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2일.(월요일)
1. 해인사 주변에 있는 산내 암자의 탐방.
전국적으로 농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가뭄으로 인하여 나도 고향 농촌에서 머물면서 자라나는 농작물을 보살피다가 농원의 인접지역에 있는 경남 합천군 해인사 관광을 나서보기로 하는데, 나의 농원에서 해인사 까지 약 30분 거리가 된다.
홍류동 계곡 따라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의 중간지점에 있는 "대장경 기록 문화테마파크" 를 관람하여 보기 위하여 매표소로 들어가니 금일은 휴관일이 되는 월요일이 되여 관람이 불가능하므로, 계곡길 따라 고도를 상승하여 해인사 경내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나는 고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해인사를 자주 방문한 경험이 있지만 해인사 주변에 있는 암자를 관람한 경험이 없으므로 금일은 해인사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암자를 탐방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립하여 본다.
가야산이 품고 있는 소리길에는 바람소리, 물소리, 목탁소리, 새소리 등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와 더불어 우거진 노송 및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계곡의 물로 인하여,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걷는 트레킹 코스가 된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에 있는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시키고 나서 암자를 찾아가기로 하는데, 금일은 주차장 입구에 있는 성보박물관에도 휴관이 되므로 무척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방문하는 사람도 소수가 되어져 적막감이 흐른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한 마음으로 성보박물관 뒤편에 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 소리길 따라 걸으면 이내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는 자동차 도로와 잠시 만남을 가지지만, 소리길은 자동차 도로와 멀어지면서 계곡의 가장자리 옆으로 이어진다.
< 다리를 건너면 만나는 "기념품 판매점" >
< 자동차 도로에 있는 "검표소" >
울창한 숲을 통과하여 조금 걸어서 울라가면 선재카페가 나타나면서 몇 명의 스님이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카페 뒤편으로 돌아서면, 6.25 전쟁 때 공군에서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영환 대령" 의 일대기와 더불어 위령탑이 새롭게 만들어져 있다.
<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소리길" >
< 소리길 옆에 있는 "선재카페" >
< "김영환 대령" 의 공적을 알리는 안내문 >
여기에서 경내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해인사를 탐방하는 사람에게 해설하여 주는 안내소와 함께, 도로 건너편 야산 방향으로 부도탑 군락지 및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다.
< 해인사 경내 입구에 있는 "부도탑" 군락지 >
< 성철스님 사리탑 앞에 있는 다른 스님의 "공덕비" >
성철스님의 사리탑을 다시 한번 더 구경하기 위하여 야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입구에는 다른 스님들의 공덕비와 함께 제일 상단에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사리탑 모형은 원형의 참배단 내에 정4각형으로 되는 3단의 기단 위에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半球) 위에 원형의 구(球)가 놓여 있다.
< "성철스님" 의 사리탑 >
원형의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핀 연꽃을 나타내고 있고, 밑에 있는 정4각형의 3단 기단은 불교의 계(戒), 혜(慧), 정(定) 삼학과 더불어 수행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부도탑 초입에서 다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따라 한 50m 정도 내려오면 백련암을 비롯하여 희랑대, 지족함, 국일암으로 올라간다는 방향 표시와 함께 입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입석에는 4개의 암자로 올라가는 길과 더불어 거리가 새겨져 있다.
< 도로 가장자리에 방향표시와 함께 4개의 암자를 알리는 "입석" >
먼저 입석이 안내하는 백련암으로 올라가기로 하는데, 입석에는 백련암 까지 600m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렇게 먼거리가 아니므로 다행이다 하는 생각으로 개울을 건너 조금 올라가면 도로 왼편으로 국일암의 부도탑 군락지를 만난다.
이 부도탑 군락지에서 부터 조금 더 올라가면 국일암으로 들어가는 길과 더불어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 백련암 까지 거리가 800m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정말 축지법을 쓰고 다녔던 홍길동 같은 길이다.
어찌하던 세멘트 포장길 따라 한참 걸어가고 있으니 한대의 승합차가 지나 가다가 멈추어 서는데, 늙은 두 부부가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여서 그런지 승합차에 탑승하라고 하므로 천사를 만난 기분이 일어난다.
< "백련암" 으로 올라가는 세멘트 포장길 >
승합차를 몰고 있는 젊은 부부는 포항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오늘은 휴무가 되므로 백련암에 참배하려 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본인들은 이곳 백련암에서 기도 정진으로 사업도 번창하므로 시간만 허락하면 종종 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나와 같이 백련암 까지 차량을 가지고 올라갈 수 없어 걸어서 가므로 너무나 고생한 경험이 있었지만, 백련암에서 3천배 기도에 성공한 사람에게 사찰 출입증을 발급하여 주므로 현재는 편리하게 차량을 운전하여 경내로 올라간다고 한다.
아직 남자는 3천배 도전에 실폐하여 다소 불도가 떨어지지만 부인은 3천배의 통과와 더불어 현재는 일만배 도전에도 성공하였다고 하면서 대단한 불심을 가진 부부가 되는데, 한시간 이상 고생하면서 걸어야 하는 길을 단 5분 정도로 백련암 주차장에 도착한다.
< 무임 승차로 도착한 "백련암" 주차장 >
2. 백련암의 관람.
백련암(白蓮菴)은 해인사 바운다리(Boundary) 내에 있는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내의 주변으로 우거진 노송과 더불어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 등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병풍과 같이 에워싸고 있어 옛 부터 백련암터가 가야산에서 제일 가는 절승지이라고 한다.
백련암이 처음 창건된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서산대사의 문하생이 되는 소암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오래 전 부터 고승들이 즐겨 수행처로 삼아오던 암자이라고 한다.
역대의 산중 어른으로는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풍계, 성봉, 인파대사와 같은 고승들이 주석을 하였으며, 몇해 전에는 성철스님이 입적할 때 까지 머물어 있었던 암자로 유명하다.
이렇게 높은 산 중이지만 백련암 앞에는 다소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차장 가장자리에는 고목의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어 백련암이 얼마나 고찰의 암자인지 무언(無言)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 백련암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고목나무" >
높은 석축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주차장 양쪽 가장자리에서 경내로 올라가는 2개의 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왼편의 세멘트 포장길은 많은 불자들이 움직이는 길이 되고 오른편은 돌계단 길로써 계단의 끝지점에는 백련암(白蓮庵)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이 자리하고 있다.
<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는 "백련암" 전경 >
< 주차장에서 오른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끝지점에 있는 "일주문" >
대부분 불자들이 움직이는 왼편의 세멘트 포장길 따라 올라가면 길의 옆에는 스님들이 경작하는 다랭이 텃밭에는 감자 등 작물이 자라고 있지만, 너무나 심한 가뭄으로 잎이 시들어지면서 고전하는 모습이 역역하게 보인다.
텃밭 뒤편으로 건물의 지붕과 함께 "적광전(寂光殿)" 이라는 황금색 현판이 울창한 숲 사이로 보이고 있는데, 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적광전 앞에 숨어있는 "관음전(觀音殿)" 이라는 건물이 나타난다.
< 텃밭과 함께 하면서 울창한 숲에 가려 있는 "적광전" >
관음전은 바로 뒤편으로 적광전 건물과 함께 하므로 밑에서 보면 관음전과 적광전이 2층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건물로써, 이곳 관음전 안에는 불자들이 3천배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하다 보니 부처님 앞에는 매우 넓은 참배 공간을 가지고 있다.
< 2층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 "관음전 및 적광전" >
< "관음전" 내 넓은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는 참배 장소 >
관음전을 돌아서 뒤편에 있는 적광전으로 올라가면, 적광전의 벽면과 석가래 끝에는 황금색으로 쓴 산스크리트 어(語)의 글씨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건물의 단층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 황금색 단청과 더불어 "산스크리트" 어로 쓰여 있는 석가래 >
적광전 내부에도 넓은 공간의 기도처와 함께 아름다운 닫집으로 장식하고 있는 좌대 위에 3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중앙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은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비로자나불이 되어진다.
< 측면에서 바라보는 "적광전" >
< 적광전 내에 모시고 있는 "비로자나불" >
< 적광전 앞에서 바라보는 "백련암" 전경 >
또한 건물의 천장을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에는 좌우 2쌍의 용(龍)이 상호 마주 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 또한 특색을 가지는 건물이 되는데, 밑에서 우리를 태워준 젊은 부부가 20Kg 짜리 공양미 한 포대를 부처님 앞에 올리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하겠다.
< 닫집과 더불어 2쌍의 "용" 으로 장식하고 있는 천장 >
한 신도가 적광전 왼편에 있는 우백호 바위로 올라가 보라고 설명하여 주는데, 성철스님이 살아계실 때 거의 매일 바위로 올라가 참선을 행하였던 곳이라 하면서 그곳에서 내려보는 백련암 풍광이 일품이라고 가르켜 준다.
< 백련암의 "우백호" 가 되는 바위 >
바위로 올라가면서 바위 앞을 지날 때 다소 위험한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길을 찾아 올라가 백련암 전경을 내려보는데, 아담한 가야산 산자락 속에 자리하고 있는 백련암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고 있다.
< 우백호 바위에서 내려보는 "백련암" 전경 >
한참 머물면서 구경을 하다가 다시 올라왔던 언덕 길로 내려가니 야산의 암벽 사이로 정면 1칸에 측면 1칸의 매우 작은 "천태전(天台殿)" 이라는 전각이 바위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천태전 내에는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 되어진다.
< 암벽 사이로 새의 둥지와 같이 자리하고 있는 "천태전" >
< 천태전 내에 모시고 있는 "나반존자" >
천태전에서 내려와 본당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면 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전각들이 나열하고 있으면서 마당의 왼편으로 "ㄱ자" 형태의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처마에는 좌선실(坐禪室) 및 점화실(坫花室) 현판이 붙어있다.
< 건물의 처마에 "좌선실 및 점화실"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요사채 >
또한 마당의 중앙 가장자리에 거대한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바위는 고개을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의 스님 얼굴을 하고 있어 "불면석(佛面石)" 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바위라 한다,
< 마당의 중앙 가장자리에 있는 "불면석" 후면 모습 >
< 스님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불면석" >
< 불면석 주변에 있는 "백송" >
이 바위 뒤편으로 원통전(圓通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통전 건물의 측면에는 성철스님이 저술한 다수의 책과 더불어 백련암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판매하는 무인(無人) 판매 서점이 함께하고 있다.
< 불면석 뒤편에 있는 "원통전" >
< 원통전 측면에 있는 "무인 판매 서점" >
마당의 중앙에는 석등과 더불어 그 뒤편으로 높은 기단 위에 백련암의 주 건물이 되는 "고심원(古心院)" 건물이 상단에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 건물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전(殿)"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 백련암에는 성철스님을 모시고 있는 "원(院)"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석등과 함께 하고 있는 "고심원" >
평소 성철스님을 친견 할려고 하면 먼저 부처님 앞에서 3천배를 올리고 나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일화 때문인지 백련암으로 찾아오는 길과 더불어 이렇게 높은 곳에 성철스님의 상(像)을 모시고 있어, 백련암은 스님을 우선하는 암자이라 하겠다.
< 고심원 내에 모시고 있는 "성철스님" 상 >
고심원 건물 왼편 축대 위에 "영자당(影子堂)" 이라는 작은 전각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전각 입구에 출입을 금지하는 펫말이 붙어있어 올라가지 못하고 밑에서 올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데, 건물의 명칭과 같이 아마도 성철스님 영전을 모시고 있는 전각인 것 같다.
< 고심원 왼편 축대 위에 있는 "영자당" >
고심원 건물 앞에 서서 백련암 풍경을 내려보니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곳 백련암 까지 올라오는 길이 너무나 힘이 들어 관람을 포기한 것 인지 경내는 적막감이 흐르는 암자가 되어지므로, 아마도 이러하여 성철스님이 제일 좋아하였던 암자인가 보다.
< 고심원 앞에서 바라보는 "백련암" 전경 >
< 백련암 왼편에 있는 "좌청룡" >
< 백련암 뒤편에 있는 "바위" >
다시 마당으로 내려서서 불면암 뒤편에 있는 요사채 건물로 들어가 보는데. 요사채 건물은 마당에서 바라보면 단층의 건물이 되어지지만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1층에는 공양간이 자리하므로 다소 시장기가 발동하여 한그릇 공양을 위하여 안내문을 읽어 보니 공양시간이 11시 부터 11시 40분 까지로 되어있다.
< 불면암 뒤편에 있는 "요사채" 및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
< 밑에서 바라보면 2층이 되는 "요사채" 건물 >
내 같이 게으른 사람은 공양밥도 얻어 먹지 못하고 굶어 죽기 딱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요사채 앞을 통과하여 일주문 방향으로 나가면, 밑의 주차장에서 오른편으로 올라오는 돌계단 길이 되어지므로 계단을 통하여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백련암 관람을 끝내기로 한다.
< 일주문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
3. 희랑대의 관람.
백련암에서 급경사의 내리막 길 따라 조금 내려가면 속이 비어 있는 고목의 나무를 만나는데, 아마도 이렇게 나무와 같이 마음을 비우고 자발적으로 백련암으로 올라오라는 것을 나는 다른 사람의 승합차를 이용하여 올라가다 보니 백련암 관람을 끝내고 나서야 비로써 나무와 같이 마음의 비움을 알게 한다.
< 백련암 주차장 바로 아래 속이 비어 있는 "고목나무" >
도로변으로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전개하고 있는 풍광에 도취하면서 한 10여 분 정도 내려가면 "희랑대(希郞臺)" 라는 입석의 이정표를 만나는데, 오른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최신식 화장실과 더불어 이동식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다.
< "희랑대" 방향을 가르키는 입석 >
< 산의 비탈면에 자리하고 있는 "화장실" >
2개의 화장실을 통과하자 마자 먼발치의 야산 기슭에 있는 지족암 전경과 더불어 눈 앞에는 희랑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희랑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는 너무나 협소하여 마치 새의 둥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 협소한 장소에 자리하고 있는 "요사채" 건물 >
경내 입구에 있는 요사채 건물의 처마 밑으로 돌아서 가면 그 뒤편으로 새롭게 건축되어진 한옥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한옥 건물 앞으로 희랑당 건물과 더불어 독성각 건물이 바위 틈에 자리하고 있다.
< 새롭게 건립한 "한옥" 의 요사채 건물 >
희랑당 이라는 건물은 이름과 같이 "희랑대사(希朗大師)" 가 머물면서 기도한 도량으로써, 자연이 이루어 내고 있는 기기묘묘한 암벽의 지형과 빼어난 경치로 말미암아 일찍 금강산 보덕굴과 비유가 되는 암자이라고 한다.
희랑당 건물의 전면에는 낭터리지가 되어져 출입이 불가능하므로 불자들은 옆문을 사용하여 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경내에는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불당이 되어진다.
< 암벽 사이에 자리하게 있는 "희랑당 및 독성전" 건물 >
< 희랑당 내 블당에 모시고 있는 "나반존자" >
희랑당 건물 뒤편 일단의 축대 위에는 독성전(獨聖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독성전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알게한 독성(獨聖) 이라는 제자를 모시고 있다.
이 불당에서 기도를 올리면 그 영험이 불가사의(不可思議) 하다고 하여 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참배를 하면 부자가 되어졌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 일반 신도들이 많이 찾아오는 암자이라고 한다.
4. 지족암의 관람.
희랑대에서 지족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개의 암자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계곡으로 인하여 바로 가는 지름길은 없고 다시 왔던 길로 되둘아가서 지족암으로 올라오는 차량길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희랑대 앞에 있는 절벽의 길로 계곡 까지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하는 2개의 길로 나누어 진다.
< 계곡 아래 "지족암과 희랑대" 로 갈라지는 다리 >
승용차가 없는 나는 바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하여 무작전 내려가 보기로 하면서 한참 내려가니 지족암으로 올라가는 세멘트 포장길과 만남을 가지는데,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를 건너서 부터 급경사의 길이 되어지므로 충분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길 따라 한참 올라가면 지족암으로 들어가는 일주문 앞에 선다.
오솔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지족암(知足庵)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일주문에 도착하여 지는데, 원형의 문을 통과하자 마자 왼편의 축대 위로 작은 산신각(山神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지족암" 으로 들어가는 일주문 >
대문을 통과하여 경내에 들어서면 좁은 땅의 구석에 해인 삼매탑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 지족암에도 반듯한 암자를 건립할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하여 건물이 야산의 비탈면을 깍아 일렬로 건축되어 있다.
< 좁은 공간 축대 위에 있는 "산신각" >
< 좁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해인 삼매탑" >
지족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살았던 "희랑대사(希郞大師)" 의 기도처로써, 본래의 이름은 도솔암 이었으나 오래동안 터만 남아 있던 자리에 조선후기 철종 7년(1856년)에 추담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뒤에 다시 고종 30년(1893년)에 환운(幻雲)스님이 건물을 중건하면서 도솔암을 지족암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근래에 들어와 일타선사(日陀禪師) 께서 주석하면서 도량의 면모를 일신 시켰다고 한다.
경내 제일 왼편으로 기다란 "대몽각전(大夢覺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 건물에도 전면으로 넓은 마당을 들 수가 없으므로 대부분 측면의 문을 사용하고 있는데, 측면의 문을 열면 건물 안쪽 측면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 축대 위의 제일 왼편에 있는 "대몽각전" >
그 옆으로 대몽각전 건물과 함께 처마가 연결 될 정도의 간격으로 "진영각(眞影閣)"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내에는 지족암을 크게 중수한 일타스님의 영전이 봉안되어 있는 건물이라 하겠다.
< 대몽각전과 함께 하는 "진영각" >
진영각 건물 옆으로 요사채 건물이 되는 동곡당(東谷堂)과 더불어 공양간이 되는 삼여정(三餘亭)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계곡 건너편으로 석경당(石經堂) 이라는 별도의 요사채 건물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 대몽각전과 함께 하는 "요사채" 건물 >
< 계곡 건너편에 있는 "석경당" >
5. 국일암의 방문.
희랑대사가 주석한 희랑대와 지족암을 관람하고 나서,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초입 길 까지 내려와 조금 하산하면 왼편으로 국일암이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새롭게 건립한 대문을 통과하면 국일암(國一庵)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요사채 건물의 오른편으로 돌아서 내부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축대 위로 "지장전(地藏殿)" 건물 한 채가 자리하면서 경내는 매우 단촐한 암자가 된다.
< "국일암" 으로 들어가는 대문 >
<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요사채" 건물 >
< 국일암의 본찰이 되는 "지장전" >
국일암도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중건한 기록만이 남아 있는데, 부휴대사의 문하생이 되는 벽암 "각성대사" 가 이곳에서 오래 동안 주석하면서 인조 15년(1637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벽암스님은 일찍 글씨와 군법에 능통한 스님으로 조선조 인조임금 때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인하여 인조임금으로 부터 "원조국일대선사" 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국일암(國一庵) 이라는 이름은 국일대사의 시호에서 기인한 것 이라고 한다.
그 뒤에 정인스님이 해방 전후 두차례에 거쳐 중건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는데,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길의 가장자리에 부휴대사, 고한스님, 벽암스님 등의 부도탑이 자리하고 있다.
<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도로 옆에 있는 "국일암 부도탑" >
6. 약수암의 방문.
간단하게 국일암을 돌아보고 나서 세멘트 포장길로 나오는 과정에서 길의 아래 방향으로 다수의 건물 지붕이 보이므로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길 까지 나가지 않고 희미하게 나 있는 사잇길로 내려가면, "약수암(藥水庵)" 건물 뒤편에 도착 되어진다.
< 사잇길로 내려가면 만나는 "약수암" >
이곳 약수암은 비구니 수도처로써 일제 강점기가 되는 1904년 비구니 "성주스님" 이 창건하였으며 1927년에는 도삼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루고 있는데, 경내에는 넓은 마당과 더불어 많은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튼 "ㅁ자" 형태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의 정면에는 약수암(藥水庵) 이라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왼편으로는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오른편에는 우물과 더불어 일단의 축대 위로 수련원이 되는 선원(禪院)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약수암으로 들어가는 "정문" >
< 넓은 마당과 함께 하는 "약수암" >
< 오른편 축대 위에 있는 "선원" >
약수암 건물과 수련원으로 올라가는 건물 사이의 높은 계단 위로 매우 작은 약사전(藥師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약수암은 다소 넓은 공간을 가진 암자이지만 이렇게 한쪽 구석에 약사전 건물을 두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의아심을 가져본다.
< 좁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약사전" >
비구니 암자가 되어져서 그런지 움직이는 사람을 볼 수 없는 적막감이 흐르는 경내를 간단하게 돌아보고 나서 정문을 통과하여 경내를 벗어나면, 경내의 정문과 함께 몇 채의 가정집이 자리하고 있다.
차량길 따라 모퉁이를 돌아서 내려오면 해인사로 올라가는 도로 옆에 약수암을 가르키는 입석이 서 있고, 도로를 건너가면 화장실과 더불어 아침에 올라갈 때 만난 김영환 대령의 약력과 함께 공덕비가 자리하고 있는 지점에 도착하여 진다.
< 도로 옆에 "약수암" 을 안내하는 입석 >
7. 삼선암의 방문.
이 지점에서 반대편 개울 방향으로 삼선암이 있다는 이정표가 자리하므로 이제는 점심식사 시간이 훨신 지나갔지만, 허기를 느끼지 못하여 이왕 늦은 길에 "삼선암(三仙菴)" 도 구경하고 나서 주차장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 "삼선암" 을 가르키는 이정표 >
개울 옆으로 한 300m 정도 올라가면 삼선암 주차장과 더불어 경내로 들어가는 기나긴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 중앙 좌측편에 반야선원(般若禪院)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문칸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삼선암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삼선암" 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건물 >
< 대문 입구에 있는 "반야선원" 현판 >
삼선암도 약수암과 동일하게 비구니 스님들이 운영하는 사찰로 1893년에 자홍스님 께서 창건한 뒤로 1904년에 보찬스님과 지종스님 두분이 중건한 바 있으며, 최근에 새롭게 비구니 선원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도량의 규모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암자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삼선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삼선암 건물 앞에는 거대한 나무와 더불어 3개의 바위가 자리하면서 그 바위 중 하나의 바위 위에 정교한 돌탑이 쌓여 있다.
< 3개의 바위와 함께 하고 있는 "삼선암" >
삼선암 건물 뒤편 야산에 약사전(藥師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약사전 건물에서 오른편으로 돌아서 가면 거대한 선원(禪院)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 삼선암도 다른 어떠한 암자 보다 많은 신도들이 찾아오는 것 같다.
< 야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약사전" >
< 약사전 오른편에 있는 "선원" >
오늘 점심도 굶어 가면서 해안사 입구 방향에 있는 6개의 암자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데, 조만간 시간이 허락하면 해인사 경내의 위쪽과 더불어 다소 먼거리에 있는 암자도 탑방하여 시간을 가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차장으로 내려가 식당을 찾아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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