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9일.(토요일)
서울에 거주하는 3명의 대학교 동문과 대구에 거주하는 1명의 동문이 금요일 오후 나의 농장을 방문하여 내가 일년 동안 재배하면서 보살핀 "초석잠(草石蠶)" 수확과 동시에 농장에 마련하고 있는 방가로에서 하루밤을 유(遊) 하기로 한다.
다음날 아침에 씻는 것과 동시에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장 인접지역 가야산 언저리에 있는 가야호텔(옛 : 국민관광호텔)로 들어가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나서, 호텔 지하에 있는 목욕탕으로 내려가 샤워의 시간을 가진다.
< 가야산국립공원 백운지구에 있는 "가야호텔" >
그러고 나서, 모처럼 서울에서 먼 발길을 잡은 동문들의 즐거운 여행과 추억의 시간을 만들기 위하여 가야산국립공원(伽倻山國立公園)이 품고 있는 관광지를 구경하기로 하는데, 먼저 국민관광호텔 인접지역에 있는 심원사를 방문하여 보기로 한다.
1. 심원사 관람.
심원사(深源寺)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에 있는 가야산국립공원 백운지구(白雲地區) 주차장에서 왼편으로 이어지는 소로의 길 따라 한 500m 정도 올라가면, 가야산 산행코스로 유명한 만물상의 최고 정점이 되어지는 상아덤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 "심원사" 입구에 있는 입석 >
<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심원사" 전경 >
< 사찰의 오른편 방향에 있는 "만물상" 산행코스 >
이 심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진 사찰로써, 고려시대 성주 출신의 명사 도은 "이숭인(李崇仁)" 이 본인의 기심원장로(寄深源長老)라는 시(詩)에서 "심원 옛절은 가야산 속에 있는..." 라고 기술하고 있다.
심원사는 고려말에도 옛절(古寺)로 불릴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찰이면서 조선 중종 때 지원(智遠)스님이 중수하여 크게 부흥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하여 중창하였으며, 그 후 여러차례 중수하였다가 18세기 말경에 폐사(廢寺)되었다.
심원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남북 약 80m, 동서 100m 정도의 대지(垈地)에 4단의 계단식 축대 위에 삼금당지(三金堂址)를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산지사찰(山地寺刹) 형태 임을 밝혀졌다.
이를 통하여 사지(寺址)의 규모와 위치를 확인하고 대웅전, 극락전, 약사전 등을 차례로 중창하여 옛 모습을 되찾으며, 심원사 경내에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3층석탑(제116호) 및 석조유물일괄(제525호) 등의 지정 문화재와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과 3층석탑" >
<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약사전" >
< 대웅전의 왼편에 있는 "극락전" >
< 대웅전 앞 마당 오른편에 있는 "문수전" >
< 대웅전 앞 마당 왼편에 있는 "종무소" >
< 사찰 마당에 있는 "석조유물" >
특히, 사찰의 제일 위쪽으로 가야산의 여신이 되는 :'정견모주(正見母主)" 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숭모전(崇母殿)이 자리하고 있다.
정견모주는 하늘의 신이 되는 "이비하(夷毗何)" 와 결혼하여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 과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는 수로왕의 어머니가 되어진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 "정견모주" 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숭모전 >
< 사찰 건립에 공헌한 사람의 "공덕비" >
아침이라서 그런지 적막감이 흐르고 있는 심원사 경내를 한바퀴 돌아보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해인사를 방문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경상남도 합천군이 되어지는 도(道)의 경계선을 넘어 홍류계곡 따라 해인사 경내로 들어간다.
2. 성철스님의 사리탑 참배.
해인사 입구에 있는 "성보박물관" 과 차거운 물이 흘려내리고 있는 홍류계곡을 지나 고도를 조금 상승하면 해인사 경내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고승들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부도탑 군락지를 만나는데, 그 부도탑 군락지 초입에 중생들에게 너무나 많은 교훈을 남기고 열반하신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봉안되어 있다.
< "해인사" 입구에 있는 노점상 거리 >
< 해인사 입구에 있는 "성보박물관" >
< 차거운 물이 흐르고 있는 "홍류계곡" >
< "해인사 경내" 로 올라가는 길 >
< 경내 입구에 있는 "부도탑" 군락지 >
태옹당 성철(性徹)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에서 탄생하여 1993년 향년 81세로 열반하신 스님으로 해인총림(海印叢林)의 방장과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및 제7대 종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올곧은 수행정신과 더불어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근대와 현대의 한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친 스님이라 하겠다.
< "성철스님" 사리탑을 안내하는 입석 >
< "사리탑" 으로 올라가는 입구 >
다른 스님의 부도탑과 함께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운을 현대식 조형 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 한다.
가운데 상부 구(球)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半球)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고 있으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과 수행과정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 성철스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리탑" >
사리탑을 둘러 싸고 있는 참배단은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므로 인하여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1998년 승철스님의 열반 5주년을 회향하였는데, 성철스님이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보라" 라는 가르침이 살아 있는 선(禪)의 공간이라 하겠다.
비록 아침이지만 많은 불자들이 방문하여 참배를 올리고 떠나가므로 인하여, 나도 간단하게 목례로써 합장과 더불어 그 분의 말씀 중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평범한 진리 속으로 몰입하는 순간을 가져본다.
3. 해인사 탐방.
부도 및 사리탑을 구경하고 나서 도로 따라 조금 올라가면 해인사 내역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과 더불어 영지(影池)라는 조그만한 연못을 만난다.
이 영지에는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시는 수로왕 부인이면서 인도에서 시집을 온 허왕후가 그의 오빠가 되는 "장유화상" 과 더불어 아들 7 형제가 가야산의 최고봉이 되는 칠불봉(七佛峰)에서 수도 정진하는 모습이 비쳤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연못이라 한다.
< 해인사 주변에 있는 "소리길" 안내도 >
< "해인사 내역"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 해인사 경내 입구에 있는 "영지" >
가야산은 해발 1,430m의 높이를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한 때 합천군 소속이 되는 우두봉이 최고의 높이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새롭게 발달한 GPS라는 문명의 이기로 인하여 성주군에 속하는 칠불봉이 우두봉 보다 3m 더 높게 측정되므로 가야산 정점이 바꾸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있는 산이다.
이렇게 해인사를 품에 안고 있는 가야산은 더욱 유명한 바람소리, 물소리, 목탁소리 등의 아름다운 소리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는가 하면, 함께 어우러지는 노송과 그 사이 비단결 같이 흐르는 홍류동 계곡으로 떨어지는 황금빛 물줄기 사이로 걷다보면 포근한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산이라 하겠다.
비록 칠불봉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연지에 비치는 칠불봉을 뒤로 하고 조금 올라가면 정면으로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이라는 글씨와 더불어 후면에는 "해동제일가람" 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일주문에 도착하는데, 일주문 앞에 거대한 돌에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입석도 만날 수 있다.
<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세계문화유산" 을 알리는 입석 >
< 해인사 첫 문이 되는 "일주문" >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자 우리 민족 믿음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모신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 이면서 이땅에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 되어 왔다.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가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 중앙 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 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어 지면서 해인삼매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인지하게 하는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년)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802년)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가는 좌우에는 수문장 같이 버티고 서 있는 수림(樹林)이 도열하고 있으면서 그 나무 사이에 죽어서 자연을 돌아가고 있는 한 그루의 썩은 나무 밑둥지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심었다는 나무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고사목" >
다시 몇 걸음 앞으로 전진하면 2번째의 문이 되어지는 봉황문(鳳凰門)에 도착하여 지는데, 일반적으로 봉황문은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면서 입구의 현판에는 "해인총림(海印叢林)" 이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 2번째 문이 되는 "봉황문" 앞에서 >
이 봉황문을 통과하면 조그마한 마당이 나타나면서 마당의 왼편으로는 우화당 건물과 더불어 기와장에 이름을 기술하는 시주처가 자리하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불교가 토속신앙과 함께 한다는 국사단(局司壇) 건물과 더불어 그 앞에 거대한 당산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당산나무에는 소원을 적은 오색종이가 나무의 둘레를 치장하고 있다.
< 봉황문을 통과하면 오른편으로 만나는 "국사단" >
< 국사단 앞에 있는 "당산나무" >
여기에서 다소 급경사가 되어지는 돌계단 위에 해인사의 3번째 관문이 되어지는 해탈문(解脫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해탈문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문으로써 불이문(不二門)이라고 불려지면서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籃)"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해인사 3번째 관문이 되는 "해탈문" >
이 해탈문을 지나면 넓은 마당과 함께 정면에는 사찰의 보루가 되는 2층 구조의 "구광루(九光樓)" 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구광루는 해인사의 중심 건물로써 화엄경 내용에서 따온 것으로 화엄경에는 부처님이 아홉 곳에서 설법을 하셨으며 그 때마다 설법(說法) 하시기 전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 해인사의 중심 건물이 되는 "구광루" >
이 구광루 앞에 있는 마당의 좌측으로는 해인종각(海印鐘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 마당에는 "해인십바라밀도" 라는 전(田)자와 같은 도형이 그려져 있으면서 많은 불자들이 두손을 모우고 기도하면서 도형 위로 걷는데, 십바라밀도는 길이 상호 엉키지 않고 시작점과 도착점이 함께하는 기하학적 도형이라 한다.
< 구광루 앞 좌측에 있는 "종각" >
< 종각 앞에 있는 "해인십바라밀도" >
아울러 종각 건물 주변으로 요사채 건물이 되어지는 사운당과 청화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 오른편으로는 불교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보경당(普敬堂) 및 만월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구광루 앞 오른편에 있는 "보경당" >
구광루 좌우측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서면 해인사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 마당에 도착하는데, 마당의 중심에서 오른편으로 약간 비켜 3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탑이 한쪽으로 기울러져 있는 이유는 사찰에서 일어나는 기(氣)의 평행을 유지함이라 한다.
<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 및 3층석탑" >
대적광전 앞 마당 좌우에도 많은 요사채 건물과 더불어 왼편으로 적묵당 및 오른편으로 관음전(觀音殿) 건물이 자리하므로 인하여, 많은 불자들이 건물 내로 들어가서 기도정진에 매진하고 있다.
특히, 이 대적광전에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도 어려운 7분의 불상을 모시고 있는데, 중앙에 본존 비로자나불을 두고서 왼편으로 목조 비로자나불, 목조 문수보살, 철조 관음보살이 자리하고 있으면, 오른편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 등 독특한 방법으로 부처님을 배치하고 있다.
이 대적광전 앞에 정료대와 더불어 왼편으로 대비로전(大毘盧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명부전, 응진전, 선열당 건물이 자리하므로 인하여 해인사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사찰 임을 느끼게 한다.
< 대적광전 앞에 있는 "정료대" >
< 대적광전 앞 좌우에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정료대" >
< 대적광전 왼편에 있는 "대비로전" >
대적광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높은 돌계단 위에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판전(藏經板殿)" 건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 입구에 대장경판(국보 제32호 및 제206호, 보물 제734호)의 구조와 더불어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국보 제52호) 건물의 제작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 대적광전 뒤편 "팔만대장경" 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
< 장경판전 내에 "팔만대장경" 배치 설명서 >
이 장경판전 건물에는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Rope로 줄을 쳐서 출입을 통제하면서 2명의 사람이 모서리에 앉아 지키고 있다.
장경판전 뒤편에 있는 법보전(法寶殿) 건물에서는 49재 등 사전 예약을 통하여 불경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고 있는데, 이 또한 돈의 위력이 앞서는 사찰이다.
<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전경 >
<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건물 출입문 >
< 장경판전의 뒤 건물이 되는 "법보전" >
법보사찰이 되는 해인사는 불보사찰의 양산 통도사, 승보사찰이 되는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3대(三代) 사찰로 꼽히는 이유는 이렇게 팔만대장경이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 및 기록유산을 간직하고 있게 때문이라 하겠다.
팔만대장경 경내를 관람하고 나서 사찰 왼편의 사잇길로 내려가면 독성각(獨聖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독성각 건물 앞 학사대 위에 신라말 고운 "최치원" 선생님이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의지하고 다녔던 지팡이가 소생하여 살고 있는 한그루의 전나무가 서 있다.
< 장경판전 왼편 사잇길 아래에 있는 "독성각" >
< 독성각 앞 학사대 위에 있는 "최치원" 지팡이 전나무 >
이 나무는 1.300년의 수령을 가지고 있으면서 높이가 30m, 둘레가 5.1m 가 되는 전나무로써, 최치원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 있으며 이 지팡이도 살아 있으니까 학문에 열중하라" 고 하면서 선경의 경지로 들어갔다는 일화가 내려오고 있는 나무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해인사를 관람하는 동안 시장기가 느끼지므로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과 같이 긴급하게 경내를 벗어나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는데, 정류장 주변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식사 시간을 가진다.
사찰 음식이 되는 산채 비빔밥과 더불어 식당주인이 직접 생산하였다는 막걸리로 해포를 풀어보는 시간을 가지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동문들이 3일차 관광은 전주 부근에서 관광하겠다는 계획을 가진다.
그래서 교통편은 해인사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이용하여 먼저 거창으로 이동하고, 거창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전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 다소 늦게 "점심식사" 를 하는 동문 >
< 다양한 반찬이 나오는 "산채 비빔밥" >
한참 식사를 즐기고 있으니 식당 주인장이 거창행 버스가 출발 할 시간이 인접하다는 통보하여 주차장으로 들어가 서울 동문들이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나서, 나는 금일 운전을 자칭하고 있는 동문 승용차를 타고 대구로 출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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