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회.(고등학교 동문 모임)

충북 보은군 법주사 앞에 있는 정2품 소나무 구경과 더불어 "선병국가옥" 을 방문하면서.(3)

용암2000 2013. 8. 5. 23:33

둘째날 (28일 : 일요일 오후)

 

보은군청 인접 지역에 있는 한우불고기 식당 앞에서 친구들과의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으므로 나는 속리산이 품고 있는 법주사 방향의 이정표 따라 추가 관광을 가지도록 계획을 변경하는데, 법주사는 3년 전(2010년 2월 27일) 대학교 기계과 동문회에서 1박2일 동안 머물어본 곳이라 경내 관람보다는 입구에 있는 계곡에서 여가나 가져보자는 마음으로 길을 잡는다.

 

4. 정2품 소나무 관람.

한 10여 분 정도 운전하여 가면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2품 소나무" 를 다시 대면하여 지는데, 비록 나무의 왼편 가지들이 다 소실되어 균형미를 잊어버린 나무로 변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굳건하게 자라면서 위풍 당당한 모습을 대면하여 보니 감격스러움이 일어나는 나무가 되어진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2품 소나무는 수령 800년 정도로 추산되는 연송 나무으로써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인접지역 서원리에 천연기념물 제352호의 수령 약 600년 된 "정부인송" 나무를 거닐고 있는 노송이다.  

조선 제7대 "세조대왕" 이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 노송의 가지가 어가의 연에 걸리므로 대왕이 "연이 걸린다" 라고 하자 가지가 스스로 위로 올라가므로 정2품의 벼슬을 하사 하였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지고 있는 야사(野史)이다.

 

< 새롭게 대면하는 "정2품 소나무" 모습 >

 

< 회손되기 전에 찍은 "정2품 소나무" 전경 > 

 

정2품 소나무 인접지역에 새롭게 연꽃 단지를 조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연꽃을 감삼하고 있으므로, 우리 부부도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충분하게 휴식도 가지면서 연꽃단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다가 속리산을 떠나 다음 코스로 이동한다.

 

< 정2품 소나무 옆에 있는 "연꽃 단지" >

 

< 활짝 핀 "연꽃" 을 구경하면서 >

 

< "연꽃 밭" 가장자리로 산책하는 사람들>

 

5. 선병국가옥 방문.

법주사 입구에서 대구로 가는 길의 중간지점에 있는 장안면사무소 앞에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으로 들어가 보는데, 선병국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19년 부터 1921년 까지 3년간 약 3.900평의 대지 위에 건립한 99칸의 전통가옥으로써, 당대 제일의 목수들을 가려 뽑아 이상형의 집을 지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원래 선병국씨의 집안은 전남 고흥이 본향 인 "보성 선(寶城 宣)" 씨 가문의 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선약해씨의 후손이자 선병국씨의 할아버지 선영홍씨가 1903년도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 터로 유명한 보은군 장안면 하개리로 이사와 그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선병국가옥은 일제시대 식민지 학교 교육을 거부하고 전통 교육을 전수하기 위해 건물 동편에 "관선정(觀善亭)" 이라는 사당을 운영하면서, 보은 향교인 명륜당에도 서숙을 설치하고 사재를 털어 일제 시기에도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인재 양성에 힘을 쏟은 터전이었다고 한다.  

삼가천 개울이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는 솔밭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선병국가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면사무소 앞에 있는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가면, 가옥 주변을 감쌓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단지의 뒤편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주차장이 기다리고 있다.

 

< 주차장 입구 "선병국가옥" 을 알리는 이정표 >

 

< 울창한 숲과 야생화 꽃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단지 > 

 

손병국가옥은 가옥 전체를 보호하는 흙으로 만든 돌담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오른쪽에는 안채, 왼쪽에는 사랑채, 중앙의 뒤편으로는 사당 건물로 구성된 집들이 각각 독립된 구조를 하고 있어 매우 독특한 형태의 구조이다. 

 

< "선병국가옥" 의 배치도와 설명서 >

 

주차장에서 정문으로 들어갈려면, 가옥 왼편의 흙담 옆으로 만들어진 길 따라 건물의 반 바퀴를 돌아서 앞으로 돌아가야만 정문의 솟을대문을 만난다.

일반적으로 손병국가옥의 관람은 사당 뒤편에 있는 쪽문 "사주문" 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 안채의 또 다른 쪽문으로 들아가서, 내부를 관람하는 것이 사람의 움직이는 동선(動線)을 최소화하는 방법이 되겠다.   

 

< 선병국가옥 정문으로 돌아가는 "흙 돌담길" >

 

< 선병국가옥으로 들어가기 위한 뒤쪽에 있는 쪽문 "사주문" > 

 

뒤편 쪽문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면서 오른편 사당을 구획하는 담 옆으로 조금 들어가면, 왼편 구석에 수 없이 많은 장독대가 가지런하게 줄을 형성하고 있다.

범상치 않은 가옥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안채 뒤편에 도착하면 또 다시 작은 쪽문이 있는데, 이 쪽문 옆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판매한다는 안내판에 무질서하게 쓰여져 글씨를 볼 수 있다.

 

< 뒤편 쪽문을 통과하면서 왼편으로 만나는 "장독대" >

 

<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 옆에 있는 "된장" 판매 안내문 >

 

안채 쪽문을 통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윈편으로는 "H" 자 형태의 안채를 만나는데, 이 안채 건물에 사용하고 있는 기둥은 전면에는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있고 건물 뒤편으로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안채 구조는 대청과 툇마루가 상호 통하게 만들어져 있어, 사람이 기거하기에 편리하게 짧은 동선으로 만들어져 있어 한옥으로써 매우 실용적(實用的)인 건물이 되어진다.

 

< 정면에서 바라보는 "안채" 모습 >

 

< 약간의 각도를 두고 바라보는 "안채" 옆면 모습 >

 

현재 이 건물에는 선씨의 종손과 종부가 살면서 전국에서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고택 체험의 장소로서도 제공하여 주고 있으며, 더불어 된장, 간장, 고추장 만드는 무료 체험을 통하여 보다 우수한 한국의 전통 음식 문화을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안채 전면에 있는 넓은 마당의 가장자리 따라서 외부와의 단절을 하기 위한 담장 형태의 "ㄷ" 자 모양 행랑채 건물이 내당의 보호막 같이 빙돌아 만들어져 있는데, 이 행랑채 건물의 제일 좌측에는 안채로 들어오는 중문 "솟을대문" 과 더불어 연이어 문간방, 구들, 광 등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카운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 안채를 보호하고 있는 "행랑채" 모습 >

 

< 안채를 나와서 바라보는 "행랑채" 의 뒤편 모습 >

 

오늘은 고추장 담그는 체험이 없는 날이라써 그런지 한가한 고택(古宅)이 되어지고 있으며 울타리 형태를 하고 있는 행랑채 방에는 고택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이나 고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거주하는 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각 방 앞에는 주인 잃은 검정 고무신 몇 켤레만 놓여 있다.

안채 중문의 솟을대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면 넓은 마당에 도착하여 지고, 그 마당을 구획하는 담장의 중앙에 선병국가옥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문 "솟을대문" 을 자리잡고 있다. 

 

<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솟을대문" >

 

< 선병국가옥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솟을대문" >

 

 정문을 통하여 울타리 밖으로 나아가면 전남 고흥에 있는 선조 선씨를 기리는 비석이 도로공사로 갈 곳 없이 방치하고 있는 비석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3개의 비석과 더불어 그 옆으로 철로 만든 선병국 선생님의 선행을 기리는 "시혜비(施惠碑)" 가 세워져 있다.

 

< "보성 선" 씨 의 선조를 기리는 비석 >

 

< 선병국씨의 선정을 기리는 "시혜비" >

 

그 시혜비 옆 솔밭 숲으로 "선처흠(宣處欽)" 의 효행과 그의 부인 경주 김씨의 효열(孝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효열각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이 효열각은 선씨 집안의 선행의 역사와 더불어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내력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효열각" 으로 들어가는 문 >

 

< "선처흠과 경주김" 씨를 기리는 비석 >

 

다시 정문인 솟을대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서서 앞으로 보면 선병국가옥의 사랑채 건물이 담장으로 지붕 만 보이고 있으며 그 담장 복판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우측 옆으로 쪽문이 있는데, 쪽문만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의 넓은 마당에 도착하여 진다.

 

< 잠겨진 대문 뒤편애 있는 선병국가옥의 "사랑채" 모습 >

 

이 사랑채를 구획하는 담장 주변과 마당 가장자리로 사시사철 꽃이 피도록 잘 가꾸어진 정원과 더불어 고목의 소나무 한 그루가 이 건물의 균형미를 더하도 있다.

 

< 사랑채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정원과 소나무" >

 

마당을 통하여 사랑채로 들어가면 여기도 'H" 자 모양의 고옥 건물이 축대 위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고옥 건물의 좌향은 동남쪽으로 안채와 직각 축으로 하여 남동쪽 방향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 정면에서 바라보는 H 자형 "사랑채" 모습 >

 

<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랑채" 모습 > 

 

사랑채 기둥 전체가 대궐이나 왕실에서 사용하는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은 정면 5칸에 측면 1칸 반의 2고주 3량가로 만들어 지고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평면 구성은 동쪽으로 한칸이 부엌이고 사랑방에 2칸, 사랑방의 서쪽으로 1칸의 대청과 작은 사랑방이 이어지고, 부엌 위쪽에는 다락을 설치하였으며 부엌 앞 퇴에는 골방을 두고 있으며 사랑채 앞 툇마루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건물이다.       

작은 사랑방에는 매우 아름답고 고운 한 중년의 여인이 건물을 관리하면서 동시에 다도회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청마루의 처마에는 남송의 "주자" 가 쓴 글을 집필하여 파란 글씨로 "위선최락(爲善最樂 :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정면 대청마루 처마에 있는 "위선최락" 글씨 >

 

사랑채를 관리하는 중년의 여인에게 위선최락이라는 뜻을 물어보는데, 그녀는 이 집 종손의 여동생으로 중국의 무예 파룬궁을 수련하므로 몸이 좋아졌고 머리도 검은색으로 다시 자라나는 변화를 가져오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하면서 아마 위선최락은 그녀의 마음 속에 숨겨진 뜻을 글로 표현한 무언의 암시를 나타내는 의중이 아닌지 모르겠다.

선(禪)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에서 파룬궁이 왜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전파하므로 정부는 순간적으로 공산당 당원의 숫자를 능가하는 사람들로 운동이 보급되므로 공산당 체제 위협을 느낀 정부는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현재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포기하고 있다고 한다.

파룬궁에 관련되는 소책자 몇 권 선물로 받고서 옆에 있는 안채 방향의 쪽문으로 나와 뒤편으로 돌아가는데,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북편에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사당(祀堂)" 건물을 만나지만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관람이 불가능하여 진다.

 

<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 "사당" 건물 >

 

이곳 사당 옆으로 돌아가면 처음 고택을 구경하기 위하여 들어왔던 뒤편의 쪽문 사주문에 도착하면서 선병국가옥에 대한 관람이 종결되는데, 다소 무더운 여름의 오후 시간이라서 그런지 짜증스러운 관람이 되어지지만 그래도 넓은 터를 가지고 있는 99칸의 선병국가옥을 관람할 수 있다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 된다.

이로써 금년 2013년에도 우암회 1박2일의 하기휴가 일정을 모두 소화시키고 속리산 Toll gate를 통과하여 대구로 출발하는데, 모두가 무사히 가정에 안착하였다는 전화가 잊지 않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