는 길을 가르켜 주므로 인하여 한번 방문하기로 한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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