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3일.(월요일)
나는 고향인 경북 성주군 용암면 마월2리 마천(磨川) 부락으로 귀촌한지가 어인 5년이 지나가면서 모교가 되는 '성암초등학교(聖岩初等學校)' 건물을 바라보면서 교정 앞으로 왕래하였지만, 무관심으로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학교가 된다. 이렇게 무관심으로 지나간 이유는 나의 모교가 한국 농촌에서 발생하고 있는 취학(就學) 어린이 급감으로 학교 기능을 상실하면서 폐교(閉校)가 되어졌는데, 그로 인하여 학교가 개인에게 불하(拂下)하므로 출입에 따른 제한을 가져온 교정이 되었다. 그런데 금년 봄 인접하게 있는 가야산으로 산행을 하기 위해 가는 코스 중 성주군 용암면 상신리(相新里)에서 새롭게 만든 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자동차 타이어 펑크로 수리를 위하여 웃티 동네 앞에서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동네에서 양봉업(養蜂業)을 하고 있는 한 노인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문제는 이 분이 보통노인이 아니고 나의 초등학교에서 월등한 선배가 되는 어르신이 되는데, 선배님은 나의 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고 나는 제14회가 되므로 산술적(算術的)으로 계산하여도 14년의 선배가 되는 어르신이다. 대 선배님은 나에게 모교(母校)가 되는 성암초등학교 탄생 내력을 이야기하여 주는데, 현 위치가 되는 용암면 마월1리에 있는 성암초등학교가 처음에는 이곳 상신리에서 개교하였다는 근원적인 뿌리를 가르켜 준다. 그런데 그 때에는 무심하게 듣고 지나갔지만 모교 앞으로 지나가는 순간 순간에 한번씩 모교 변천사(變遷史)를 알고 싶어지는데, 금일은 학교로 들어가 폐교의 건물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성암초등학교는 경북 성주군 용암면 마월1길 28-7번길에 자리한 학교가 되는데, 학교의 위치는 성암산 지맥(聖岩山 枝脈)이 내려와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그 봉우리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좌청룡과 우백호의 산세(山勢)를 만들고 있다. < 성암산 지맥의 한 봉우리 아래이면서 좌청룡과 우백호로 나누어지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성암초등학교' 전경 > 학교 앞에는 용암면 마월1리 '진건리' 이라는 동네를 형성하고 있는데,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 분석하여 보면 진건리 동네와 학교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품고 있는 지형(地形)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동네이다. 또한 마을 앞으로 성암산 계곡에서 흘려 내려오는 물의 합수(合水) 지점으로써 오른편에는 중생골 및 임진골에서 흘려내리는 물과 왼편으로 갈명골에서 흘려 내리는 물이 상호 물돌이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형은 매우 길지(吉地)이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 진건리 동네를 관통하면서 계상동으로 들어가는 도로 따라 조금 들어가다가 우측으로 90도를 꺽어 경사면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는 거대한 바위에 학교명(學校名)이 새긴 교적비(敎籍碑)가 자리하고 있고. 왼편의 작은 비석(碑石)에는 학교 연역을 기술하고 있는 또 다른 교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 교문의 오른편 학교명을 새긴 '교적비' > 왼편에 기술하고 있는 교적비 내역에는 '성암초등학교가 1943년 4월 1일 개교(開敎)하여 졸업생 3.099명을 배출(排出)하였고, 1998년 3월 1일에 폐교(閉校)가 되었다' 라고 경상북도교육감(慶尙北道敎育監)의 안내문이 붙어있다. < 교문의 왼편 학교 연역을 기술하고 있는 '교적비' > 양쪽의 교적비를 지나면서 이내 교문으로 들어서면 교문에는 거대한 4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데, 앞에 서 있는 2그루의 나무는 잎이 떨어져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은행나무가 되고 뒤편에 있는 2그루의 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히말리야산 시다나무가 된다. < 교문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4그루' 나무 > < 교문 안에서 바라보는 '4그루' 나무 > 교문을 통과하면 잔디가 깔려 있는 넓은 운동장과 함께 운동장 뒤편 일단의 축대 위로 2층의 본관 건물과 더불어 오른편으로 1층의 별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본관 건물에는 한 사업체가 운영하였다는 회사의 간판이 붙어있다. < 잔디로 깔려 있는 '운동장' > < 일단의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본관 및 별관' 건물 > 본관의 건물을 관람하기 위하여 운동장을 가로 질려 입구로 올라가 보는데, 현재 사업체가 문을 닫으므로 인하여 거대한 열쇠로 잠겨져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여 옆에 있는 별관 건물로 들어가 본다. < 한 사업체가 운영하였던 회사명이 쓰여있는 '본관' > < 본관의 오른편에 있는 '별관' 건물 > 별관 건물에는 학생들이 공부하였던 책상과 걸상은 없어졌고 아직도 앞뒤 양쪽 벽면에는 흑판이 붙어있는데, 흑판에는 누가 썻는지는 모르겠으니 많은 낙서(落書)들이 어지렵게 남아 있어 폐교가 이렇게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 '별관' 건물의 내부 전경 > 별관 건물 앞으로 한채의 사택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의 사택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사용한 건물인지 아니면 학교에서 사용한 집무실 건물인지 모르겠으나 이것도 폐허(廢墟)가 되어져가고 있다. < '사택' 으로 지어진 건축물 > 이렇게 교정을 한바퀴 돌아보고 학교를 떠나기로 하면서 정문으로 나가는데, 정문 입구에 서 있는 2그루의 은행나무가 어느 년도인지는 확실하지 않겠지만 우리 14회가 식목일(植木日)에 심었던 기억이 나게 만든다. 우리 14회는 평균 출생년도가 1949년 출생이 대부분인데, 1950년에 발생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취학생의 숫자가 다른 학년 보다 다소 적어 한개의 반(班)으로 구성하면서 1956년 3월에 70여 명의 학생이 입학하여 몇 명이 중도에 포기하면서 1962년 2월에 70명이 졸업하였다. 그 시대에 어려운 농촌의 사정으로 인하여 70명의 졸업생 중 41명은 부모님의 일손을 돕기 위하여 농촌에 남았지만, 나머지 29명 졸업생은 상급학교가 되는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사회로 진출하는 원동력이 되어 정(情)이 많이 들었던 학교이라 하겠다. 정든 학교를 떠나기 전 옛 추억을 회상(回想)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6년 동안 동거동락(同居同樂) 하면서 열심히 불렸던 성암초등학교의 교가(校歌)를 한번 기술하여 보는데, - 교 가 - 작사 : 김일석 작곡 : 조두남 가야산 억센정기 복된 터전에 그 기상 이어받은 성암 건아들 힘차게 슬기롭게 뻗어 나가서 찬란한 조국주의 기둥이 된다. 성암 성암 우리 성암 길이 빛나리 우리 성암 교. 교정을 떠난 나는 궁궁한 학교의 역사를 알기 위하여 다시 어르신을 찾아가기로 하는데, 집으로 찾아가니 부재 중이라 인접하게 가야산 언저리로 넘어가 한 식당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고 나서 가야 국민호텔로 들어가 목욕을 즐겨면서 다소의 시간을 보내고 대선배 집으로 다시 찾아가 보는데, 그 사이 선배가 되시면서 84세 '이석홍' 어르신이 집에 계시므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상신리에 대한 초등학교 내력을 경청하기로 한다. 이곳 상신리 당안 동네에는 남평 '문(文)씨' 성을 가진 집성촌으로 매우 부촌(富村)을 형성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집안에서 천석(千石)을 할 정도의 부자가 많아 학교를 건립하도록 마을 앞에 있는 대송로 398번지에 수천평 땅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부에서는 1943년 기부한 땅에 초등학교를 건립하면서 교명을 '상신초등학교(相新初等學校)' 이라고 불려졌는데, 처음에는 단칸의 건축물을 건축하여 1회 학생 30명을 입학하였고 매년 학년이 올라가므로 신입생을 위하여 단칸의 건물 내부에 칸막이를 설치하면서 함께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곳 상신초등학교에서 3년간 공부를 하다가 1947년에 새로운 둥지가 되는 마월1리로 이전하면서 학교명을 성암초등학교로 변경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1회 학생 30명 전원은 4학년을 월반(越班)하여 5학년으로 바로 올라갔다고 한다. 용암면사무소 인접하게 있으면서 먼저 개교하였던 용암초등학교(龍岩初等學校)를 다니고 있으면서 거리가 먼 4학년 학생은 가까운 성암초등학교 5학년으로 정상 편입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학생의 수가 증가되어 36명이 공부하였지만 강제로 편입을 당한 6명의 학생은 우수한 학력 차이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제1회 졸업생 36명 중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8명으로써, 존함이 김한은(계상), 김진태(마월), 이창기(마월), 이석홍(상신), 이현기(명포), 이완섭(상신), 이준기(상신), 문장수(상신 : 여) 어르신으로 작년(2018년) 까지 몇 명씩 동창회를 결성하면서 모임을 가졌지만 금년부터 고령으로 만남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이석홍 어르신을 모시고 상신초등학교 부지(敷地)를 구경하기 위해 집에서 조금 위쪽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당안 동네로 올라가 보는데, 당시의 건축물은 6. 25 전쟁 때 소실되어 현재에는 다른 건축물을 건립하여 한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고 운동장에는 가축을 키우는 우사(牛舍) 건물도 함께 하고 있다. < 상신리 당안 동네에 있으면서 처음 학교가 되는 '상신초등학교' 부지에 건립된 가정집 > < 학교 부지를 설명하여 주시는 '이석홍' 어르신 > < 상신초등학교가 있었던 '건축물' 지번 > < 운동장에 지어진 '우사' 건물 > 오늘 내가 지금까지 인지(認知) 못하고 있었던 성암초등학교 발자취를 조명하여 보았는데, 혹시 나의 블로그를 보는 선배 또는 후배들은 더 많은 스토리(Story)를 알고 있으면 내용을 댓글로 개진(開陳)하여 주면 고맙겠다. 내가 직접 성주 교육지원청을 방문하여 다양한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거의 자료가 없어 실패를 하였는데, 그래서 1회에서 14회까지 년도별 졸업사진을 가지고 있는 기수가 있다면 기수별 사진을 모아 함께 첨부(添附)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피력(披瀝)하여 본다.-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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