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0일.(토요일)
오늘도 꽃 속에 젖어 보고푼 마음을 간직하면서 한국 산천과 벚꽃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쌍계사 10리 벚꽃 길을 걸어보기 위한 "쌍계사" 앞 길게 이어진 능선 "촛대봉" 등산에 도전하기로 한다.
만차의 3대 버스는 2개의 무리로 나누는데, 첫번째 무리 100여 명의 상춘객을 싣고서 벚꽃을 즐기기 위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 까지 왕복으로 갔다오는 짧은 등산을 하고 쌍계사 십리 벚꽃 길 따라 걷는 것이다.
두번째 무리 20여 명은 화개장터 뒷편 능선을 이루고 있는 "촛대봉" 능선을 따라 약 4시간의 산행과 더불어 십리 벚꽃 길을 걸어 보는 "산과 벚꽃" 을 동시에 즐겨보려는 사람으로 이분화 하기로 한다.
버스가 하동시가지를 통과하여 섬진강 따라 만들어진 2차선 도로에 올라 서니까, 수 많은 차량의 정체로 인하여 거북이 같은 움직임이 발생하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진행한다.
천신만고 끝에 화개장터에 목표시간 보다 약 1시간이 지연되는 11시 20분 경 도착한다.
"촛대봉" 으로 올라가기 위한 산행팀을 화개장터에서 산행의 초입 "남도대교" 앞에 주차하여 산행팀 만 번개같이 내려 놓고, 버스는 벚꽃을 즐기려는 나머지 사람들을 싣고서 쌍계사 방향으로 차량의 뒤 꽁무니를 따라 살아진다.
촛대봉 등산팀은 하동에서 구례로 가는 19번 국도 따라 조금 가다가 산 비탈면에 낙석 떨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하여 놓은 철조망 축대의 한 곳에 뚫어 놓은 개구멍을 통과하게 한다.
한 사람씩 겨우 들어가 바로 직벽의 언덕길로 들어서는데, 급경사 길을 올라가다 보니 이내 숨이 턱까지 차 올라온다.
진달래꽃으로 수 놓고 있는 능선길 따라 약 1시간 정도 정신 없이 올라가니까, 해발 318m의 아담한 봉우리에 도착한다.
< "진달래" 가 피어있는 능선길 따라 >
이곳에서 부터 주위의 조망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뒤돌아 보면 영호남의 경계선을 만들면서 조용히 흘러 내려가는 섬진강의 푸른 물이 봄 속에 묻혀있다.
섬진강 뒤편으로 전라도 광양 땅에 있는 "백운산" 능선 아래로 펼쳐지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매화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는 "화개동천(花開洞天)" 양쪽으로 피어있는 약 4Km의 십리 벚꽃 길이 그림과 같이 펼쳐지고 있고, 그 속으로 차량들이 꼬리를 이어지면서 달리고 있으며 그 뒤편에도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로 유명한 최참판 집을 품고 있는 성재봉 능선이 이어진다.
왼쪽에는 피아골의 깊은 계곡이 희끈희끈 보이고, 먼 곳에는 지리산 노고단의 높은 산맥이 웅장 함을 뽐내고 있다.
이곳 봉우리에서 약 1시간 정도 더 앞으로 전진하면 웅장한 바위 하나가 가는 길을 막고 서 있으면서 이 바위가 "올빼미 바위" 라고 한다.
바위는 복스러운 올빼미 모양을 하고 있는데, 바위 주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충분한 물을 마시면서 에너지를 보충한다.
<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올빼미 바위" >
또 다시 무아지걍(無我之境)의 경지로 능선길 따라 올라가면 아담한 봉우리에 이르는데, 이 봉우리가 오늘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마지막 정점이 되는 해발 722m "촛대봉" 정상이다.
< 해발 722m "촛대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
촛대봉까지의 산행길은 출발점이 되는 섬진강이 거의 해발 Zero에서 시작 함으로 전체 산행 높이가 722m가 되면서 "촛대봉" 까지 약 4Km 정도 거리에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등산이다.
봉우리 주위에서 늦은 점심을 가지고 나서, 산천 구경에 빠지면서 장시간 머물어 본다.
앞으로 더 전진하면 해발 887m "황장산" 에 이르지만 그 곳까지 종주하지 않고 촛대봉 봉우리 오른쪽 길로 돌아서서 하산길로 내려서는데, 하산길이 너무나 직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려 가기에 많은 고생이 따른다.
82Kg 거구의 하중이 가날푼 양쪽 다리로 버티면서 직벽을 내려 설려고 하니 무릎에 많은 고통이 따르므로 길가에 서 있는 잡목을 잡고 엉금엉금 기면서 약 1시간 정도 내려 오니까, 큰 돌무덤으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이른다.
이곳 전망대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화개동천 벚꽃 길이 한폭의 그림과 같이 들어오고, 눈을 조금 위쪽으로 돌려보니 "쌍계사" 고찰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 전망대에서 본 "화개동천과 벚꽃 길" >
< 전망대에서 내려본 "쌍계사" 전경 >
이곳 전망대에서 약 10분 정도 더 내려가면 십리 "벚꽃길" 에 도착하는데, 올해 제18회 벚꽃축제는 4월 2일에서 4월 4일까 지 3일간 실시하였다.
하지만 축제기간에는 벚꽃이 전연 피지 않다가 오늘 벚꽃이 Pick를 형성하고 있는데, 최상의 화전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므로 벚꽃 길을 거닐어 본다.
< "화개동천" 따라 만들어진 벚꽃 길 >
여기서 도로 우측 야산 기슭에는 한국에서 처음 시배지한 야생 차밭이 산 전체를 덮고 있는데, 이 지방에서 생산하는 차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 야산 곳곳에 심겨져 있는 야생 "차밭" 전경 >
이곳 하동고을 야생 차는 통일 신라시대 흥덕왕 828년 "김대림" 이 당나라 유학 길로 부터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차의 종자를 왕명에 따라, 이곳 지리산 산자락에 처음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때 재배한 나무는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하동군 하개면 정금리 도심마을 뒷산에 수령 1.000년이 경과한 차 나무가 자라고 있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4.5m이고 둘레가 60Cm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나무에서 생산한 녹차 100g 한 봉지에 천삼백만원을 호가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언제 시간을 만들어 그 나무를 대면하리라 다짐하여 본다.
내려가는 길에는 많은 차량들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도로 가를 걸으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고요한 화개동천 계곡을 진동시키고 있다.
< 만개한 벚꽃과 더불어 움직이지 않는 "차량" >
나도 몇 번이나 "쌍계사" 십리 벚꽃 길에 승용차를 이용하여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걸어서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다.
화개동천에는 풍족한 물이 흘려 내려가고 있는 개울 가에 옛날에는 농사를 짖던 짜투리 농토에도 벼 농사를 포기하고, 현재 전부 차 밭으로 변경하면서 아름다운 벚꽃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 벚꽃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야생 "차밭" >
도로가 상점마다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노래하는 "김연자" 의 풍짝 노래를 들으면서 정신 없이 1시간 정도 걷다 보면 "화개장터" 에 도착한다.
화개장터에 들어서니까 비록 벚꽃축제 기간은 지나 갔지만, 오히려 더 많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만들어 매우 복잡한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화개장터" >
화개장터는 우리나라 다른 어느 장터보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리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양쪽 도(道) 사람들이 5일장을 함께 지낼 만큼 가깝게 살고 있는 추억의 장터가 된 장소이다.
그것은 노래 가사와 같이 영남 사람과 호남 사람이 "닷새마다 한데 어울려 장을 펼친다" 는 가사 내용과 같이 정감이 일어나는 재래시장이다.
첩첩산중 지리산 산자락 소수 사람들만의 생활 터를 유지하면서 살다 보니, 장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화개장터는 유명세 만큼이나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나 현재 화개장터는 벚꽃 축제와 더불어 지리산 쌍계사로 들어서는 입구가 되는 곳이라, 제법 큰 음식점과 슈퍼가 장날과 무관하게 영업하고 있는 번잡한 장소로 변신을 추구하고 있다.
아무튼 지금도 장날이 되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로 경남 사람은 물론이며 전라도 사람도 버스를 타고 하나 둘 모이는 곳이다.
하동군에서는 섬진강 가로 질러 나룻배를 운행하던 선착장에는 영호남 화합의 다리가 되는 "남도대교" 를 건설하고, 청정 섬진강에서 잡아온 어패류와 지리산 산자락에 생산하는 무공해 산나물을 상품화를 하였다.
쌍계사와 연계한 만남의 광장, 주차장, 난전 등을 설치하여 많은 볼거리와 먹거리 장터로 변화를 추구하며 찾아오는 광관지로 발 도듬하면서 상설시장으로 승격하면서 운영하고 있다.
< 섬진강 따라 만들어진 아취형 "남도대교" 와 화개장터 >
특히 화개장터를 세상에 더욱더 빛내게 한 인물로써, 김동리의 소설 "역마" 와 조영남의 "화개장터" 라는 노래로 유명한 장소이다.
조영남 그는 서울대를 중퇴하고 가수생활로 사회를 조롱하다가 배우 "윤여정" 을 꼬시는데,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 1975년 시카고에서 결혼을 한다.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유명한 빌리그래함 목사 밑에 찬송가를 부르면서 비상식적 생활로 이어지다가 1987년 결혼 13년 만에 윤여정과 이혼하여 아들 및 딸 다 빼았기고, 빈 털털이가 되어 1988년 한국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
약 3년간 난봉꾼으로 타락의 길로 들어 방황하다가 1991년 동병상린 고통을 꺽고 있는 코메디언의 지존(至尊)이 되는 "OOO" 씨와 함께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 화개마을에 숨어 들어온다.
그래서 한 여관방에 딩굴면서 세상 하직을 연구하던 중 노래나 하나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만든 노래가 "화개장터" 이고, 작사, 작곡 및 노래다 혼자 독식한 노래이다.
노래가 희트 됨으로 인생 재기에 성공하였고, 성공에 따라 거만한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깔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분야에 대하여 책으로 출판하는 별난 성질이 있어 "한국 청년이 본 예수" 라는 책을 펴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는 기독교 창시자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도 도전장을 내밀어 본다.
2007년에는 "현대인도 못 알아 먹는 현대 미술" 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한국 미술계에 반란을 일으켰고, 또한 많은 수다를 떨면서 펴낸 책도 수 권에 달한다.
노래를 불러 돈 벌고, 그림을 그려 돈 벌고, 방송국에서 MC를 하면서 돈 벌고, 글을 써서 돈 벌고, 거침없는 예인(藝人)의 끼를 가진 만능 재능꾼이다.
어찌하든 화개장터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 할 수 없는 존재 임을 실감하는데, 하동군은 화개장터 중앙에 그의 노래비를 만들어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의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로 조영남의 업적을 부각시키고 있다.
< "조영남" 의 노래비가 있는 화개장터 >
한 시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 시장 내부 구석구석 돌러보니까, 조영남 노래 가사에서와 같이 "없는 것은 없고, 있는 것은 다 있다" 는 내용과 상이한 현상 하나를 발견한다.
남자 변소에는 큰 것을 해결하는 곳이 4개가 있는데, 여자 화장실에는 기다림에 지친 여자들이 남자 화장실로 원정와 전부 여자들이 점령하므로 남자들은 바지춤 욺켜지고 발을 동동 굴리면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과 오히려 정겹다.
번잡한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가끔 일어나는 풍경이 발생하지만, 이렇게 작은 시골장터에서 완전 100% 점령을 당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해외 토픽으로 날 정도의 풍경을 조영남씨는 "없는 것도 있다" 는 단순한 진실도 모르고 노래 가사를 만들었으니 화개장터 현실과 너무 동 털어지는데, 아마 이런 현상이 발생하리라 꿈에라도 생각이나 하였겠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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