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문화와 산행.

경주시가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40호 "대릉원" 및 기타 유적지를 돌아보고서.(2)

용암2000 2013. 3. 10. 11:51

2013년 2월 19일.(화요일)

 

6. 대릉원(大陵苑).

사적 제40호는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으로 약 30기의 무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시가지 한 가운데 많은 무덤군을 거닐고 있는 대릉원도 사적 제40호 고분 중에 한 부분이다.

 

< "대릉원" 으로 들어가는 입구 >

 

< 사적 제40호 "대릉원" 의 조감도 >

 

입구 주차비와 입장료를 지불하고 내부로 들어가면 거대한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오솔길 따라 왼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제일 먼저 "미추왕릉(味鄒王陵)" 을 먼저 만난다.

 

< 대릉원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숲길" >

 

< 대릉원 입구에서 만나는 "미추왕릉" >

 

미추왕은 신라 제11대 왕으로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김씨의 최초 왕으로써 여러차례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하였다고 하며 미추왕은 죽어서도 신라를 수호하기 위하여 청도 "이서국" 군사들이 쳐들어와 풍전등화 같이 꺼져가는 신라를 구하기 위하여 미추왕 군사들이 머리에 대나무 깃을 달고 바람과 같이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홀연히 살아졌다고 하는데, 다음날 아침 미추왕릉 주변에 많은 대나무 깃이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 "미추왕" 혼령 군사들이 싸웠다는 설명서 >

 

미추왕릉은 유일하게 무덤 전면에 담장으로 구획하면서 중앙에 삼문이 있지만, 문이 잠겨져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여 옆면에서 내부를 살펴보면 무덤의 크기가 높이 12.4m에 지름 56.7m의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의 무덤이다.

경주시내 평지 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의 무덤으로 속하며 무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 무덤 형식일 것으로 추정되며, 무덤 앞쪽에는 제물(祭物)을 올리기 위한 단촐한 좌판이 놓여있다.

 

< 미추왕릉 앞에 있는 "좌판" >

 

미추왕릉 윈편으로 만들어진 길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높은 무덤이 도열하고 있어 마치 산 속으로 걷는 기분으로 돌아가면 아름다운 분수대와 함께 휴식처가 나타나고, 그 뒤편 제일 안쪽에 "천마총(天馬塚)" 고분이 나타난다.

 

< "릉" 사이로 걷는 산책 길 >

 

<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천마총" 입구 >

 

천마총은 신라시대의 대표적 돌무지덧널 무덤으로써 밑둘레 157m에 높이 12.7m로 비교적 큰 무덤으로써 5-6세기 경에 축조된 어느 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하는데, 무덤의 구조는 평지 위에 나무널과 부장품(副葬品) 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만든 목관을 설치하여 돌맹이를 쌓고 나서 최종적으로 흙으로 덮는 구조이다.

 

< 무덤 내 "시신" 이 안치된 모습 >

 

발굴 및 조사를 하였을 때 금관을 비롯하여 유물 11.5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그 중에서 자작나무 껍질로 하늘로 나는 말의 그림 "천마도(天馬圖)" 가 그려진 말 다래가 나왔다고 하여 천마총이라고 불려진다고 한다.

 

< 국보 207호 "천마도" 가 그려진 말다래(모조품) >

 

무덤 내부로 들어가면 발굴 당시의 무덤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덤 가장자리를 통하여 발굴 당시의 유물 일부를 전시하고 있지만, 전부가 모조품이며 진품(眞品)은 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천마총에서 나오면 왼편으로 거대한 무덤 한기가 보이고 있는데, 이 무덤이 "황남대총(皇南大塚)" 이라는 무덤으로 남북 길이가 120m에 동서 길이가 80m 및 높이가 23m의 거대한 쌍무덤이다.

1973년에서 1975년까지 발굴 조사하여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더불어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고,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더불어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은제 허리띠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 천마총 옆에 있는 "황남대총" >

 

그레서 남쪽 무덤은 남자 및 북쪽 무덤은 여자로써 부부 무덤을 붙여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덤은 내부를 관람이 불가능 하도록 Open 하지 않고 원 상태로 복원시켰으며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도 경주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 황남대총을 왼편으로 두고 미추왕릉 뒤편으로 한바퀴 돌아서 나오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산책하기에 최상의 길이 된다.

 

7. 숭혜전(崇惠殿).  

대릉원을 나와 오른편 담장 따라 조금 가다가 대릉원 담장 앞으로 사당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믈은 대릉원의 입구에 있는 신라 제 13대 미추왕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숭헤전(崇惠殿)" 사당 건물이다.                                                                                                    

원래 이 사당 건물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 되는 경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는데, 고종 24년(1887년)에 미추왕의 위패와 그 이듬해 신라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제 30대 문무대왕 위패도 함께 모시게 한 사당이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숭덕문(崇德門) 앞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사당의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으며 대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마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 건물을 만나는데, 동재 건물에는 경모재(敬慕齋)와 서재에는 영육재(永育齋)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숭혜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숭혜문" >

 

< 동재의 "경모재" 건물 >

 

< 서재의 "영육재" 건물 >

 

마당을 통과하여 더 내부로 들어가면 내삼문을 만나지만, 이곳 내삼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사당으로 들어감이 불가능하여 고개를 담 위로 내밀고 안으로 들어다 보면 미추왕과 문무대왕,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 굳게 잠겨진 "내삼문" >

 

< 미추왕 등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혜전" 사당 >

 

사당을 돌아서 서재 뒤편으로 나오면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사당 관리인의 집이 있는데, 이 관리인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어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매우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사당을 벗어나야 한다.

  

8. 분황사(芬皇寺).

경주시기지에서 보문단지로 올라가는 도시 한 모퉁이에 분황사 사찰이 자리잡고 있어 넓은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서, 매표소에서 거금(巨金)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경내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국보 제30호 "분황사 3층석탑" 을 만난다.

 

< "분황사" 로 들어가는 대문과 매표소 >

 

< 분황사 경내에 있는 국보 제30호 "3층석탑" >

 

이 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으로,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15년 일본인들이 허물어진 석탑을 해체하여 수리하였다고 하는데, 1층 몸체 돌의 사방에는 쌍 여닫이 돌문으로 되어 있으면서 그 속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 이 있고 감실 안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 되어있다.

 

< 탑의 1층 몸체에 있는 "쌍 여닫이문" >

 

탑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기단은 자연석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석 각 모서리 제일 끝지점에 각각 모양이 달리한 4마리의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고 있다,

 

< 탑의 기단 끝에 있는 "석사자" 상 >

 

< 다른 모서리에 있는 "석사자" 상 > 

 

발굴 당시 탑에서 나온 사리함에는 여러가지 구슬, 가위, 금, 은, 바늘과 은함, 숭령통보, 상평오수 등이 들어있어 고려 숙종 또는 예종 때 해체 및 수리 되어짐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3층석탑 뒤편으로 돌아가면 분황사 "화쟁국사비부(和爭國師碑趺)" 가 있는데, 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 를 기리는 비의 받침대로써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년)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 원효대사의 "화쟁국사 비부" 받침대 > 

 

숙종은 원효대사가 동방의 성인(聖人)이지만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을 크게 드러내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대성 "화쟁국사" 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현재 비는 없이지고 받침대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비석의 받침대 옆으로 "석정(石井)" 이라는 우물 한기가 있는데, 이 우물의 외부 돌은 높이가 70Cm로써 8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 분황사 3층석탑 뒤편에 있는 "석정" >

 

이 화쟁국사비부와 석정 뒤편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분황사의 본찰 "보광전(普光殿)" 사찰이 서쪽 방향을 바라보고 건축되어 있다.

 

< 분황사 본찰 "보광전" 과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기다리는 신도 >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오는 유서 깊은 사찰로써, 분황사 창건 직후에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 가 주석한 사찰이라고 한다.

이 사찰도 임진왜란와 몽골의 침입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원년(1609년)에 중창하였으나 사찰 명성에 대비하여 보광전 건물 규모가 너무나 작지만 반대로 내부에 모시고 있는 약사여래입상은 너무 크므로 법당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데, 불자들이 동시 참배가 불가능하여 많은 블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난 후 법당으로 들어가 참배를 드리는 것이 이색적이다.

 

< 법당 내부 전체를 점유하고 있는 "약사여래입상" >

 

사찰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보광전 뒤편으로 요사채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요사채 앞 마당에는 분황사 주변에서 수집한 많은 유물과 돌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다.

사찰 입구 오른편 구석에는 거대한 범종이 있는데, 이 범종은 사람들이 수시로 타종이 가능하도록 Open 되므로 언제나 타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찰이다.

 

< 사찰 내에 수집 보관하고 있는 "유물" >

  

< 수시로 종을 치고 있는 "범종" >

 

사찰 정문으로 나오면 분황사와 황룡사지 터의 경계 지점에 당간지주 1기가 서 있는데, 이 당간지주는 통일시라시대의 것으로 높이가 360Cm이며 양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 거북이가 있으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 분황사 앞에 있는 "당간지주" >

 

기둥은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는데, 이 당간지주의 주인공은 황룡사의 것이 아니고 분황사 소유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9. 황룡사지(皇龍寺址).

분황사 정문을 나오면 바로 황룡사지(皇龍寺址)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정표 따라 걸어가면 황룡사지를 발굴한 안내문이 붙어있어 상세하게 내용을 음미하여 본다.

 

< 분황사 앞에서 "황룡사지" 알리는 안내 표시 >

 

< "황룡사지"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553년) 월성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건축하다가 황롱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皇龍寺)" 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가 되는 "아비지" 를 초청하여 9층의 목탑(木塔)을 완성시켜 4대 93년간을 거쳐서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절터 내 민가 100여 호를 이주시키고 경주 고적발굴 조사팀이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원래 황룡사 대지는 25.000평이나 달하는 넓은 늪 지대를 매립하여 마련하였음을 알게되었고, 사찰 건물은 남북으로 일탑식(一塔式) 절 배치를 하였으며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이 건물 역시 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유물이 4만여 점이 넘으며, 모두가 매우 우수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조성된 사찰 터가 너무나 넓으므로 복원된 황룡사지 전체를 돌아보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복원 터의 중앙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금당지" 터가 나타나고, 그 앞으로 더 나아가면 황룡사의 최고 건물이 되는 9층목탑 터가 나타나면서 주변에 많은 건물 터가 있었다는 안내문도 함께 붙어있다.

 

< 황룡사의 본찰 "금당" 터 >

 

< 황룡사 "9층목탑" 이 있었던 자리 >

 

< 황룡사 "9층목탑" 의 모형도 >

 

제일 앞에 있는 남문 터를 지나면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석축을 모아 놓은 돌 무더기를 만나는데, 발굴된 수량이 너무나 많아 황룡사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10. 월지.(일명 : 안압지)

황룡사지 앞에 있는 월지를 구경하기 위하여 승용차를 몰고 월지 주차장에 주차하고, 입장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월지 안내문이 있어 읽어본다.

 

< 복원한 "월지" 의 조감도 >

 

이곳 월지는 통리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 부속 건물과 정원이 있는데,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키웠다고 한다.

임해전은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을 배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月池)" 이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閉虛)가 된 장소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 라고 보르게 되었으며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 조사에서 신라 때 축조되었던 안압지 모습을 거의 확인하였다.

임해전 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記年銘)으로 궁궐의 축조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하는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켰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지라 하겠다.

 

< "월지"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내부로 들어가면 복원된 임해전 궁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현재 복원한 임해전은 제1궁궐, 제3궁궐, 제5궁궐 등 3개의 궁궐만 복원시키고 있으며 나머지 궁궐은 궁터 만 조성하여 놓고 궁궐 오른편으로 월지를 새롭게 단장하여 매우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 새롭게 단장한 "임해전" 전경 >

 

천천히 걸어서 내부로 들어가면 먼저 제1궁궐에 도착하는데, 이 궁궐로 들어가면 월지가 내려다 보이는 호수에는 많은 오리들과 새들이 유영하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게 느껴진다.

 

< 복원한 "제1궁궐" 모습 >

 

< 제1궁궐에서 바라보는 "월지" >

 

내부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제3궁궐에 도착하는데, 이 제3궁궐에는 월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임해전 전체에 대한 조감도 만들어져 있어 조성된 공터에 있었던 궁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 복원한 "제3궁궐" 모습 >

 

< 제3궁궐 내에 있는 "임해전" 모형도 > 

 

제5궁궐로 돌아 월지를 한바퀴 돌아보면 호수 주변에 조명시설이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어, 여름밤 조명에 비치는 호수와 야간 풍경을 보면서 걸어 본다면 최상의 아름다운 호수가 되어짐이 자명하여 질 것 같다. 

 

< 새롭게 복원한 "제5궁궐" 모습 >

 

< "월지" 주변으로 만들어진 산책길 >

 

< 산책길에서 바라보는 "임해전" 모습 >

 

< 호수변에 설치하고 있는 "조명시설" >

 

이상 당일로 경주시가 품고 있는 다수의 문화재와 유물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데, 아직도 경주가 품고 있는 많은 문화재를 대면치 못하여 추후 시간을 만들어서 신라의 역사를 더욱 더 조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경주를 떠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