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31일.(화요일)
공민왕 9년(1360년) 때 14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이색 선생님의 문하에 있었으며 16세 때 등과하여 숙옹부승을 제수받고 후에 장흥고사가 되었고, 21세 때 성균관의 생원이 되면서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정도전· 권근 등과 깊게 사귀었다. 1. 도은 이숭인 선생님의 묘소를 방문하면서. 1) 묘소로 가는 길. 나의 고향이 되는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물산(物産)이 풍부한 영남의 거읍(巨邑) 중에 하나가 되는데, 예로 부터 명현거유(明賢巨儒)들이 많이 배출한 양반의 고을이자 선비의 고장이라 하겠다. 고려 현종(1018년) 때 성주군은 1군 14현의 속군현(屬郡縣)을 거닐고 있었는데, 1군은 고령군(高靈郡)이고 14현은 若木縣(현 칠곡), 仁同縣(현 칠곡), 八莒縣(현 칠곡), 加利縣(현 고령), 知禮縣(현 김천), 金山縣(현 김천), 黃澗縣(현 영동), 陽山縣(현 영동), 管城縣(현 옥천), 安邑縣(현 옥천), 利山縣(현 옥천), 大丘縣(현 대구), 花園縣(현 달성), 河濱縣(현 달성) 등 대전 이남에서 대구의 남서쪽 방향에 있는 화원 및 하빈까지 전 지역이라 하겠다. 많은 선비 중 한명이 되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선생님이 이곳 성주군 출신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알고 있었고. 그의 시신을 모시고 있는 묘소(墓所)가 나의 농원이 있는 용암면사무소 인근에 있다는 입석을 가끔씩 보았지만 무심하게 지나치면서 관심이 전연 없는 입석이 되었다. 도은 이숭인 선생님을 고려(高麗) 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으나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한 고려의 충신 중에 한명이 되는데, 흔히 목은 '이색(李穡)' 및 포은 '정몽주(鄭夢周)' 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고 불려진다. 역사책에서 삼은 중 도은 이숭인 선생님을 빼고 야은 '길재(吉再)' 선생님을 삽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의 생각으로 야은 선생님은 고려가 망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고향이 되는 구미 금오산으로 낙향하여 은둔 생할을 하였지만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다는 인연으로 많은 재물(財物)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다. 더불어 도은 선생님은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살 당하므로 제자들이 거의 없지만 야은 선생님은 천수를 누리면서 영남에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므로 후학들이 억지 춘향이와 같이 삼은으로 강압적 추대하는 경향이 많아, 진정 삼은으로 모시기에는 다소 떨어지는 선비이라 하겠다. 금일 용암면사무소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재난에 따른 긴급 생계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하여 나의 농원에서 면사무소까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을 구경하면서 면사무소로 내려가 서류를 재출하고, 관심이 거의 없는 이숭인 선생님의 묘소를 한번 방문하여 보기로 한다. < 나의 농원에서 용암면사무소로 가는 길의 '벚꽃' > 용암면사무소에서 나의 농원이 있는 마월 방향으로 200m 정도 올라가면 남성주 Toll gate가 자리하고 있는데, 도은 선생님의 묘소를 가르키는 입석은 남성주 Toll gate까지 100m 정도 못 가서 오른편 방향에 자리하고 있다. 입석에서 표시하고 있는 4Km 지점에 묘소가 있다는 방향에 따라 2Km 정도 들어가면 해목마을회관을 만나는데, 이곳 마을회관에서 왼편 골짜기로 들어가는 매우 좁은 본리3길 입구에 또 다른 입석이 서 있다. < 남성주 Toll gate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입석' > < 해목마을회관 앞 본리3길 입구에서 또 다시 만나는 '입석' > 본리3길은 고속도로 아래로 이어지면서 골짜기 따라 다시 2Km 정도 들어가면 작은 연못과 함께 까지산 아래에 있는 '길조암' 이라는 무명의 작은 사찰을 만난다. 이곳 사찰의 뒤편 야산 기슭에 도은 이숭인 선생님의 묘소를 돌보는 관리사 건물과 함께 1년에 한차례 제례(祭禮)를 올리는 '원모재(遠慕齋)' 가 자리하고 있다. < 야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원모재' > 2) 도은 이숭인 선생님의 생애. 이숭인 선생님은 고려 말 1347년 아버지 이원구씨와 어머니 언양김씨 사이에 2남 3녀 가운데 맏아들로 현재의 장소가 되는 성주읍 경산리에서 태어났는데, 본관은 성주이씨(星州李氏)이며 자는 자안(子安)이고 호는 도은(陶隱)이다. 24세 중국의 과거에 응시 할 인재를 뽑는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나 나이가 미달하여 가지를 못하였지만, 그후 성균직강· 예문응교· 전리총랑을 지냈다. 우왕 즉위 년에는 '친명파' 이라고 하여 대구현(大丘縣)에 유배 되었다가 4년 뒤 소환되어 성균사성·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 하였는데, 1386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고려 33대 창왕이 즉위(1388년) 할 때 최영(崔瑩) 일파의 참소로 도은 이숭인 선생님은 통주로 유배되었으나, 최영 장군의 몰락으로 다시 소환되어 밀직사사(密直司使)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자 그 일파로 몰려 순천으로 다시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에 앞서 정도전의 심복이 되는 '황거정' 에 의해 피살을 당한다. 그후 태종 이방원이 그의 죽음이 무고(誣告)이라는 것을 밝히고 나서 태종 6년(1406년) 이조판서로 증직(贈職)되었고, '문충(文忠)'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고 한다. 3) 관리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염치불구(廉恥不拘)하고 관리사로 들어가 문을 노크하면서 관리인과 대화를 나누어 보는데, 관리인은 도은 선생님의 17대 후손으로 용암면사무소 인근에서 출생하여 어릴적 서울로 올라가 40여 년 동안 서울 생활을 하다가 10여 년 전 문중의 요청으로 귀촌하여 혼자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 원모재와 함께 하는 '관리사' > 더불어 도운 선생님이 지필한 '도은집(陶隱集)' 이라는 한권의 책을 선물하여 주는데, 도운집은 이색의 목은집, 정몽주의 포은집, 정도전의 삼봉집과 함께 여말(麗末) 지식인들의 성리학을 연구하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의 책으로 시집 3권과 문집 2권 등 도합 5권 2책으로 총 195판으로 구성하고 있다. 4) 묘소를 돌아보면서. 나보다 연세(年歲)가 다소 높은 관리인(현 80세)이 묘소를 가르켜 주겠다고 하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하는데, 원모재 뒤편으로 이어지는 다소 급경사의 오르막 길 따라 한 2-3백 미터(m) 정도 올라가면 3기의 무덤이 일렬로 자리하고 있으면서 제일 상단에 있는 무덤이 도은 선생님의 묘소이라고 가르켜 준다. < 까치산 7-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도은' 선생님 묘소 전경 > < 묘소의 왼편 산신제를 올리는 '좌판' > 묘소는 해발 약 290m 까치산 정상의 7-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데, 본봉의 주변에는 12지상을 새긴 둘레석으로 감싸고 있으면서 묘소 앞에는 좌판과 함께 비석 및 좌우 한쌍의 망주석(望柱石)을 갖추고 있는 단촐한 무덤이 된다. < 정면에서 바라보는 '묘소' > < 묘소의 내력을 기술하고 있는 '비석' > 무덤 좌우측으로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루고 있는 까치산 지맥(支脈)이 끝없이 펼쳐지면서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의 깊은 골짜기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모습을 하고 있어 풍수의 지식이 전무한 내가 보아도 명당의 자리가 되겠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 묘소 앞에서 바라보는 '골짜기' 전경 > 관리인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면서 묘소로 부터 내려와 헤어짐을 가지는데, 만약 시간이 허용한다면 인접하게 있으면서 가야산 언저리에 있는 수륜면사무소 뒤편으로 들어가면 도운 선생님 '기념관(記念館)' 과 더불어 '청휘당(晴暉堂)' 에서 더 많은 역사를 알게하여 줄 것이라고 하면서 방문의 권유를 받는다. - 1부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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