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문화와 산행.

조선 인조왕이 머문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는 "하목정" 건축물을 감상하여 본다.

용암2000 2010. 9. 20. 19:32

2010년 9월 18일(토요일).

 

작금 주말에는 조상의 음덕을 기억하고 산소도 돌아보면서 벌초를 하기 위해 몇 주 산행이 불가능하여 지는데,, 그래서 대구 인접하게 있는 문화재 한 곳을 돌아 보면서 간단한 산책도 겸하여 찾아 나선 곳 대구 유형문화재 제36호 "하목정(霞鶩亭)" 이다.

하목정은 대구에서 나의 고향 성주로 가는 길 중에 하나가 되는 성주대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있는 강변마을의 우측 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이다.

지금까지 고향을 가면서 하목정으로 몇 번이나 들어가 방문하여 보았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건성으로 보고 지나간 정자이지만, 오늘은 이곳 정자를 블로그에 올려 볼까하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지참하면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정자 앞에 기술하여 놓은 안내문을 읽어보면서 그 내용을 요약하여 본다.

 

< "하목정"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하목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과 성주군 선남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흘려가고 있는 낙동강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낙동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틀어 흐르면서 2Km나 되는 "형제암" 석벽이 병풍처럼 뻗쳐있는 명승지 옆을 골라 정자의 터가 자리잡고 있다.

하목정 주변으로 옛날에는 "하산유원지" 라고 알려져 있으면서 하목정 바로 아래에는 명사십리(明沙 十里)가 펼쳐지고, 그 명사십리 너머 멀리에는 가야산과 비슬산이 아련하기 보이고 해질녁에 저녁노을이 낀 명사십리 위 창공에 나는 철새를 보고 있으면 장관을 창출하는 장소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느릿느릿 흐르던 낙동강도 제방을 쌓아 강폭이 많이 줄어들어 아름다운 백사장도 살아지고, 하목정 앞에는 거대한 성주대교 2개가 높게 놓여져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다.

동시에 정자 앞에는 높은 빌딩의 Love Hotel와 더불어 낙동강변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메운탕 음식을 팔고 있는 유흥 음식점이 장사진을 이루다 보니, 옛 풍관은 어디로 갔는지 전연 볼 수 없는 번화가의 뒷골목 신세로 전락이 된 곳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한곳이 숨어있다.

하목정은 조선 선조 37년(1604년)에 팔공산 등지에서 임진왜란 의병장을 지냈고, 현감 벼슬을 한 낙포 "이종문" 장군님이 건립한 정자이다.

처음에는 안채와 사당, 사랑채, 행랑채, 중사랑채, 도장채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하목정과 안채, 사당만 단촐하게 남아 있다.

  

 낙동강변에 있는 "하목정" 전경 >

 

< 하목정 오른편에 있는 "사당 및 안채" 전경 >

 

이 중에서 "하목정" 은 다른 정자와 달리 공간구성에 특색을 가진 건물이다.

누(樓)와 방이 앞뒤로 덧달려 전체적으로 "丁" 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누(樓)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총 6칸의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고, 누마루 뒤쪽에는 丁자의 날개 쪽에 3개의 온돌방과 1개의 마루방이 나란히 붙어있다.

총 10칸 정자로써 구성되어 있고, 2개의 방 중에 가운데 방에는 뒤쪽으로 퇴를 빼 내어 2단 짜리 벽장을 설치하여 침구류 등을 넣도록 하여 놓았다.

특히 이곳 하목정의 특색은 지붕의  "처마" 와 "부연" 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처마의 곡선은 안으로 오목하게 이루어지지만 이 집의 경우에는 그 반대로 밖으로 약간 볼록한 느낌이 들도록 곡선을 주고 있다.

그래서 처마의 곡선이 마치 부채 모양의 선을 닮은 꼴인데, 이런 지붕처마를 소위 "방구매기처마" 이라고 한다.

 

< "방구매기처마" 와 "부연" 을 달고 있는 하목정 대청마루와 방 >

 

"방구매기처마" 는 처마 안쪽에 허리곡선을 주는 대신에 반대로 추녀를 짧게하여 둥근처마를 이루는 기술을 말하는데, 처마 아래에서 모서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근방 펼친 듯한 부채 살 하나가 허공에 떠 있음을 착각하게 한다.

또한 하목정에는 다른 정자에서 달지 못하는 "부연(附椽)" 을 달고 있어 차별화를 나타내고 있는데, 원래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짖는 정자라도 부연을 달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지만 하목정은 지붕 서까래 끝에 부연이라 하는 네모진 짧은 서까래를 설치하고 있다.

부연은 처마를 위로 들리게 하여 날아갈 듯한 곡선을 이루게 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삼국시대 이래 고급 건축에서만 이 같은 건축기법을 사용하였다.

 

< 측면에서 본 아름다운 "팔작지붕" 형태 >

 

이 집에 부연을 설치한 것에는 특별한 뜻이 있는데,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왕이 되기 전 "능양군" 시절 이곳 하목정을 지나가다가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하목정에서 하루밤 유숙하게 되었다.

훗날 능양군이 임금이 되고나서 이 정자를 지은 낙포 "이종문" 장군의 맏아들 "이지영" 이 왕으로 부터 강론을 듣는 자리에서 왕이 옛날을 잊지 않고, "너의 집 하목정은 강산 경치가 좋은 곳에 지여진 건물인데 부연을 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그래서 이지영의 답변에서 "일반 평민의 집에는 감히 부연을 달 수가 없다고" 하니, 인조는 "정자는 사가(私家)와 다르니 개축하여 부연을 다는 것이 옳다" 라고 하며 내탕금 200냥을 하사하여 개축하게 하였다.

아울러 하목정이라는 정자 이름도 하사를 하였는데, 하목정이라고 하는 것은 당나라 시인 "왕발" 이 중국 강서성에 있는 등왕각이라는 정자에 머물면서 지은 "등왕각서"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면서 아마 하목정이 중국의 등왕각과 너무나 유사한 풍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 :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 :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  

 

이 하목정 주변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정자 뒤편에 아담한 연못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연못 주위에는 아람들이 "배롱나무" 에는 백일 동안 붉은꽃이 만발하게 피면서 정자의 운치 더하여 주고 있다.

건물 뒤편으로 사당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오솔길에서 하목정 지붕을 내려다 보면 환상적인 용마루 곡선미(曲線美)를 볼 수 있다.

그 곡선미는 마치 날아가는 따오기 날개와 같고 날씬한 "오드린햅번" 히프선이 되는 "S" Line을 하고 있어, 조상의 지혜가 묻어나는 건축기술(建築技術)을 볼 수 있다.

 

< 날씬한 "S" 자 허리 Line을 하고 있는 용마루 선 >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사당(祠堂)" 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으나,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들어가 참배를 하지 못함이 애석하게 만든다.

이곳 사당은 이지영의 증손자가 되시는 "이익필" 장군이 영조 때 "이인좌의 난" 을 평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문무 3등공신에 봉하여 졌고, 그가 죽자 나라에서 "불천위(不遷位)" 를 내려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참고 : 불천위란?

            큰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써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 즉 "불천지위(不遷之位)" 의 줄임 말이다.

            불천위에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유림불천위(懦林不遷位)" 혹은 "사불천위(私不遷位)" 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유림불

            천위보다는 국불천위가 더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국불천위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문묘(文廟)" 에 배향되어 있는 사람들로써, 한국 사람에서는 문묘 배향자는 모두 18명이다.

            이 밖에도 왕이나 왕자, 부마 등도 국불천위의 대상에 속하고 유림불천위나 사불천위는 그 수가 대단히 많은데,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사람들은 일단 그 대상으로

            볼 수 있다.

            불천위는 그 자손들이 있는 한 분묘와는 별도로 사당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러한 제사를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 혹은 "불천위대제(不遷位大祭)" 라고

            한다.

 

< 이지영의 증손자 "불천위" 를 모시는 사당과 배롱나무 >

 

사당 내부에는 그의 영정 2점을 비롯하여 갓, 큰칼, 갑옷 등이 보존되어 있으나, 금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야 하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러나 저러나 점심시간이라 나오는 길가에 있는 Love Hotel 주차장과 메운탕 집에는 차량과 함께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나, 내가 하목정에 머물고 있는 시간 내내 정자 내부에는 아무도 방문하지 않고 적막감이 묻혀 있는 문화재를 보고 있으니까 정말 비애를 느끼는 장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