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7일.(토요일)
나는 나의 고향이 되는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마월리(마천 부락)로 귀촌(歸村) 한지가 벌써 3년째 되는데, 매번 농사에 매진하다가 허리가 아파 일어서면 눈으로 인사하는 해발 556m '성암산(聖岩山)' 을 지척에 두고 있는 산이라 오늘 산행을 결심하여 보기로 한다.
< 나의 농원 뒤편에 있는 "성암산" >
< "가죽나무" 묘목이 성장하고 있는 농원 >
< 농원에서 내려보는 "마천 부락" 전경 >
이곳 성암산은 내가 어릴 적 정월 대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몇몇 자연부락에서 달집태우기를 위하여 경쟁적으로 올랐고, 산의 기슭에는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하여 구석구석 찾아다니다 보니 눈을 감아도 오를 수 있는 모태(母胎)의 산이라 하겠다.
< 어릴적 수 없이 올랐던 "성암산" 전경 >
성암산이 나의 삶이 되고 내가 성장할 때 너무나 많이 올랐던 산으로써 아직도 산의 5-7부 능선에 아버지에게 상속 받은 산이 존재하고 있으면서 산의 양지바른 곳에 부모님 산소가 있어 매년 찾았지만, 몇년 전 농원 근처에 문중 산소를 만들어 이장하므로 이제는 거의 오름이 단절되어진 산이다.
이렇게 망각되고 있는 산에 다시 오르고 싶은 마음을 싹트게 하는 것은 몇 십년 전 부터 우리 부락으로 농가를 매입하여 주말 농장을 운영하면서 아직도 현직 계명대학교 교수로 제직하고 있는 젊은 부부가 있는데, 그 부부가 부락의 역사(歷史)를 알고 싶다는 의견에 따라 먼저 마을의 뒷산을 동행 탐방하여 보기로 한다.
토요일이지만 학교의 업무로 오전까지 근무하고 나서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인접하게 명포 마을로 귀촌하고 있는 또 다른 교수부부와 함께 농촌으로 왔는데, 나의 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지고 산의 출발지가 되는 '웃지수골' 이라 마을로 이동한다.
< "웃지수골" 입구에 있는 산행의 들머리 >
마을의 입구에 있는 '성암사(聖岩寺)' 이라고 쓰여 있는 입간판을 보면서 산행의 들머리로 올라가는데, 다소 급경사의 마을 안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지역민들에게 요가 등 운동을 가르치는 일도문화원(一道文化院)이라는 수련원을 만난다.
< 웃지수골 마을 중간 정도에 있는 "일도문화원" >
이곳 수련원을 지나면서 조금 더 내부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성암산으로 올라가는 산행길 조감도가 서 있고, 조감도 바로 뒤편으로 성암사라는 사찰이 눈에 들어오므로 먼저 사찰을 돌아보기 위하여 경내로 올라가 본다.
< 성암사 바로 아래 "산행의 들머리" 입구에 있는 산행 조감도 >
< 조감도 옆에 있으면서 산행 목적지까지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 >
경내의 입구에는 많은 장독대와 함께 아담한 마당을 가지면서 마당의 왼편으로 요사채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일단의 축대 위로 본당이 되는 대웅전 같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아직도 건물에는 단청도 칠하지 않으면서 건물 내 모시는 부처님의 신분(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을 알게하는 현판도 붙어있지 않은 사찰이다.
< 많은 장독대와 함께 하고 있는 "성암사" >
<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 건물 >
< 건물의 처마 중앙에 "현판" 도 없는 본당 >
내가 성장할 때 까지 성암사라는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사찰의 내력이나 좀 알아보기 위하여 스님을 찾았지만, 경내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두 마리 개들이 요란하게 짖으므로 사찰을 떠나기로 한다.
다시 조금 전에 지나온 산행의 입구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등산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발 아래로 방금 지나온 웃지수골이라는 동네가 따뜻한 봄을 꿈꾸면서 고요 속에 잠들고 있으면 산길의 좌우에는 다수의 거자수나무(일명 : 자작나무)들이 성장하고 있다.
< 산행의 들머리에서 바라보는 "웃지수골" >
초봄의 입맛을 돕게 하기 위하여 지리산 주변에서 자생하고 있는 고로쇠나무에서 수액을 많이 생산하고 있지만 이곳 성암산의 모산이 되는 가야산 주변에는 거자수나무들이 많이 자생하면서 한 때 4월 초 2일간 거자수 축제가 열렸는데, 이곳 성암산 산행 들머리에도 흰백의 고운 색을 가진 거자수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산의 깔닥고개에 도착하면서 능선에는 성주군에서 성씨를 두고 있는 성산배씨(星山裵氏)의 무덤 몇 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묘소가 얼마나 큰지 이곳 성주에서 옛 가야의 한 부족으로 번성하였던 성산가야(星山加耶)의 고분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 산의 깔닥고개에 있는 "성산배씨" 의 무덤 >
무덤 뒤편으로 정자 한채가 지어져 있어 정자에 올라 주변 풍광을 구경하여 보면 무덤 전면으로 성주의 명산이 되는 '성산(星山)' 이 자리하고 있으면서 그 산의 정점에 군사시설이 보이고 있는데, 성산에는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탐지하기 위한 사드(THAAD)를 배치하기 위하여 처음 추진하였다가 성주군민들에게 큰 시련을 안겨 주었던 산이라 하겠다.
< 정자와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성산" 전경 >
이곳에서 부터 산행의 길은 능선으로 올라가지만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면서 통나무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거의 아사직전(餓死直前)의 길이 된다.
< 끝없이 이어지는 "통나무계단" 을 걸으면서 >
< 함께 산행을 추진하는 "계명대학교 교수 부부" >
수 많은 휴식의 시간과 더불어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고도를 상승하는데, 왼편의 나무 사이로 나의 고향 마을과 더불어 농원이 희끈희끈 보이고 있지만 너무너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와 잡목으로 좋은 풍광은 열리지 않는다,
< 소나무와 잡목 사이로 보이고 있는 "고향 마을" >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통나무계단의 끝지점에서 부터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길이 이어지기 시작하는데, 이곳의 산행 길에는 소복하게 쌓인 갈비로 양탄자 보다 더 폭신한 길이 되므로 정말 힐링(Healing)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 폭신한 "갈비" 의 길을 걸으면서 >
< 산의 정상아래 마지막에 있는 "통나무계단" >
다시 2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산의 정상 언저리에 도착하면서 정상 바로 아래 2기의 무덤이 앞과 뒤로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이 무덤을 돌아서 10여 미터 정도 올라가면 성암산 정상에 도착한다.
< 정상 10여 미터 아래에 있는 2기의 "무덤" >
정상에는 외로운 소나무 한그루를 벗으로 하면서 해발 556m를 가리키는 성암산(聖岩山) 정상석과 더불어 오직 본봉만 있는 무명의 무덤 한기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정상석은 2016년 지역에 있는 성암초등학교 총동창회 산악회에서 건립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 외로운 소나무와 함께 하고 있는 "정상석" >
먼저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몇 장을 남기고 주변의 풍경을 돌아보기 시작하는데, 산의 전면 바로 아래에는 나의 고향 마을과 함께 북쪽에서 남쪽까지 길게 흘러내리고 있는 낙동강과 더불어 그 뒤편 대구광역시의 아파트 군락지가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 계명대학교 교수와 함께 "정상석" 을 배경으로 >
< 정상의 전면에 있는 "낙동강" 전경 >
눈을 약간 왼편으로 돌리면 성주군의 중심지가 되는 성주읍시가지와 더불어 성주의 특산품이 되는 참외를 키우는 비닐하우스가 온 산의 골짝 구석구석에서 하얀색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 전면에서 약간 왼편으로 돌리면 만나는 "성주읍과 비닐하우스" 전경 >
눈을 뒤편으로 돌리면 성주군의 진산이 되는 해발 1433m 가야산 능선이 지척으로 두고 있는데, 그 앞에 가야산 골짜기에서 흘려내리는 물이 무흘구곡과 포천계곡을 만들면서 본류가 되는 대가천으로 흘려가고 있다.
< 높고도 높게 보이고 있는 "가야산" 능선 >
우리나라 산경표(山經表)에서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뜻으로 모든 산 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고 오직 한 개의 길로 이어진다.' 라는 뜻과 같이 성암산과 가야산 사이에 대가천이라는 물길로 인하여 두개의 산은 같은 산맥(山脈)이라 하지 못하고 다소의 간격을 두고 있다.
정상석 뒤편에 만들어져 있는 의자에 앉아 배낭으로 담고 온 간식과 물을 마시면서 내가 알고 있는 성주군을 비롯하여 이곳 성암산 내력(來歷)을 대충 이야기 하여 보기로 하는데, 성주군은 철기시대 이전 부터 형성되어진 고을로써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포함하여 청동기시대로 추정하는 다수의 취락지, 입석, 지석묘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한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성주군에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동일하게 소국(小國)이 등장하면서 소국의 모태가 되면서 6가야의 하나가 되는 '성산가야(星山伽倻)' 가 탄생하면서 현재의 성주읍과 선남면 및 용암면 주변으로 많은 가야고분이 남아있다.
이곳 가야고분에서 출토되어진 많은 유물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놈들이 강탈하여 밀반출하였고, 일부분 남아있는 유물마저 함께 걷고 있는 일행의 일터가 되는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므로 6가야 중 유일하게 성주지역에서만 가야박물관이 없는 지자체가 된다.
고려시대로 들어와 호족들의 득세로 이곳 고을이 크게 부상하면서 고려 태조 때에는 경성부로 승격이 되면서 1군 14현을 관할하게 되며 그 위세를 크게 떨쳤고, 고려 말 충렬왕 때에는 고을의 위상이 크면서 경성부에서 성주부(星州府)로 승격되면서 이 때 부터 '성주(星州)' 라는 지명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제도 개혁으로 인하여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면서 성주 인근에 있는 가리현, 팔거현, 화원현을 속현(屬縣)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때 성주는 경상도에서 가장 넓은 토지를 보유 함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면서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巨邑) 중 하나가 된다.
조선시대 때 각 지역의 관찰사(觀察使)가 상주하여 업무를 보았던 경상도 감영(監營)이 임진왜란 때 일시적으로 성주에 두었는데, 그때에 둔 감영의 위치는 현재 경북 칠곡군 칠곡이면서 성주목 팔거현(八莒縣)이 된다.
현대에 들어와서 근대적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주군은 대구부(大邱府)에 속하였지고, 1905년에는 인곡(仁谷), 덕곡(德谷), 노다(老多), 다산(茶山) 등 4개 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蘆谷面)이 현풍군으로, 증산면(甑山面)이 지례군으로 각각 편입되므로 관할구역이 대폭적으로 축소가 된다.
성암면의 중추적 산이 되는 성암산은 수 많은 암자와 더불어 성스러운 바위가 많다고 하여 성암산이라 불려지고 나의 모교가 되는 '성암국민학교(聖岩國民學校)' 도 성암산 기슭에 자리 함에 그에 따른 이름이라 하겠다.
나의 출생지가 되는 마월리(麻月里)를 품고 있는 면(面)은 한 때 용두면과 성암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934년 2월 용두면(龍頭面)의 용(龍)자와 성암면(聖岩面)의 암(岩)자를 따서 '용암면(龍岩面)' 으로 통합되어졌다.
현재 성주군에는 성주읍을 비롯하여 선남면, 용암면, 수륜면, 가천면, 금수면, 대가면, 벽진면, 초전면, 월항면 등 1개의 읍(邑)과 더불어 9개의 면(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면적 616.14 km² 에 인구 46.500명(2014년 기준)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 성주군에서는 가야산 칠불봉(七佛峰)을 으뜸의 산으로 자리하고 있으면서 지방자치단체 내에는 올막졸막한 산들이 곳곳에 자리하면서 산을 기대어 촌락을 형성하고 있는데, 해발 556m의 성암산도 다소 높은 산에 속하면서 주변으로 장자골, 임진골, 중생골, 갈명골, 곰짓골, 옥밭골 등 다소의 큰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많은 골짜기 중에서 중생골에는 신라의 천년고찰이 되면서 불국사의 말사가 되는 '두무사(頭無寺)' 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골짜기 언저리 입구에 나의 생가 및 농원이 있는 마천(磨川) 부락이 자리하고 있다.
< 왼편으로 두무사가 있었던 "중생골" 계곡 >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곳 성암산 정상에 무덤을 쓰면 후손 3대에 거쳐 장원에 급제한다는 풍문이 날 정도로 길지(吉地)이라고 하였는데, 반대로 만약 누군가 무덤을 쓰면 산의 밑에 있는 고을에는 재앙(災殃)이 내리면서 마을이 쇠퇴하여 진다고 하였다.
타지에서 살고 있었던 한 젊은 부부가 이 전설을 인지하고 모친이 사망하자마자 성암산 꼭짓점까지 야밤 중에 몰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올라와 묻었는데,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고 살아지므로 산 아래에 있는 어떠한 동네에서도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다음해 달집 태우기를 위하여 정상에 올라와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 성암산 정상에 있는 무명의 "무덤" >
그래서 성암산 주변의 마을이 쇠퇴(衰退)의 길로 들어가고 있으면서 특히 내가 살고 있는 마천 부락은 더욱더 쇠퇴의 길이 빨라지고 있었는데, 마을의 쇠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외지의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화합이 이루어진다면 쇠퇴의 길에서 원상회복의 길로 바꾸어 진다는 예언(豫言)이 내려오고 있다.
교수들에게 짧은 지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하산의 길로 들어가기로 하는데, 하산의 길은 올라왔던 길과 반대편이 되는 계산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곰짓골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하산의 길은 매우 평탄하면서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마음으로 조금 내려가니 산의 주변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꺾여 파손되어져 있는데, 원인은 몇일 전 이곳 가야산 주변으로 춘삼월에도 많은 눈이 내리므로 눈의 무게로 꺾어짐을 알게한다.
< 하산길에서 만나는 고목의 "소나무" >
< 눈의 무게로 꺾어진 "소나무" >
자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인지하면서 조금 하산을 하면 잘 꾸며져 있는 무덤과 더불어 3거리가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계속하여 능선 따라 가면 곰짓골로 종주하는 길이 되지만 오늘 산행의 출발시간이 너무 늦으므로 종주를 포기하고 왼편의 계산리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 3거리 인근 잘 조성되어진 "무덤" >
계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산을 개간하여 나무를 심으면서 거대한 농원을 만들고 있는데, 농원의 입구에는 잘 가꾸어진 가족묘와 더불어 묘소 앞에 2층의 정자까지 만들여져 있어 많은 돈을 투자함을 느끼게 한다.
< 3거리에서 왼편 방향으로 개간하고 있는 "농원" >
< 농원의 입구에 있는 "정자와 가족묘" >
이곳 농원을 지나면서 임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계산리의 제일 상부 골짜기에 있는 과수원 밭을 만나는데, 이곳에서 생산하는 사과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고랭지이며 한대의 차량도 움직이지 않아 미세 매연 또는 황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란 사과이라서 만약 내가 과수원 주인장이 된다면 1개에 만원을 주어도 팔지 않겠다.
<고랭지이며 심심산골에 있는 "사과" 과수원 >
함께 걷는 교수와 사모님에게 아무리 맛 좋다고 선전하는 청송, 거창, 지리산 같은 곳에서 생산하는 사과 열개를 먹는 것 보다 현재 눈으로 체험하고 있는 이곳 사과 한개라도 먹어보는 것이 건강에서 최상의 보약이 되겠다는 홍보대사로 자청하여 본다.
임도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다시 산의 모퉁이를 돌아서 성암산 허리길로 들어가는데, 이곳의 길은 나의 산이 되는 상부지점으로 가는 길과 옛날 어릴 적 밤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려 넘어 다녔던 고갯길이 있었으나 수십 년 동안 사람의 왕래가 없으므로 완전하게 살아진 길이다.
옛 추억을 상기하면서 하산 길로 접어드니까 이내 잡목과 가시덤불로 길을 가로 막고 있으면서 곳곳에 산사태로 길이 유실되므로 완전하게 길을 개척하면서 한 20분 정도 내려가니 중생골의 상부지점에 도착한다.
중생골의 상부에는 어릴 적 산속으로 방생한 소를 찾아 수없이 올라와서 머물었던 '두무사(頭無寺)' 라는 절터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절터에서 물도 마시고 놀았던 장소가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그 때 있었던 추억의 고목나무 한 그루가 사찰의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
< "두무사" 터를 알리는 고목나무 >
두무사는 내가 태어나기 전 까지 경내에 거주하는 스님이 매일 탁발을 하기 위하여 중생골을 통하여 마을로 내려왔는데, 이 때 우리 마을에는 고귀한 양반의 득세로 마을이 쇠퇴한다는 예언을 소귀에 경을 읽는 수준으로 들으면서 스님에게 악행을 저질렸다고 집안 어르신의 이야기가 귀전에 맴돌게 한다.
탁발을 하고 올라가는 스님의 망태기에 시주한 쌀을 빼앗고 대신 소똥을 넣고 올려보내는 등 각가지 횡포(橫暴)를 부리므로 결국 스님들이 떠나가면서 사찰은 자연 소멸되고, 동시에 우리 마을에도 죄악(罪惡)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는 것과 동시에 성암산 정상에 있는 할머니 무덤에 따라 재앙이 중첩된다.
그런 결과로 마을에는 저명한 인물이나 사업가도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농촌과 비슷하게 젊은 층의 이탈로 수십 년간 폐가가 속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천만다행으로 예언과 같이 현재는 다수의 외지 사람들의 귀촌으로 쇠퇴를 멈추고 다소 활기를 찾아가고 있는 고을이라 하겠다.
어찌하던 살아지고 없어진 절터까지 접근하여 보지도 못하고 먼 발취에서 사찰을 그려보다가 다시 하산길을 재촉하게 하는데, 산에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전연 없으므로 길을 만들면서 하산을 하고 있으니 자연산 버섯과 더불어 거대한 칡덩굴 등 한약재 원료들이 곳곳에 자생하고 있다.
< 낙엽 속에서 만나는 "상황버섯" >
< 항암 치료재가 되는 "운지버섯" >
< 아름다운 색을 가지고 있는 "버섯" >
이곳 절터에서 다소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6.25 동란 때 피난처가 되는 몇 가구의 가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나의 고향 성주는 낙동강 서쪽에 자리하므로 낙동강 방어선 따라 이북에서 남하한 괴뢰군들이 득실 함으로 동네 어르신들은 이곳 산속으로 올라와 살았던 피난처가 된다.
전쟁이 끝나면서 한집 한집 마을로 다시 내려왔지만 최후까지 남아있었던 한 가옥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거주하였는데, 이 집에서 거주하는 어르신에게 신년 세배를 드리기 위하여 올라왔던 추억도 함께하는 골짜기가 된다.
다시 20분 정도 하산을 하면 두무지(頭無池)이라는 작은 저수지를 만나는데, 이곳 저수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적 마을의 농업을 위하여 건립되어진 저수지이지만 현재는 산에서 내려오는 흙으로 완전히 메워져 있고, 이곳 저수지에서 부터 다시 500m 정도 더 내려가면 새롭게 만든 다소 거대한 두부지(頭父池)이라는 저수지를 만난다.
< 마을의 뒤편에 있는 "두부지" 저수지 둑 >
이렇게 새롭게 축조한 저수지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직장 생활을 할 때 만들어진 저수지가 되는데, 이곳 저수지의 제일 복판에 내가 태어난 생가(生家) 집이 있지만 현재는 수중에 들어가 원칙적으로 나의 생가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살아진 상태이라 하겠다.
두부지를 지나면서 마을 안길 따라 조금 돌면서 오후 5시 경 원점이 되는 나의 농원에 도착하는데, 오늘 추억을 상기하면서 성암산 일부분을 종주하면서 약 4시간 정도 걸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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