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둘째날.(7월 2일 : 토요일 오전)
1). 지리산 속의 보물창고 되는 천년의 고찰 구례 화엄사 및 구층암을 다시 찾아서.
동문의 친구집에서 나온 일행은 약 10여 분 거리에 있는 화엄사로 발길을 잡아보는데, 노고단 계곡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먹거리 촌과 더불어 인접지역에 화엄사 경내를 관람하기 위한 매표소에 도착하지만 일행 전부가 경로 우대의 헤택으로 무료 관광이 가능하다.
매표소에서 많은 물이 내려오고 있는 계곡 따라 조금 올라가면 개울 건너편 승용차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다소 시간이 빠른 아침이면서 지속적인 장미비가 내리는 주말이 되므로 단지 몇 대의 차량들이 주차하고 있어 매우 한적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각자 준비하고 있는 우산을 쓰고 오솔길 따라 화엄사 경내 앞이 있는 다리를 건너가는데, 다리 위에서 계곡의 상부 방향으로 바라보니 전날 내린비로 거센 물결이 바위를 휘감으면서 흘려 내려가고 있다.
< 주차장에서 "화엄사" 로 올라가는 오솔길 >
< 화엄사 앞 많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계곡" >
다리를 건너면서 화엄사의 첫번째 관문이 되는 일주문을 통과하는데, 이곳 화엄사는 2014년 4월 6일 계성고등학교 총동창회 산우회에서 추진하는 산행을 통하여 지리산 노고단에서 화엄사로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사찰이다.
< 화엄사의 첫번째 관문이 되는 "일주문" >
그 때 나는 나의 블로그를 통하여 "화엄사(華嚴寺) 및 구층암(九層庵)" 에 대한 관람 내역을 기술하므로 화엄사에 대한 여행 탐방기가 중복 된다.
그래서 세부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오늘은 찍은 사진과 더불어 화엄사 경내에 비치하고 있는 안내 팜플릿에서 나타내고 있는 내용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안내 팜플릿에 따르면 "화엄사는 마치 지리산에 숨어 있는 보물 창고와 같은 사찰로써, 나라에서 정한 문화재가 곳곳에 숨어 있고 보물 보다 더 아름다운 보물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사는 한번에 다 담아갈 수 없는 사찰입니다.
1.500여 년을 이어오는 화엄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 및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으로 거기에 지리산 자락에 걸린 구름과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머무르는 곳 이니 자연스럽게 몇 번이고 다시 찾게되는 사찰이다.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緣起)" 조사께서 창건하였는데, 연기조사는 화엄경과 비구니 스님인 어머니를 모시고 지리산 자락 황둔골에 전각 2채의 작은 절을 지었으며 절의 이름을 화엄경에서 따서 "화엄사(華嚴寺)" 라고 하였다고 한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기록한 경전이 되는데, 화엄사가 곧 부처님의 세계이고 깨달음의 성지라는 뜻을 가진 사찰이 된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후 의상대사께서 화엄사를 화엄종의 원찰로 삼아 머물고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 8개의 가람에서 81개의 암자를 거닐고 있는 대 사찰이 되었고, 이 때 남방제일 화엄대종찰이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각황전의 기단 및 각황전 앞의 석등과 대석단, 동오층석탑 및 서오층석탑, 그리고 효대라고 불려지는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이 당시의 유적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때에는 화엄사의 혜안선사와 백암선사께서 승군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 자운스님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바다를 지켰다고 합니다.
비록 주지스님인 설흥대사와 300여 명의 스님들이 목숨을 잃고 화엄사가 왜군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지만, 중생을 살피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신을 고이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불타버린 화엄사는 조선 선조 30년(1630년)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벽암선사에 의해 여러 전각(殿閣)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화엄사는 절곡의 역사 앞에 비켜서지 않았으며 때로는 부흥 쇄락의 시기가 반복하였지만, 지리산의 은근함을 닮은 불법(佛法)의 맥(脈)을 이어오고 있는 사찰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화엄사에 대한 역사를 읽어보고 경내를 구경하여 보는데, 화엄사 각황전 왼편 언덕 위에 있는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현재 공사로 인하여 출입를 제한하고 있어 다소 아쉬움이 묻어난다.
< 화엄사 입구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보박물관" >
< 화엄사 입구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수련관" >
< 화엄사의 두번째 관문이 되는 "금강문" >
< 화엄사의 세번째 관문이 되는 "사천왕문" >
< 지방 유형문화재 제49호 "보제루" >
< 보제루 옆으로 올라가고 있는 "관광객" >
< 대웅전과 각황전 양쪽 앞에 자리하고 있는 "마당" >
< 마당의 오른편 가장자리에 있는 보물 제132호 "동오층석탑" >
<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 >
< 국보 제67호 "각황전" 건물 >
< 각황전 내에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불" >
< 각황전 앞 국보 제12호 "석등" >
< 대웅전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원통전" >
< 원통전 앞에 있는 보물 제300호 "사자탑" >
< 원통전 왼편 모서리에 자리하고 있는 "화엄 매화나무" >
<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명부전" >
다시 화엄사 본찰이 되는 대웅전 뒤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따라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화엄사의 또 다른 명소가 되는 구층암에 도착하는데, 이곳 또한 안내 팜플릿에 기재하고 있는 내용을 담아본다.
구층암 안내 팜플릿에 따르면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화엄사 뒤뜰을 지나 "구층암(九層庵)" 가는 길이 있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오솔길 및 계곡 물소리가 대나무 숲을 흔들어도 새소리 바람소리가 하늘에 가득차도 고요하게 느끼지는 길이다.
작은 계곡을 건너 대나무 숲 터널을 빠져 나오면 수줍은 자태의 구층암이 반기는데, 구층암은 자연을 닮은 암자로써 산 것도 죽은 것도 자연(自然)을 거스르는 일이 없는 곳 이다.
뜰에 자라던 모과나무가 죽어 승방(僧坊)의 기둥이 되었는데, 이곳 모과나무 기둥은 다듬거나 손대지 않고 밑둥은 주춧돌의 뿌리를 내리고 위는 서까래에 가지를 뻗어있다.
동편에 자라던 모과나무는 동쪽 승방의 기둥으로 서편에 자라던 나무는 서쪽 승방의 기둥으로 다시 자라고 있는데,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자연주의 미학이라 하겠다.
천불의 부처가 모셔진 천불보존(千佛寶殿)와 뜰에 단아한 석등(石燈) 및 배례석(拜禮石), 그러고 산 모과나무와 죽은 모과나무 기둥이 그저 오래 전 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처럼 보인다.
구층암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으면서 자신을 낮춰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전부가 되는데, 그러다 마루에 앉아 구층암 야생 차밭에서 구한 차 한잔 한다면 그 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 이다.
< 구층암으로 가는 "대나무 숲" >
< "구층암" 의 앞편 요사채 건물 정면 >
< 구층암 앞편 요사채 건물 뒤면에 있는 "모과나무 "기둥 >
< 자연에 순응하면서 만들어져 있는 "모과나무 기둥" 을 배경으로 >
< 구층암 뒤편 요사채 건물 정면에도 세워진 한개의 "모과나무" 기둥 >
< 천불을 모시고 있는 구층암 "천불보전" >
이상과 같이 지리산의 대가람이 되는 화엄사를 횡하니 돌아보고, 다음 여행지가 되면서 구례읍 남쪽 방향에 있으면서 오산의 7부 능선 쯤에 자리하고 있는 사성암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한다.
2). 구례의 명산 오산에 자리하고 있는 사성암에 올라보면서.
화엄사를 떠난 일행은 구례시가지를 통과하여 오산의 산자락에 도착하는데, 사성암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이곳 산자락에 있는 주차장에서 승용차를 두고 사성암 까지 운행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산행길을 통하여 걸어서 가는 2가지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다소 내리는 비로 산행은 불가능하므로, 인당 왕복 3.000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사성암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다소의 시간적인 여유가 발생하여 주차장 가장자리에서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간이용 상점을 조금 구경하다가 버스에 오른다.
< "사성암" 까지 운행하고 있는 마을버스 매표소 >
< 주차장 가장자리에서 지역 특산품을 판매하고 있는 간이용 "상점" >
이곳 사성암도 2012년 4월 1일 오산의 종주산행을 통하여 한번 방문한 경험이 있는데. 그래서 새로운 내용으로 기술하는 것 보다 그 때 기록한 나의 블로그 글로 대신하고 사성암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 쓰여 있는 내용을 옮겨본다.
안내문에는
"이곳 사성암은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사성암은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로 원래에는 오산암이라고 하였으나 4명의 덕이 높은 원효, 의상, 도선, 전각 등의 고승들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四聖庵)"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되어 있다.
사성암 근처 암벽에는 음각 마애여래입상이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3.9m로 머리에는 넓적하고 낮게 솟은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이 있고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다.
왼쪽 어깨의 옷 주름이 촘촘한 격자 모양을 하고 있어 다소 생소한 모습이고, 오른손은 가슴 위에 있고 왼손은 가슴 아래에 대어 뭔가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불상의 뒤에는 광배(光背)가 표현되었고 머리 주위에도 2줄의 띠를 두른 원형의 머리광배가 있으면서 광배에는 불꽃무늬와 덩쿨모늬가 있다.
경주 골굴사 마애여래좌상의 무늬와 비슷하여 전체적으로 관략화된 음각기법으로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하고 있다.
< 오산 주변의 "등산로" 조감도 >
< 사성암 주변에 있는 '요사채 및 등산로" >
< 거대한 기둥 위에 세워진 "사성암" >
<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성암" >
< 사성암으로 들어갈려고 하는 "불자" >
< "음각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염불하고 있는 스님과 불자 >
< 사성암에서 내려보는 "섬진강" >
< 800여 년의 수령을 가지고 있는 "귀목나무" >
< 사성암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극락전" >
< "소원바위" 앞에 붙어있는 소원문 >
< 소원바위 뒤편에 만들어져 있는 "도선굴" >
< 암벽 가장자리로 만들어져 있는 "산행길" >
이곳 사성암에서 내려보는 구례시가지와 멀리 노고단에서 휘감아 내리고 있는 변화 무쌍한 구름들의 움직임이 한편의 활동사진과 같이 다양한 풍경을 만들고 있는데, 정말 머물고 싶은 암자가 된다.
< 소원바위 주변에서 바라보는 "구례시가지" >
< 소원바위 주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노고단" 운해 >
3). 구례군에 있는 운조루 방문.
구례에서의 다음 관광지 방문은 다시 구례시기지 방향으로 나와 섬진강 따라 만들어져 있는 19번 국도 따라 하동방향으로 한 10여 분 정도 내려가면, 구례읍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가 되는 운조루(雲鳥樓)에 도착한다.
넓은 주차장 안쪽에는 "운조루 유물전시관" 이 자리하고 있어 전시관 입구로 들어가 보는데, 창문에 금일 내부 공사로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내부 관람을 생략하고 유물관 뒤편에 펼쳐지고 있는 "오미마을" 로 올라가 본다.
< 내부 수리 중에 있는 "운조루 유물전시관" >
오미마을 앞에는 아름다운 공원과 더불어 정자가 지어져 있고, 지리산 노고단의 아름다운 품 속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 대부분은 민박을 겸하는 한옥으로 건축되어 있으면서 각 집마다 머무는 체험교실을 운영하므로 매우 한국적 전통의 미(美)를 간직하고 있는 동네가 된다.
< 지리산 노고단이 품고 있는 "오미마을" 전도 >
<"오미마을"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동문 >
< 체험마을로 만들어져 있는 "한옥" >
마을 한바퀴를 짧은 시간으로 돌아보고 나서 오미마을 오른편 가장자리에 있는 운조루 방향으로 걸어가 보는데, 운조루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도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므로 매우 혼잡한 거리가 된다.
운조루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소 긴 사각형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연못 속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아담한 섬이 만들어져 있는데, 섬으로 들어가는 나무다리가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 운조루 앞에 있는 "연못과 섬" >
섬으로 들어가는 길의 반대편 개울을 건너면, 운조루를 알리는 안내문과 더불어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매우 긴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행랑채 입구에 있는 작은방에서 집의 주인장이 되는 듯한 매우 년세(年歲)가 높은 할머니 한분이 입장료 2.000원을 징수하고 있다.
< 운조루로 들어가는 "행랑채의 솟을대문" >
대문 앞에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 내용을 읽어보면,
"운조루(雲鳥樓)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구조의 집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남한 3대의 길지(吉地)의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형세와 국면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금환락지는 하늘의 선녀가 지상에서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 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뜻을 가진 길지이라고 하는데, 예로 부터 사람들은 부귀영화가 마르지 않은 곳이라고도 합니다.
집의 구조는 입구 대문과 함께 하는 일자형(ㅡ)의 하인들의 방과 T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있으면서 대문 안의 행랑채가 연이어져 있고, 안채의 뒷면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구조 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석까래를 놓은 나무인 "도리" 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 로만 된 구조(민도리집)로써, 지붕은 사랑채와 안채가 연이어져 있으면서 팔작지붕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 운조루에서는 "타인능해(他人能解 : 누구나 능히 열 수 있는 나눔의 쌀독)" 라는 유명한 뒤주가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운조루의 창건주 유이주는 마을의 배고픈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뒤주를 열어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다.
통나무를 깍아 만든 이 뒤주에는 두가마니 닷되의 쌀을 담을 수 있는데, 운조루 주인은 한 달에 한 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령하였다고 한다.
뒤주는 큰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문간에 두고, "누구나 열 수 있다" 는 글귀를 새겨둔 것은 가난한 이웃들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린 주인의 배려이다.
동학난, 여순사건, 6.25 전쟁 등을 지내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 즉,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소 넓은 마당과 함께 운조루의 사랑채가 되는 T자 형태의 건물이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전면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마루에 많은 관광객들이 앉아 지붕에서 타고 내리는 낙수물을 구경 함과 동시에 비 내리는 운조루 정원을 감상하고 있다.
< 운조루 "솟을대문" 을 들어서면서 >
< 솟을대문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동 행랑채" >
< 솟을대문 왼편에 있는 "서 행랑채" >
<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사랑채" 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관광객 >
운조루 정원에는 당나라에서 방문한 한명의 사신이 심었다는 한 그루의 나무가 너무나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는데, 주인장 할머니가 나무의 이름을 가르켜 주지만 할머니 머리 보다 더 지능이 낮은 나의 286 메모리와 치매의 전초 현상으로 인하여 이내 까먹어 버린다.
< 마당 가장자리 당나라 사신이 심었다는 "나무" >
또한 제일 왼편 구석이면서 행랑의 서쪽 끝지점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루기 전 까지 시신을 보관하였던 "초빈(初殯)" 이라는 헛간이 자리하고 있는데, 창문 틈으로 내부를 들어다 보니 다소 선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행랑채 제일 끝에 자리하고 있는 "초빈" >
운조루의 속살을 구경하기 위하여 사랑채로 올라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을 통과하면서 중문 내에는 운조루의 대표적 유물이 되는 "되주" 가 자리하고 있다.
되주의 아래 부분에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덮고 있는 직사각형의 작은 나무판 위에 "타인능해(他人能解)" 라는 글씨가 보인다.
<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에 있는 "뒤주" >
앞에서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에 따른 "타인능해" 라는 해설에서 표현 하듯이 운조루 주인장이 얼마나 이타심(利他心)이 강한 사람인가를 느끼게 하므로 구례 방향으로 나들이 할 때 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듯이 찾아보게 하는 관광지가 되나 보다.
중문간을 통하여 안채로 들어서면 안채에도 사랑채와 또 다른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ㄷ" 자 형태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 앞 부분에는 안방마님의 보물이 되는 장독대가 가지런하게 자리하고 있다.
< "ㄷ" 자 형태의 운조로 안채 >
대청마루와 함께 하고 있는 안채에는 안주인의 주거지가 되고 2개의 안방을 포함하여 많은 생활도구가 구석구석 장식하고 있고, 또한 대청 마루 처마에는 운조루(雲鳥樓)라는 현판이 붙어있어 건물의 고풍을 더하여 주고 있다.
< 대청마루 처마 밑에 붙어있는 "운조루" 현판 >
이곳 안채에서 동쪽 방향의 쪽문을 통하여 뒤편으로 나아가면 또 다른 뒤뜰이 자리하고 있는데, 뒤뜰에는 작은 텃밭과 더불어 조상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사당(祀堂)도 함께 하는 구조이다.
< 운조루 안채 동쪽 뒤뜰에 있으면서 "사당" 으로 들어가는 문 >
다시 안채 마당을 통하여 안채의 큰방에 따린 부엌을 지나 사랑채의 뒤편으로 들어가면 작은 공간과 더불어 우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는 우물을 사용하지 않는지 나무 뚜껑으로 덮혀져 있다.
< 안채 큰방에 딸린 부엌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우물" >
이렇게 운조루 대저택을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구경하여 보는데, 충분하게 시간을 가짐과 동시에 옛 조상들이 사용한 생활도구 및 운조루 유물전시관을 꼼꼼하게 관람하는 시간을 다시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운조루를 떠나기로 한다. - 둘째날 오전 관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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