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 고속도로에서 현풍 Toll gate를 나오자 마자 "달성2차산업공단"(옛 : 구지공단) 방향으로 들어서는 길 옆 아담한 연못이 하나 있고, 그 연못 주변에 크다란 은행나무 한그루와 더불어 조그마한 숲을 이루고 있는 뒷편에 오늘 내가 찾고자 하는 "현풍곽씨 12정려각" 이 있다.
< 12정려각 앞에 있는 연못과 " 비슬산" 전경 >
현풍은 대구의 앞산이 되는 "비슬산(琵瑟山)" 을 품고 있으면서 옛날에는 비슬산을 "포산" 이라 하여 현풍곽씨를 "포산곽씨" 라고도 하며, 이 정려각 주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문화재 자료 제 29호가 되는 "현풍곽씨 12정려각" 은 선조에서 영조때 까지 솔례촌(率禮村)의 곽씨 일문(一門)에 포상하였는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 이다.
임금과 신하(군위신강), 아버지와 자식(부위자강), 남편과 아내(부위부강)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였던 "삼강오륜" 을 근거로 충신과 열녀, 효자에게 포상을 했고, 그들이 사는 마을 입구에 "정려각(旌閭閣)" 을 세웠다.
< 현풍 곽씨 "12정려각" 을 나타내는 안내석 >
좀 이름있다는 가문에서 1명의 열녀나 충신이 나와도 열녀문을 짖고 홍살문을 세우는 등 야단 법석이지만, 현풍곽씨는 한 지방 한 문중에서 12명의 충신이나 열녀가 동 시대에 배출하여 12정려각이 세운 것은 우리나라 어느 곳 어떤 문중에서도 없는 정말 위대한 가문이다.
"현풍곽씨 12정려각" 이라 새긴 커다란 비석 뒤로 삼강오륜에서 차용한 "삼강문(三綱門)" 을 통과하면 삼강 2효자, 열부 6정려, 4효자를 기린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는 화려한 정려각이 나타난다.
< 정려각의 정문 : 삼강문 >
"정려각"은 12칸 다포식 팔작집으로 조선 영조 때 한 곳에 모아 세웠으며, 6.25 전란으로 일부가 파괴된 것을 1963년에 중수하였다.
< 현풍곽씨 12정려각을 나타내는 전경 >
"일문삼강, 사효자려, 양효자려" 라 적힌 현판이 보이는데, 그에 대한 사연도 다양했다.
< "사효자려" 와 양효자려" 를 나타내는 현판 >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죽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그들을 따라 자결한 며느리, 왜놈을 피해 동굴에 숨어 있다 천식이 심한 아버지 기침소리에 발각돼 온몸으로 아버지를 지키려다 죽음을 당한 효자 네 명, 아버지가 죽자 어른도 따라하지 못 할 애절한 곡소리를 냈다는 4살과 5살의 어린 아이의 두 효자, 곽씨 일문에 시집왔다 절부와 열부가 돼 죽어간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대구광역시와 경상남도 및 경상북도 일원에서 그의 발걸음이 거쳐가지 않는 곳이 없는 망우당 "곽재우" 의 장군이 이 지방 출신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리라.
< 12정려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망우당 "곽재우" 무덤 >
역사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삼강오륜" 에 얽매인 조선 여인의 애달픈 삶이 느껴졌다.
남자는 나라와 부모를 위해 죽어 상을 받고, 여자는 남편 때문에 죽어 상을 받아야 했던 서글품이 여기 "현풍곽씨 12정려각" 에 잘 표현하고 있다.
현풍곽씨 문중에서 내려오는 "忠孝世業 淸白家聲 萬代不易"(충성과 효도를 대대로 물려오는 업으로 삼고, 쳥렴하고 결백함을 집안의 명성으로 삼으며, 이를 대대로 바꾸지 말라)라는 가훈이 오늘도 그들의 후손 가슴 속에 깊숙히 묻혀서 내려오고 있다.
< "현풍곽씨 가훈" 을 나타낸 비석 >
도로 건너편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높이 17m, 둘레 80Cm로서 150년이나 된 "회화나무" 한 그루와 그 앞에 거대한 450년 된 느티나무 1그루가 일렬로 서 있는데, 그 나무가 현풍 곽씨들의 후손들이 소리내지 않고 몸으로 선행을 실천하면서 가문을 이어가고 있는 역사를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 뒤편 150년 된 "회화나무" 와 앞면의 거목은 450년 된 "느티나무 >
이렇게 조상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현풍은 충(忠), 효(孝)의 고장이라 하겠지요.
유성룡 선생님의 징비록에 기술한 충.효 사상을 요약하여 보면 : <忠孝之外無事業>
즉 "충과 효는 임금님을 위한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도 아니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백성의 편에 선 백성을 위한 충.효가 근본이다." 라 한다.
정려의 역사성, 정신적 의의 및 가치관은 오늘날 기준으로 판단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정신과 의의(意義)는 본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지는 않겠는가?
대구 근교에도 이렇게 숨은 "문화유산과 전통" 이 산재하고 있으나 관심 부족으로 모르고 사는 것이 애석하여 한번 기술하여 보니, 여러분들은 효녀와 절부, 열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나 있는지?
이번 기회에 Wife.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와 함께 이곳 "현풍곽씨 12정려각" 에 들려 교육과 동시에 그들의 문중도 한번 돌아보면 어떨지?
비록 세상이 바꿔 호랑이 담배 피우고 꽤꽤먹은 옛날 이야기나 하는 중 늙은이 취급하고 아무리 현재 사회가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고무신 바꿔 신는 것이 밥 먹듯이 일상화 된 사회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래도 뿌리가 깊은 집안은 꼭 그렇지 않도록 부모님의 헌신적인 교육을 통하여 온고지신의 정신과 교육을 시켜 문중의 전통을 계승하는 집안이 많다는 것을 알고나 있겠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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