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 문화와 산행.

대구 달성군에 자리잡고 있는 김굉필 선생님 위패를 모신 "도동서원" 의 숨은 비밀을 찾아서.

용암2000 2009. 10. 4. 18:51

 

 

대구의 인접한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도동서원" 문화유산을 관람하기 위해 현풍시내에서 고불고불 한 길, 낙동강 기슭에 만들어진 농촌 길을 달려, 소형 승용차 겨우 지나 갈 정도의 좁은 도로 따라 아슬아슬한 "다람재" 고개에 이른다.

 

< 고개마루에 있는 "다람재" 고개 표시석 >

 

< 다람쥐 고개마루에 있는 "전망대" >

 

< 다람재 고개에 있는 "김굉필" 선생님 시비 >

 

이 고개의 가장자리에는 2층으로 된 정자가 하나 서 있는데, 이 정자에 올라 주위 풍광 내려다 보면, 앞에는 낙동강이 둥글게 흐르면서 그 뒷 편 나즈막한 야산 기술에 배산임수()를 하고 있는 북향의 "도동서원" 이 발아래 머문다.

 

< "다람재" 고개 전망대에서 본 "도동서원" 전경 >

 

"서원" 이란, 성리학적 고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설립한 조선조 최고의 "사립교육기관" 이다.

서원에 모셔진 선현의 지위에 따라, 서원에 속한 토지, 노비, 세금 및 병역의 의무가 면제되는 특혜를 누려 조선 말기에는 전국 903개의 서원이 난립했다.

흥선 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 를 단행하면서 47개소 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는데. 이때 남은 것 중 하나가 이 "도동서원" 이다.

"성리학의 도가 처음 동쪽으로 왔다" 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조선 5현" 가운데 한 분 "김굉필 선생" 의 위패 모신 서원인데, 김굉필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건립했고, 선조 40년에 "사액서원" 이 되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실천 중심의 도학이, 이 땅에 뿌리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분이다.

김종직의 수제자로 조선조 유학의 적통 이었으며 조광조와 김안국, 조식, 이황에게 사상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연산군때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에 휘말려 평안도와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 귀양지에서 사약받고 생을 마감한다.

달성 "도동서원" 은 영주 "소수서원" 안강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도동서원" 의 사당과 중정당, 토담은 보물로 지정 되어있는데, 고개 마루에서 본 서원의 형태는 제일 먼저 도로 옆에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약간의 경사면 따라 올라가며는 2층 형태 "수월루" 가 있으며, 이어서 사원의 영역을 표시하는 흙담으로 둘려 쌓여있는 담장, 그 담장의 중앙에 "환주문" 이라는 외삼문이 자리잡고 있다.

이 환주문 통과하며는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그 양쪽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당" 과 "서재당" 이 있으며, 서원 중앙에 웅장한 "중정당" 이 위엄을 갖추고 있다.

중정당 지나면 급경사의 계단이 있고, 그 계단 위에 작은 대문 "내삼문" 이 있으며, 그 대문 안 쪽에 선현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으로 된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며 입구 수월루 문에서 부터 사당문까지 일직선으로 지여져 있어 참, 질서 정련하게 되어있다.

승용차는 고개를 내려와, 서원 앞 넓은 공터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안내소에서 팜플렛 한장을 집어들고 돌아서며는 서원 앞 공터에는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 하나가 관람객 반긴다. 도동서원 건립을 기념해, 정구선생이 심은 것으로 유생의 학문이 은행처럼 많이 열리기 바랬던 염원을 담고있다. 하지만, 높이 20m, 둘레 8m 우람한 체격은 세월의 삶 무게 때문에 힘에 겨운지 콘크리트 기둥에 의지해 안쓰러움을 더하고 있다.

 

 < 삶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콘크리트 기둥에 의존하고 있는 "은행나무" >

 

도동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누각위에 올라서면 멀리 펼쳐지는 고령군 개진면의 넓은 평야와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의 경치 즐기면서 시와 학문 논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누각이지만 지금은 많은 파손으로 인하여 긴급한 보수가 요구 되어지므로 출입 금하고 있다.

 

 < 많은 보수가 요구되는 "수월루" 전경 >  

 

수월루에서 "환주문" 으로 오르는 계단과 화단에는 연꽃무늬와 태극문양의 계단으로 꾸며져 있어 아기자기한 멋을 보여준다.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 "환주문(喚主門)" 은 서원에 들어 갈때, 아무리 직책이 높은 선비도 머리의 "갓" 이 건물에 닿지 않기 위하몸을 잔뜩 낮추어야만 들어갈 수 있도록 지여져 있다. 환주문 꼭대기 사모지붕 위에 "절병통" 이 놓여 있는데, 그 통이 작지만 아름다운 한국 정서가 물씬 풍기게 만들어져, 웃슴이 절로 온다.

 

< 환주문 : 사모지붕과 "절병통" >

 

환주문에서는 서원의 본당과 경계를 나타내고 또한, 서원의 무분별한 출입과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1.5m 정도 높이로 흙담으로 둘려 쌓여 있는데, 이 흙담 형태는 한 줄은 "평기와" 를 넣고 다음에 다시 흙을 넣고 그 위에 "둥근기와" 를 넣는 형태로 반복하여 쌓여있고, 여기서 "평기와" 는 지구를 나타내고, "둥근기와" 는 태양을 나타내는 음양오행의 조화 따르고 있다.

     

< 음양오행에 따라 축조된 "흙담" > 

 

그 시대 벌써, 우주의 음양을 건축에 적용했다는 선조들의 지혜 담고서 축조하여 이 흙담이 국내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 될 정도로 문화적인 가치 가진 담이다.환주문을 들어서며는 서원의 핵심 건물인 "중정당(中正堂)" 이 크다랗게 위용 자랑하고 있으며 그 좌우에  "동재" 와 "서재" 가 있다.

 

 

< 동재와 서재를 거닐고 있는 "도동서원" 전경 > 

 

중정당이 북향으로 지여져 있어, "서재" 가 동쪽에 있고 "동재" 가 서쪽에 있는 점이 특이한데, 작은 마당을 가운데 둔 동재과 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 였는데, 서로 다른 구조하고 있어 눈여겨 볼 만하다. 

양반 자제가 머무르는 "동재" 인 거인재(居人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 원기둥이며, 쪽 마루가 있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벽에 판문을 두었고, 아궁이가 건물 뒤쪽에 있다.

 

< 양반의 자제들이 머무는 "동재" 건물 >  

 

하지만, 평민 자제가 머무르는 "서재" 인 거의재(居義齋)는 둥근기둥인 원주를 함부로 쓸 수 없고, 당시 규정에 따라 사각기둥으로 붕을 받쳤으며 "민도리" 형식의 건물이다. 쪽 마루는 벽으로 막혀 있고, 아궁이가 건물 앞쪽에 있어, 이렇게 작은 건물 하나에도 철저한 계급의식을 담고 있다.

 

 < 아궁이가 건물 앞에 있는 "서재" 건물 >


사당의 Main 건물인 "中正堂" 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 는 뜻이며, 중정당도 1.5m 정도 축대를 쌓아, 높게 기초를 만들고 나서 그 위에 건물 건립하였다.

 

 < 약 1.5m의 높이로 만들어진 "축대" 전경 >

 

그런데, 이 축대에 쌓은 돌을 관찰하여 보며는 얼마나 과학적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감탄의 연속이다. 축대를 쌓는 대부분의 돌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크기와 형상이 각각 다르다.그 중, 일부 돌은 직6각형, 직8각형, 직12각형의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만들어져 상호 결합이 되어 있는데, 그 결합 사이에는 종이 한장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틈이 없도록 되어있다.

 

< 직12각형으로 만들어진 기하학적인 "축대 돌" 형상 > 

 

페루의 "인카인" 들이 건립한 "마츄피추" 의 석축이 세계에서 최고의 건축 축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석축을 쌓아 놓은 돌은 비록 도동서원 것 보다는 크지만, 최고 각형은 직8각형으로 되여 있으므로, 이 곳 도동서원의 석축 만든 기술에는 게임도 안된다.그래서, 매년 페루 국립대학교의 건축 학도와 교수가 이 곳을 방문하여 한국의 건축기술을 연구하고 있지만 자기 조상들 보다 수 백년 먼저, 이렇게 다각형의 석축을 쌓았다는 사실 보고 혀를 내둔다고 한다.

그 시대 한국과 교류를 통하여, 도동서원의 축대 쌓기 기술 전수 받았는지 아니면, 별도로 인카인 자신들 머리로 직접 쌓은 독특기술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직 해답 찾지 못하고 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좀 머리가 돌아가는 광주에 있는 모 교육대학교에서는 향후, 어린이를 가르키는데 필요한 지식 부여하기 위해 방학기간 이용하여 사비를 쓰면서도, 졸업하기 전까지 이곳을 방문하여 이 축성 쌓은 방식에 대한 연구논문을 작성하지 않으면, 어린이 가르킬 능력부족으로 학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석축 좌우에 "유림학생" 들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석축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 옆에는 다람쥐 형상의 돌이 있는데 오른쪽은 위로 보고 있고, 왼쪽은 아래로 보고 있어 유생들에게 무언의 질서를 가르키고 있어, 참 과학적인 발상이다.

 

< 왼쪽방향에 아래로 향하고 있는 "다람쥐 형상" 의 돌 >

 

그 축대 위,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건물이 건립되여 있는데, 이 건물 중앙에 2개 "도동서원" 이라 적힌 현판과 1개 "중정당" 이라 적힌 현판이 있으며, 선조 임금이 하사한 "도동서원" 사액 현판은 퇴계 이황 글씨로 집판 한 것이라고 한다.

 

 < "도동서원" 과 "중정당" 의 현판 > 

 

중정당 정면 6개의 기둥상단에는 약 1m 정도의 폭으로 흰 한지가 둥굴게 붙여 있는데, 이 흰 표시가 멀리서도 도동서원이 국가의 녹을 받고 있는 "사액서원" 이라는 것을 알린다.

 

 < 중정당 건물 : 기둥상단에 흰 표시로 된 "도동서원" > 

 

모든 사람들이 사액서원 앞을 지나 갈 때 이 표시 보고서는, 말 등 타고 가는 것에서 내려 "예" 를 표하고, 지나 가야만 한다.

그래서, 6.25 때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 대구 방향으로 쳐들어 올려고 배 타고 건너 오다가 이 징표 보고서 "예" 를 표하기 위하여 배에 내렸다가 모두 익사하여 낙동강을 건너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도동서원과 대구가 전쟁의 피해가 없다고 한다.  

"중전당" 기단 앞에는 우기에 낙동강 물이 이곳까지 범람하지 않기를 기원하던 염원이 여의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용에 담겨 있고 "환주문" 에서 "중정당" 을 있는 중앙 돌길 끝자락엔, 험상굳은 표정하고 있는 "돌거북" 이가 중정당의 위엄을 보여준다.

 

 

 < 중전단 기단에 있는 "여위주" 물고 있는 "용" >

 

 

< 중정당 앞 마당에 있는 "돌거북이" >

 

중정당 좌우에는 2개의 방이 있는데, 왼편에 있는 방의 미닫이문은 북향인 도동서원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판문이다. 사당 우측 옆에는 "정료대(庭燎臺)" 라는 한 50Cm 높이의 작은 4각 돌이 놓여 있는데, 정료대는 돌기둥과 사각형 상석으로 만들으며, 솔 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조명대" 이다.

 

< 사각기둥으로 만들어진 "정료대" > 

 

본당 뒷편에서 "사당" 까지 18개의 석단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꾸며져 있고, 그 비탈면에는 남다른 분위기를 주고 있으며, 진달래, 매화, 모란, 배롱나무, 국화 등의 꽃을 심어 봄, 여름, 가을, 철 따라 다른 꽃을 피게하여 사시사철 손님들이 방문하여 꽃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볼거리 만들고 있다. 

 

< 사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내삼문" >

 

사당을 올라가는 내삼문 아래 석축엔 태극무늬 및 연꽃 봉우리와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중정당 돌길의 현무처럼 이곳 봉황도 인상이 매우 험악한데, 이 계단을 올라서며는 내삼문이 나오는데, 큰 열쇠로 굳게 닿혀있다.

 

 < 계단 중앙에 험상 굳은 형상하고 있는 "조각돌" > 

 

일반적으로 문이 닫혀 있었서 사당에 들어감이 불가능하지만 어떻한 기회로 내부 들어가는 길이 발생하여 사진 촬영이 가능하여 지는데, "김굉필" 선생과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이 가장자리 제일 높은 후미진 곳에 위치해, 위엄이 서려있다.

 

< "김굉필" 과 "정구"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전경 >

 

< 사당 오른편 있는 건물로써 사당에 사용하는 "제기" 류를 보관하는 "증반소" > 

 

함부로 근접할 수 없음을 알리는 무언의 메시지다.

그 분들의 영정 볼 수가 없지만, 1년에 두번 제를 지낼 때, 영정 접할 수 있으므로 경건한 마음으로 서원 둘려 보고서 옛 선비들이 건축한 과학적인 건축미와 숨어있는 건축양식을 한번 기술하여 보니 많은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관찰하면서 역사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것도 한 지식이 되겠지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