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문화와 산행.

나의 조상 뿌리가 있는 대구 달성군 박팽년 선생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육신사" 를 관광하며.

용암2000 2009. 10. 10. 09:06

 

* 서언

우리 고장, 대구 인근에는 충효정신을 기릴만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 중에서도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중시조가 되는 박팽년(朴彭年 : 1417-1456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묘골' 은 빼놓을 수 없는 충절문화의 본향인데, 그곳에는 만고의 충신으로 표상되는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六臣祠)' 가 있기 때문이다.

묘골은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달성군 하빈면에 있으면서 성주(星州) 방향으로 가다가 동곡에서 왜관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묘골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 달성군 하빈면 묘골로 들어가는 "이정표" >

 

이 이정표가 안내하는 대로 완만한 곡선길 따라 돌아서 들어가면 간단하게 동네를 찾을 것 같지만 그렇게 쉽지가 않다.

2차선 차도 옆 동네를 지나면서 야산 따라 약간의 커브를 돌아가는데, 이곳 커브 길 오른쪽 들판 사이로 좁은 2차선 길이 하나 있으며 그 길 앙에 사찰 입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주문 비슷한 문 '충절문(忠節門)' 하나가 서 있다.

 

< 묘골로 들어가는 길 중앙에 있는 "충절문" > 

 

이 문을 통과하여 몇 백미터 더 들어가면 야산 기슭에 도달하여 도로가 좌측 방향으로 굽어지면서 묘골 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지는데, 그곳에서 부터 몇 채의 기와집이 보이면서 입구에 사육신의 충효교육과 학생들의 현장 학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육신기념관' 을 먼저 만나고 더 내부로 들어가야 한 30여 채 한옥촌이 나타난다.

 

< 충효교육을 가르키는 "사육신기념관" 전경 >

 

< 묘골 마을로 들어서며 나타나는 "한옥촌"  전경 >

 

* 본론

이렇게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묘골이, 세상에 다시 이름을 알리기 까지는 기막힌 사연이 숨어있다.

박팽년은 단종 폐위사건으로 단종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상대로 단종 복위 운동 꽤하다가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다른 5명의 신들과 함께 70여 명이 멸족 당하는 화를 입었는데, 그래서 사육신에게는 후손이 없다.   

사육신은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에 의해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 3족까지 멸문 지하를 면치 못했는데, 박팽년의 집안에는 부친 박중림(朴仲林)과 박팽년 5 형제와 아들 2명, 손자 1명까지 모두가 참수 당한다.  

특별하게 박팽년 집안에는 3족까지 참수를 당하면서도, 앞으로 새롭게 태여 날 손자까지 죽임을 당하도록 세조에게 미움을 받는다. 

아버지 박중림은 세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와 경기도의 관찰사,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까지 지냈고, 박팽년은 1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제학, 충청도 관찰사, 형조참판을 역임 중 청백리로 유명한 인물이다.

세조는 박팽년에게 많은 신임을 주면서 자기 신하로 만들기 위하여 회유정책을 썻으나, 끝끝내 단종에 대한 충절을 꺽지않자 그 기상을 꺽기 위하여 다른 사육보다 더 가혹하게 앞으로 태어날 어린이까지 참수 시킬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도 사육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손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러니컬(Ironical) 하게도 세조가 제일 미워하여던 박팽년의 손자가 되는 "박일산(朴壹珊)" 이다.

박팽년 일가가 형벌을 받을 무렵 둘째 며느리가 되는 성주 이씨가 임신 중이었는데, 나라에서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비로 보내라는 엄명렸다.

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이 때 같이 생활하던 여종이 딸을 낳아 며느리의 지혜로 아들과 딸을 바꾼다.

박씨 집안의 혈손을 책임진 여종은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숨어 들어서 지극정성으로 이 아들을 키우고, 자신의 딸은 관비로 보내진다. 

사람들은 이 아들에게 박씨성을 가진 노비란 뜻으로 박비(朴婢)라고 불려지며 박비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세조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이 변하고 사육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제9대 성종이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있다는 내막을 알고서 크게 기뻐하면서, 많은 재물과 더불어 박비라는 이름에서 "박일산" 이라는 이름을 한다.

이렇게 하여 은둔의 세월은 막을 내리고, 묘골이 충절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일부 후손들은 벼슬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한양으로 다시 올라가지만, 나머지 후손들은 묘골을 터전으로 잡고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세월이 흘러 박팽년의 현손이 되는 "박계창" 이 고조부 박팽년 제사를 모신 후 잠을 청하는데, 꿈에 고조부와 함께 죽음을 당한 다섯분 충신들의 영혼이 집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어 다시 일어나 다섯분의 제물을 차려 제사를 모셔 주었다.

그후 인접한 지역에 "하빈사" 라는 사당을 건립하여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하빈사를 "낙빈서원(洛濱書院)" 로 바꾸면서 사액서원으로 승격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거 허물어 젖다가 다시 재건하여 사육신을 모시고 오던 것이 낙빈서원이라 한다.

 

< 초기 사육신을 모신 "낙빈서원" 의 모습 >

 

1974년 "충효위인 유족정화사업" 에 따라 현재의 장소인 묘골 제일 안쪽에 있는 야산 아래에 새로운 "육신사" 를 건립하여 위패(位牌)를 옮겨 모시게 되었다.    

그래서 7분의 위패(박팽년의 부친 포함)를 모시고 있는 육신사에서는 일년에 2번 추모행사를 드리고 있다.

현재 사육신의 무덤은 서울 노랑진에 있는 약 일만여 평 "육신사 공원" 에 안장되어 있어 박팽년과 이곳 묘골과는 전연 관련이 없지만, 유모(여종)가 숨어 들어온 곳이 묘골이며 박팽년 손자인 박일산이 유모의 손에서 자라난 곳이면서 그 후손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번창 되어지다 보니 자연히 묘골이 나의 선조 고향이 된다.  

나의 선조는 묘골에서 10대 조(祖)까지 살다가 분가하여 인접한 성주군 선남면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5대 조까지 살다가 또 다시 분가하였는데, 성주군 용암면으로 둥지를 이동하고 나서부터 내가 4대째 종손으로 살아가고 있다.   

 

1) 육신사 사당.

약 30여 호의 한옥촌으로 구성된 마을을 가로질려, 중앙길을 통과하면 약간 올라가면 조그마한 야산 앞에 고즈넉한 건물 육신사가 나온다.

먼저 사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되는 외삼문에는 "육신사(六臣祠)" 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이 붙어있는데, 글씨에 친근감이 배여 나온다.

 

<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쓴 "육신사" 외삼문 >

 

출입문을 통과하면 잔디밭과 더불어 왼편으로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연못 속에는 물풀과 더불어 연꽃이 만발하다.

조금 올라가며 홍살문이 나오고 홍살문 지나면 또 다시 넓은 잔디밭이 나오는데, 그곳 잔디밭 중앙에 사육신 내역을 기록한 육각기념비(六角記念碑)가 서 있다.

 

< 외삼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홍살문" > 

 

< 육각기념비와 숭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성인문" 전경 >

 

기념비 뒤 벽면에 박정희, 최규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으며,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글도 보였다.

다시 20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이 되는 '성인문(成仁門)' 나오는데, 평상시에는 내삼문이 잠겨져 있지만 이 문을 통과하면 일곱분의 위패(현재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 위패도 함께 있음)를 모신 사당을 만난다.

그래서 사당의 현판에는 "육신사" 라고 기술하지 않고 "숭정사(崇正祠)" 라는 현판이 붙여있다.

 

< 육신사의 위패가 모신 "숭정사" 사당 전경 >

 

최근 대구광역시 지자체에서 육신사의 성역화 사업으로 200여 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좌측 언덕 위에 부친인 박중림의 사당을 별도 건립있으며 그 앞에도 박팽년을 제외한 다른 충신들의 사당도 건립하고 있는데, 성삼문 등 각각의 후손들도(직계 후손은 없어도 방계 후손) 별도 추모 할 수 있는 공간을 건립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현재 육신사가 들어선 대지에는 박팽년 유복손인 박일산이 세운 종택이 있었던 장소인데, 오른쪽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太古亭)이 눈길을 고 있다.

보물 제554호로 지정된 태고정은 조선 성종 시절 박팽년의 손자가 되는 박일산이 99칸 집을 짓고 살 때 세운 정자 건물이라 하는데, 태고정 현판은 한석봉친필이라고 한다.

 

< 보물 제554호 "태고정" 건물과 한석봉 글씨인 "太古亭" >

 

현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므로 광해군 6년(1614년)에 다시 지은 것인데, 네모진 기단 위에 정면 4칸에 측면 2칸 건물로써 동쪽 2칸은 대청 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며졌다.

서쪽 방에는 아궁이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정자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뒤쪽 구석에 자그마한 부엌을 꾸며놓아 아기자기 함을 더하여 준다.

이 건물의 다른 묘미는 지붕에 있는데, 지붕을 살펴보면 동쪽은 '팔작지붕' 이고, 서쪽은 '맞배지붕' 에 '부섭지붕' 을 달아내어 마감하였는데, 부섭지붕이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고정시켜 퇴를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태고정은 맞배지붕의 합각에 서까래의 윗머리를 고정시키고 지붕을 달아 내었는데, 지붕 아래에는 방과 부엌을 꾸며 놓어므로 전체적으로 단조로우면서도 세부적으로 관찰하여 보면 아기자가 함을 엿보게 하는 건축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한 건물에 3개의 지붕 형상으로 만든 것이 특색이다 보니, 보물 제554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 박팽년의 7대 손이 되는 금산군수 숭고 선조의 별당 "충효당" >

 

이외에도 묘골에는 박팽년 후손들이 건립한 충효당, 도곡재, 삼가헌 등 등실등실한 고가들이 들어서 순천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한 때는 300호가 넘는 큰 동네 이었지만 현재는 30여 호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도곡재는 태고정의 건축기법을 흉내 내려고 노력한 건물이다.

도곡재는 정조 2년(1778년)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 의 살림집으로 건립되었는데, 1800년 대에 와서 유학자 '박종우' 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 라고 불렀다.

이 건물은 본래 일반 민가와 비슷하게 건축을 하였으나, 집을 짖고 난 뒤 개축하는 과정에서 태고정 처럼 안채와 사랑채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었다.

사랑채 부섭지붕 아래에는 대청을 연이어 높은 다락집 처럼 꾸며 놓았으며 안채 부섭지붕은 초가인데, 한옥은 퇴를 빼고 칸을 달아내어 변화를 주어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미완성의 건축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건물이다. 

 

< 유형문화재 제 32호인 "도곡재" >

 

<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삼가헌" > 

 

< "삼가헌" 건물의 설립배경 설명 >

  

사당이 자리잡고 있는 터는 금계포란형(황금닭이 계란을 품는 형상)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뒤편 산 마루로 올라가면 6각형 정자가 시원한 휴식처를 제공하야 주고 있고, 왼편 오솔길 따라 걸어가면 울창한 대나무 숲속으로 길이 이어진다.

 

< 마을 뒤편 산마루에 있는 "육각정" 전경 >

 

< "금계포란형" 모양을 하고 있는 묘골마을 전경 >

 

이 대나무 숲속으로 연결하는 오솔길 따라 가로 질려 내려가면 최초 서원이 되는 정면 4칸에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건축된 '낙빈서원' 이 아직도 건재하게 관리하고 있다. 

 

< "낙빈서원" 으로 들어가는 대문 >

   

아울러 육신사 주위를 뱅돌아 있는 야산을 한바퀴 돌도록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산림욕을 겸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제공하여 관광객의 즐거움을 더하여 준다.   

 

2) '순천박씨' 와 '박팽년' 사이의 족보를 요약하면.

박씨는 신라를 건립한 '박혁거세' 를 시조로 하여 신라 54대 경명왕 대에 9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광활한 한반도 땅 전체 관리하기가 어려워 막내 아들을 제외한 8명 아들을 각 현(고을)으로 봉군하여 나라를 통치한다.

그 아들들이 거주하는 고을마다 많은 후손이 번창하다 보니 '박씨' 성을 가진 후손들이 너무나 많이 번창하여 신라 말에 각 고을에서 살아가고 있자손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고을 이름을 붙여 분파를 시키는데, 최초에는 8개 본관으로 갈라지고 그 이후 많은 본관이 나누어져 현재는 46본관으로 확대되어져 있다.

제일 첫째 아들인 밀성대군은 밀양에서 정착하였으므로 그 후손에게 '밀양박씨' 로 명하면서 장손이다 보니 전체 박씨 중에 70-80% 차지하고, 6번째 아들인 강남대군은 순천에 정착하여 그 후손에게 '순천박씨(順天朴氏)' 로 명하였다.

순천박씨 시조가 되는 '박영규' 는 딸을 '견훤' 에게 시집을 보내 견훤의 장인으로써 많은 공을 세웠지만, 견훤이 아들과의 갈등으로 '왕건' 에게 투항하자 같이 투항하면서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다.

그러나 후손들이 실족되어 족보 유지가 되지않다가 고려 말 '박숙정( 朴淑貞)' 을 일조(一組)로 하여 다시 부활하여 진다.

조선으로 넘어와 박팽년은 순천박씨 일조 박숙정의 5대 손이 되고, 나는 24대 후손이 된다.

5대 박평년 시절에 박팽년의 10촌 까지 형제들이 총 19명이 되는데, 그 형제 19명 각각을 19개 '공파(公派)' 로 세분 되어져 각 지방에서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육신 6명은 세조 때 모두 관직을 박탈 당했지만 제19대 숙종 때 관직이 회복되고 제21대 영조 때 여섯분 다 동일한 관직인 '이조판서' 로 추증되는데, 그래서 아버지 박중림과 아들 박팽년이 2대에 걸쳐 연속적으로 이조판서가 되어진 집안이다.

아울러 사욕신 6명에게 각각 국가에서 시호를 내려주는데 성삼문은 충문(忠文), 박팽년은 충정(忠正), 이개는 충간(忠簡), 유성원은 충경(忠景), 하위지는 충렬(忠烈), 유응부충목(忠穆) 등 '충(忠)' 자가 들어가는 시호를 동시에 하사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시호 중 국가가 인정하면서 하사한 '충(忠)' 자가 들어가는 시호를 가진 문중은 6명이 유일하다고 한다.

박팽년은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육신사 사당이 있는 묘골을 집성촌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박팽년의 충정공파(忠正公派)를 일조(一組)로 삼고, 내가 속하는 노(魯)자 항렬은 순천박씨 충정공파 19대 손이 된다.

후손들은 묘골을 중심으로 하여 인접한 대구, 성주, 칠곡, 경산, 서울 등 흩어 생계 유지하면서 살아가지만, 순천박씨 충정공파는 다른 '공파' 보다 후손들이 매우 적다고 본다.

충정공파의 최근 항렬을 보면 18대손 동(東)자 항렬, 19대손 노(魯)자 항렬, 20대손 규(圭)자 항렬, 21대손 종(鍾)자 항렬로 이어지는데, 현존하는 인물로써 20대손이 되는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21대손 박종근 현 국회의원이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한 분들이고, 여자로는 삼성그룹을 창설한 고 이병철씨의 부인 '박두을' 여사님이 이곳 순천박씨 충정공파에서 출가한 인물이라 하겠다.  

 

* 결론

어찌하든  문중에서 오늘날 충정공파를 유지하게한 유모(여종)의 후손들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도 아직 찾지 못함이 아쉬워하고 있는데, 그분의 후손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이상과 같이 나의 뿌리와 육신사 및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내력을 간략하게 조명하여 기술하여 놓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