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회.(고등학교 동문 모임)

2013년 우암회 하기휴가는 괴산군 명소 "화양계곡과 송시열 묘소" 돌아보는 시간을 가짐.(2)

용암2000 2013. 8. 1. 00:23

둘째날 (28일 : 일요일 오전)

 

이젠 늙음으로 인해 누군가 기차 화통 같은 소리로 코를 골므로 인하여 밤새 잠을 설치면서 선잠 속에 있다가 다소 일찍 일어나 달천으로 내려가서 다슬기나 잡아 볼려고 하니 약간의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므로 포기하고, 전일 밤 늦게까지 마신 술로 인한 쓰린 속을 다스리기 위하여 간단하게 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위장을 달래본다.

그리고 주변 유원지를 돌아보기 위하여 준비를 하는데, 그 사이 억수같이 비기 내리므로 거동이 불편하여 방으로 들어가 TV와 씨름하면서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소낙비가 가랑비로 다시 바뀌어 짐으로 "화양계곡(華陽溪谷)" 을 구경하기로 하고 출발을 서두른다.

 

1. 화양계곡.

숙소에서 5분 정도 운전하여 화양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벌써 주차료를 징수하므로 대당 5.000원의 주차비를 지블하고 나서 화양계곡으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비가 내리는 아침이라서 그런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 거의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이 되어진다.

 

< 빗속에 "화양계곡" 으로 올라가는 일행 >

 

울창하게 우거진 숲 아래로 한 5분 정도 걸어가면 다리를 만나는데, 다리 위쪽 계곡을 가로질러 만든 보(湺)로 인하여 많은 물이 머무면서 넓은 산중 호수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호수 왼편 야산 기슭에 화양구곡 중에서 제2곡 "운영담" 의 거대한 바위가 비에 젖어 상쾌함을 뽐내고 있다.

 

< 산책길 옆에 있는 고목의 "느티나무" >

 

< 거대한 산중 호수를 만들고 있는 인공 "보" >

 

< 화양구곡 중에 제2곡 "운영담" >

 

이곳 화양계곡 따라 펼쳐지는 화양구곡은 제1곡 경천벽, 제2곡 운영담, 제3곡 읍궁암, 제4곡 금사담, 제5곡 첨성대, 제6곡 능운대,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 파천까지 거리가 약 4.5Km로써 느근한 걸음으로 약 1시간 15분 정도 걸으면 제9곡에 도착이 가능하여지는 명품의 트레킹 코스가 된다.

 

< 화양구곡을 알리고 있는 "안내석" >

 

그런데, 제1곡은 주차장에서 부터 약 500m 정도 아래에 있으므로 특별하게 방문할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거의 볼 수가 없이 차량이 지나치고, 일반적으로 주차장에서 제9곡까지 1시간 정도이면 충분하게 도착이 가능하여 진다.

이 운영담 앞에 있는 넓은 호수 중앙으로 출입을 제한하는 부표가 떠 있으며 그 부표 반대편 가장자리로 모래사장이 펼쳐지는데, 이렇게 첩첩 산 중 계곡에서 백사장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이색 체험이 되어진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도로 우측으로 상가 건물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명나라의 황제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만동묘(萬東廟)" 와 조선시대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님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화양서원(華陽書院)" 이 나타난다.

만덕묘와 화양서원을 구획하는 외곽 돌담으로 만들어진 문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만덕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왼편으로 다시 내부 토담으로 보호하고 있는 화양서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오른편 만덕묘를 구경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좌우 건물이 자라잡고 있는데, 좌측에 있는 건물에는 중반청, 우측의 건물은 존사청(尊事廳)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존사청 건물 뒤편으로 서원을 방문하는 고관대작이 머물 수 있는 "풍천제(風泉齊)"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중반청과 존사청 건물 사이로 조금 올라가면 외삼문 "양추문(陽秋門)" 이 자라잡고 있으며 외삼문을 통과하면 눈 앞으로 급경사의 돌계단으로 만들어진 층계를 만나는데, 층계 오른편 구석에 송시열 선생님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가 자리잡고 있다.

 

< 만동묘로 들어가는 외삼문 "양추문" >

 

만동묘정비 비문에는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한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님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황제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셔 달라는 유언에 따라 숙종 29년(1703년)에 세운 사당이라고 한다.

 

< 만동묘 오른편에 있는 "만동묘정비" >

 

코가 계단에 닿을 정도로 만들어진 층계 위쪽에 내삼문이 자리잡고 있는데, 내삼문을 통과하면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만동묘(萬東廟)" 가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 급경사의 층계를 가지고 있는 "돌계단과 내삼문" >

 

< 명나라 신종과 의종 위패를 모시고 있는 "만동묘" >

 

간단하게 목례의 예를 표시하고 나서 급경사 돌계단으로 다시 내려오는데, 여자분들이 이렇게 급경사의 경사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므로 어떠한 사람도 자연적으로 몸의 자세를 낮추고 방문하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이야기 하니 비로써 뜻을 이해하고 잘도 내려간다.

다시 외삼문을 통과하여 왼편으로 돌아가면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화양서원(華陽書院)" 이 자라잡고 있으나 가랑비로 인하여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생락하고 먼 발취에서 담 안에 있는 서원을 구경하여 보는데, 서원의 구조가 정문과 영전을 모시는 건물로 매우 단촐한 서원이 되어진다.

이렇게 화양서원 건물이 단촐하면서 새롭게 건축되어진 이유는 대원군이 화양서원을 철저하게 훼철하었기 때문인데, 일화에 의하며 대원군이 이곳 화양계곡을 찾았다가 서원 앞으로 지나갈 때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다가 괴산에서 득세하고 있는 유림과 송(宋)씨 문하생으로 부터 크게 수모를 당한다.

그래서 한양으로 입성하자 마자 그때까지 유림들에 의해 전국을 지배하고 있는 수 천개의 서원 중 국가가 인정하는 33개의 서원을 제외하고 전부 철거하기 시작하는데, 조선에서 화양서원이 제일 먼저 살아지게 만들어진 서원이라고 한다.  

몇십년 전 처음 화양계곡을 찾았을 때 만동묘와 화양서원 모습이 완전하게 북원하지 않아 매우 산만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런되로 일부 건물이 자리잡고 있지만 언제가 우리나라의 4대 서원 모습으로 원상복원 될 것을 기대하여 본다.

만동묘 앞으로 내려오면 서원의 건립 취지와 서원의 주인, 주인의 인품 등을 기록한 비석 한기가 서 있는데, 그 비석 뒤편 개울가에 화양구곡의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 이라는 넓은 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 화양서원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는 "비석" > 

 

< 개울가에 있는 화양구곡 중 제3곡 "읍궁암" >

 

이 읍궁암 바위는 송시열 선생님이 효종대왕의 북벌(北伐)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라는 젊은 나이로 승하(昇遐) 하신 것을 크게 슬퍼하여, 노구의 몸으로 새벽마다 한양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읍궁암" 을 설명하는 안내문 >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풍족한 물이 흘려가다가 잠시 멈추어 쉬었다 가는 거대한 소(沼)와 담(潭)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담의 뒤편 바위 사이로 새집같이 둥지를 만들고 있는 한채의 집이 보이고 있다.

그 집이 우암 선생님이 노후에 학문을 연마 하면서 머문 암서재(巖棲齋)라고 하고, 담을 형성하고 있는 넓은 못을 화양구국 중에 제4곡 "금사담(金沙潭)" 이라고 한다.

 

< 화양구곡 중 제4곡 "금사담" 과  암서재 건물 >

 

여기서 조금만 더 계곡 상부로 올라가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지는 해발 643m 도명산의 산행 초입길을 만나고 계곡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건너가서 도명산 쪽으로 바라보면 층층이 쌓여 있는 거대한 바위 군락지가 보이는데, 이 바위 군락지가 화양구곡 중에 제5곡 "첨성대(瞻星臺)" 이다.

 

< "도명산" 산행길을 가르키고 있는 지시표 >

 

< 도명산 능선에 있는 화양구국 중 제5곡 "첨성대" >

 

여기서 개울 옆으로 만들어진 오솔길 따라 계곡 상부로 울라가면 나머지 제6곡에서 제9곡 까지 구곡(九曲)을 만나지만, 나는 한때 도명산 뒤편에 있는 공림사에서 부터 낙영산과 도명산으로 종주하면서 제8곡인 "학소대" 방향으로 하산하여 걸어서 내려온 길이다.

 

<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화양계곡" 을 바라 보면서 >

 

계속적으로 오락가락하는 가랑비로 인하여 제5곡 첨성대를 종점으로 하여 돌아가자는 의견으로 왔던 길로 되돌아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그때 부터 도명산 산행을 하기 위한 산행인들이 줄을 형성하면서 올라와 넓은 산책길에는 등산객으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2. 우암 송시열 선생님 묘소 참배.

화양계곡을 조기 탈출하여 인접하게 있는 괴산군 청천면 청천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선생님 묘소를 돌아보기 위하여 한 10여분 정도 운전하여 청천면에 도착하여, 면사무소 뒤편으로 50m 정도 들어가 넓은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 오른편으로 비대칭의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재실(齋室)이 자라잡고 있지만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고, 그 재실 왼편으로 송시열 선생님의 업적을 기르는 신도비 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 재실로 들어가는 입구 "솟을대문" >

 

원래 송시열 무덤은 수원 묘봉산에 있었으나 숙종 23년(1697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는데, 신도비는 정조 3년(1779년)에 묘소 아래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2.5m이며 신도비각 내에 있는 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 정조대왕의 어필로 쓴 "신도비" 를 모시고 있는 비각 건물 >

 

그 신도비 뒤편 야산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돌계단의 경사도를 줄이기 위하여 몇번의 꺽임을 가지면서 야산을 돌아서 올라가면 "은진송" 씨의 무덤 몇기가 만난다.

 

< 송시열 선생님 묘소로 올라가는 "돌계단" >

 

그 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좌청룡과 우백호의 지맥이 병풍같이 흘려내리고 있고, 앞에는 높은 산으로 돌려쳐 있는 중앙에 청천면사무소의 동네 건물들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학이 전무한 사람에게도 한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명당의 요소를 다 같고 있다는 것을 바로 인지할 수 있는 곳에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묘소가 자라잡고 있는데, 무덤 앞에는 거대한 상석과 2개의 비석이 서 있으며 묘소의 가장자리 좌우에 망부석과 문인석 2기가 무덤을 지키고 있다.

 

<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송시열" 선생님 묘소 >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호는 우암(尤菴)으로써 봉사를 지낸 "송구수" 선생님의 증손자이시고, 아버지는 "송갑조" 이며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 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외가집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나서 26세 까지 그곳에서 성정하였으며, 후에 대전 인근지역에 있는 회덕의 송촌 및 비래동 등에서 살았으므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회덕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조 11년(1663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고, 효종 때 이조판서가 되어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그 후 우의정 및 좌의정까지 올랐고, 숙종 5년(1689년)에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재 심문을 받기 위하여 한양으로 압송되는 길의 중간 지점이 되는 정읍에서 83세 이라는 늙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는 비운의 학자이다.

일행의 친구 증 한명이 "송(宋)" 씨 집안의 여인과 결혼한 죄(罪)로 인하여 부인이 준비하여 가지고 온 소주 한잔을 올리고 나서, 부부가 성의를 다하면서 절을 올리는 모습 옆에서 사진으로 담아본다.

 

< 송시열 묘소 앞에서 절을 하는 "송씨 부부" >

 

3. 점심식사.

돌계단 따라 천천히 내려와서 밑에서 기다리는 친구들과 긴급 협의하는데, 서울에 살고 있는 한 친구가 작년 가을 아들 결혼기념으로 점심식사를 한우고기로 한턱 선사하겠다는 제의로 청천면사무소 나와 주민들에게 문의하니 괴산군에는 좋은 한우고기가 없고 인접하게 있는 보은군청 근교에 좋은 고기가 있다고 한다.

아직도 점심시간 까지 다소 시간적인 여유가 발생하므로 드라이브도 겸하며 공림사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천천히 운전하여 보은군청으로 들아가는데, 강변에 있는 농협 한우촌을 찾아서 푸짐한 고기를 구입하여 2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서 술과 함께 맛 있는 한우 불고기에 취하여 본다.

 

< 보은 시내 식당에서 "한우고기" 를 즐기는 친구 >

 

< 역시 "한우고기" 를 즐기는 부인들 >

 

충분하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놀다가 각자의 집으로 출발하는데, 모두가 상행의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울 방향으로 떠나가지만 우리부부만 하행의 대구 방향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출발한다.

음주로 인하여 Wife가 운전대를 잡고 내려가다가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으므로 더 쉬었다가 떠나기로 하는데, 대구로 내려가는 길의 방향에 있는 법주사로 길을 잡아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