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3일. (수요일)
나는 작년 부터 주말농장을 한번 운영하여 보기 위하여 현재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나의 고향이 되는 성주군 용암면 마월리 까지 수시로 농장을 왕래하면서 소일거리 일을 하고 있다.
나의 고향은 남성주 IC에서 성주 방향으로 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면서 지방도로의 중간 정도로 올라가면 성주 방향과 가야산이 있는 수륜면 방향으로 나누어지는 3거리 지점을 만나는데, 3거리 지점의 가장자리에 "옥천서원(玉川書院)" 이라는 작은 이정표가 자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일반적인 운전 형태가 된다.
< 지방도로 3거리 모퉁이에 있는 매우 적은 "옥천서원" 이정표 >
몇년전 부터 이 옥천서원의 이정표를 보고 한번 방문하여 보아야 하겠다는 마음은 간직하고 있었지만, 차일피일 날짜만 지나치다가 금일 농장으로 올라가 약간의 잡일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번 찾아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민들은 3거리 모퉁이를 "구만 모퉁이" 이라고 불려지는 도로에서 가야산 방향으로 약 1.5Km 정도 더 들어가면 대봉2리 봉산이라는 아담한 마을이 나타나는데, 그 마을 입구에 다시 옥천서원을 알리는 입석이 반겨준다.
< "구만 모퉁이" 이라고 불려지는 3거리 >
< 봉산마을 앞에 있는 "정류장" >
< 마을 입구에 있는 "옥천서원" 입석 >
소로의 마을길 따라 동네로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동네의 역사를 말하여 주는 거대한 당산나무가 삭풍(朔風)에 앙상한 가지를 들어내어 놓고 기나긴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적막감이 흘려내리고 있다.
< 안개 속에 적막감이 흘려내리는 "봉산마을" 전경 >
< 마을의 수호신이 되는 "당산나무" >
마을 제일 뒤편이 되는 야산 기슭로 올라가면 굳게 잠겨져 있는 솟을대문 앞에 조그마한 주차장과 더불어 옥천서원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어, 먼저 안내문을 정독하여 본다.
< 옥천서원 외삼문이 되는 "행의문" >
< 서원 앞에 기술하고 있는 "안내문" >
안내문에 기록하고 있는 옥천서원은
조선 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 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숙종18년(1692년) 성주목사와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마을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년) 사액이 내려진다.그후 충렬사는 옥천 충렬사(玉川 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1919년 직계 후손들의 집성촌이 되는 현 위치에서 중건하였다고 한다.이사룡(李士龍)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 중기의 무인으로써, 그는 인조 18년(1640년)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원병을 요청하므로 징발되어 동북 지방의 전투에 출전 하였다고 한다.이듬 해가 되는 1641년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입은 명나라 은혜를 생각하여 전투에 임하면서 명군에게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 당하였으며, 그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으며 정조 17년(1793년) 성주목사로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진다.서원은 봉산마을 뒷편 산록 경사지에 위치하여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였으며,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忠義齋)와 동재 및 서재가 자리하고 뒤쪽으로는 제사를 올리는 사당 충렬사(忠烈祠)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법을 취하고 있다.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에 사당의 역활을 대신 하였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여,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동일한 바운다리(Boundary)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제향의 주인공이 되는 이사룡 선생님의 조선 후기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매우 주목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적인 가치가 높은 서원이라 하겠다. 선생은 "성산이씨(星山李氏)" 의 능일(能一)의 후손이며 정건(廷建)의 아들로 광해 4년(1612년)에 태어나 향년 29세가 되어지는 인조 19년(1641년)에 돌아갔고, 명나라 조대수(趙大壽)의 군대와 싸우다 배반의 불가함을 역설한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가 "대명충신(大明忠臣)이요 조선의사(朝鮮義士)" 라 크게 써서 휘장에 걸고, 청나라 태종도 의로운 일이라 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환국할 때 그의 시신을 운구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인조가 지나가는 길의 5도(五道) 감사에게 명하여 예장 하도록 하고 장군의 고향 작촌에 안장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의 성주목사 최유연(崔有淵)에게 명하여 묘(墓)에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숙종 18년(1692년)에 향리 사람들이 그의 옛터에 사당을 짓고 옥천(玉川)이라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서원 정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 옆에 있는 관리사 집으로 올라가니 어설푸게 잠겨져 있는 대문을 살짝 열고 서원 내부로 들어가 구경하여 보는데, 먼저 옥천서원 마당으로 들어서면 유생들이 기거하는 현덕재(賢德齋)라는 동재 건물과 양현재(養賢齋)라는 서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서원의 오른편에 있는 "관리사" 집 >
< 동재 건물이 되는 "현덕재" >
< 서재 건물이 되는 "양현재" >
일단의 축대 위로 올라가면 서원의 중심지가 되는 강학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전면 5칸에 중앙의 3칸에는 마루를 깔고 양쪽으로 방을 두고 있으면서 마루의 중앙에는 "충의재(忠義齊)" 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서원의 중심 건물이 되는 "옥천서원" >
< 마루에 중앙에 붙어있는 "충의재" 현판 >
< 옥천서원 마당에서 내려보는 "외삼문과 마을" 전경 >
강당의 왼편으로 돌아 뒤편으로 들어가면 제향의 공간이 되는 내삼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내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서면 제향의 주인공 이사룡 선생님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충렬사가 자리하고 있어 간단하게 묵도(默禱)로써 경의를 표시하여 본다.
< 제향공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되는 "상절문" >
< 이사룡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렬사" >
다시 충렬사를 나와 관리사 뒤편에 있는 가묘를 관람하여 보는데, 몇 단의 계단을 올라가면 서원의 연륜을 말하고 있는 배롱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뒤편으로 가묘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더불어 담장으로 구획하는 작은 영역이 자리하고 있다.
< 서원 오른편에 있는 "가묘" 로 올라가는 계단과 배롱나무 >
가묘를 구획하고 있는 또 다른 내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전면 3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건물의 단청이 너무나 퇴색하므로 매우 고풍 스러움이 묻어나고, 그 오른편으로 새로운 쪽문과 더불어 제기(祭器) 등을 보관하는 새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가묘로 들어가는 또 다른 "내삼문" >
< "가묘" 의 건물 전경 >
이상으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옥천서원을 돌아보는데, 임진왜란의 주역이 되는 선조 다음으로 등극하는 광해군은 저물어가는 명나라와 새롭게 부상하는 청나라 사이에 중립적인 외교를 통하여 상호 돈독한 국교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잘 지켰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등극한 인조는 꺼져가는 명나라를 다시 비호 하다가 청나라로 부터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고통의 역사를 만들게 한다.
그래서 인조는 도주하고 있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면서 국격을 땅으로 떨어지게 하는데, 그 청나라를 도우려 갔던 이사룡 장군이 사대주의에 젖어있는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 이야기를 듣지 않고 청나라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면 이렇게 불운의 역사와 더불어 장군도 머나먼 이국 땅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귀국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옥천서원을 떠나기로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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