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여행 및 산행.(전라도)

"윤선도와 송시열" 선생님의 발자취가 동시에 있는 전라도 "보길도" 여행기를 적어보며.

용암2000 2010. 5. 25. 20:35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공휴일을 포함하여 3일 간 연휴가 시작하는 날, 직장생활하는 2째 아들과 함께 즐거운 연휴를 보내기 위한 여행 Schedule을 만들어 찾아 나선 곳 전남 완도군 "보길도" 로 떠난다.

남해고속도로에 올라서니까 수 많은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어 남해 방향으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의 일번지로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산천과 해안 및 섬 들이 있다보니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 길을 나선가 보다. 

약 6시간 운전하여 도착한 곳 육지의 땅 끝자락 해남군에 있는 땅끝마을에 도착하니까, 배에 승선 할려는 수 많은 차량들 줄이 끝도 없어 이어져 교통정리 하는 전경 아저씨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노화도" 로 들어가는 3대의 배가 운행시간과 관계 없이 부지런히 싣고 날라도 중과부족인 것 같은데, 차량의 정체는 더욱더 심화된다.  

땅끝마을로 오는 길 중간 "완도" 로 가는 갈림 길이 있었는데, 그곳 완도에서도 노화도로 들어가는 배가 있지만 그곳에서 노화도로 들어가는 상황도 Check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바로 온 것이 아쉽다. 

약 1시간 30분 정도 긴 기다림 끝에 오후 2시 배를 탈 수 있다.

노화도 "산양항" 까지 들어가는 배삯은 경차 모닝은 일반 승용차 보다 4.000원이나 활인되어 운전기사 1인 포함 12.000원이고, 나머지 사람들의 승선비는 인당 5.700원을 징수한다.

 

< "땅끝마을" 항구와 차량을 싣고 있는 배 > 

 

약 30여 대의 승용차를 가득 싣고 달리는 배는 다도해 섬 사이를 누비면서 약 30분 운행하여 노화도 산양선착장에 도착한다.

2008년 부터 노화도 이목항에서 보길도 청별항 까지 길이 620m "보길대교" 가 가설 됨으로 인하여, 이제는 보길도 까지 직접가는 배는 없어졌다.

 

< 새롭게 가설된 "보길대교"  전경 >

 

노화도 산양항에서 섬을 가로 질려 10여 분 정도 달리면 제일 번잡한 도시가 되는 이목항이 나타나고, 여기서 보길대교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고산 윤선도 선생님의 발자취가 있는 사적 제34호인 "고산원림" 에 이른다.

고산 선생님의 발자취는 고산원림 이외에도 고산문화체험공원, 동천석실, 곡우당, 낙서재, 등에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고산원림을 한바퀴 천천히 산책하여 보면 조선중기 시인이자 문신이 되는 "고산 윤선도(1587-1671)" 가 어떻게 해서 이곳 보길도와 인연이 맺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치열한 당쟁으로 거의 유배지에서 일생을 보낸 고산은 고향인 해남에서 지내다 병자호란(1637년) 때 인조를 돕기 위하여 수 많은 노비를 거닐면서 강화도로 올라갔다.

하지만 인조의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한 고산은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에 들리게 된다.

은빛과 금빛 모래가 깔린 해변, 울창한 원시림, 기암괴석의 산, 풍부한 물, 보석처럼 예쁜 섬들....

이러한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섬의 중앙에 있는 부용동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마음 먹고 자리 잡는데, 그때 고산의 나이 51세로 "하늘이 나를 기다리는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곳으로 족하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산원림 입구에서 입장료 1.000원 지불하고 내부로 들어가 입구에서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동대 및 서대" 라는 인위적으로 만든 동산이다.

 

< 춤을 추기 위하여 만들어진 가설 무대 "동대" >

 

동대와 서대는 가로 및 세로 각 7.5m 정도에 높이 약 2m의 축대를 쌓아 만든 가설 무대인데, 이곳에서 기생들이 춤을 추는 장소이라고 한다.

개울가에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만든 연못 중앙에 돌다리 하나를 건너면 "세연정(洗然亭)" 건물에 이르는데, 세연정의 세연은 "주위 경관이 너무나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 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 연못과 숲으로 둘려 쌓인 "세연정" 전경 > 

 

정자의 건물 구조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문이 위로 들어 올릴 수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정자 내부에 또 다시 문을 달아 작은 방 한개를 중앙에 두고 있어 한 겨울에도 연회를 즐기기에 안성 맞춤의 건물이다.

특히 고산의 주특기는 현재 "남진" 가수 만큼이나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양반들이 얼마나 풍탕을 즐기면서 생활한 장소인가 생각만 하여도 눈 앞이 선하다.

 

< 사방으로 문을 들어 올리게 하고 중앙에 "방" 을 두고 있는 정자 >

 

윤선도는 인조의 아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의 스승으로 있었는데, 그 후 봉림대군이 "효종" 으로 등극하자 효종은 보길도에 머물고 있는 고산에게 수 많은 재산과 약 3.000여명 노비를 하사한다.

그래서 윤선도는 노비들을 노화도에서 생활하게 하고, 아침에 보길도로 건너와 일을 하고 저녁에 노화도로 건너가 살도록 할 정도의 신분 격차를 두고 생활 할 정도의 소인배 인물이 아니겠는가?

노비에게 얼마나 자비를 배풀고 살았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노화도 사람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야화는 알고 있겠지?

노비들은 천박한 노화도에 살면서 악착같이 일을 하고, 또한 왕성한 종족 번식으로 많은 후손들 생산하다 보니 현재의 이목항에는 번잡한 읍사무소가 있을 정도로 활기찬 섬으로 변모한다.

상대적으로 보길도는 양반들의 득세로 인하여 침체의 섬으로 전락하여 면사무소만 소재하고 있는 모양만 보아도, 그 시대의 현실이 짐작 되겠지......

그래서 노화도는 노비들이 살았다는 뜻을 가진 이름을 따서 "노화도" 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 읍사무소가 있는 노화도 "이목항" 전경 >

 

또한 세연정 주위의 개울가 연못 속에는 크다란 바위 7개를 "칠암" 이라고 불려지는데, 그 바위 주위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다.

세연정과 더불어 주위에 "계담, 판석제방, 옥소대, 비홍교" 등이 있고, 야튼 동산을 만들어서 수 많은 동백나무와 소나무 및 대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한국의 제일 아름다운 정자 중에 하나이다.

세연정 정원과 계곡을 거닐고 있으며 스피커에서 "어부사시가" 시조가 잔잔하게 울러 퍼지고 있는데, 누구라도 이러한 분위기에 머물고 있다면 어부사시가 또는 오우가 시조 한자락 정도는 만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든 후대 사람들은 고산원림에 대하여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 정자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곳" 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 세연정 주변에 있는 "칠암" 과 연못 >

 

다음은 이곳 세연정에서 5분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고산문화체험공원" 이 나오는데, 조그마한 개울을 지나면 울창한 숲속으로 산책 길을 만들어 놓고 곳곳에 어부사시가 40수를 기록하여 놓아 산림욕과 더불어 읽는 재미에 빠져 본다.

 

< "고산문화체험공원" 에 있는 산책 길 >

 

여기서 조금만 더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동천석실" 이라는 팻말이 나타나는데, 산 중터 쯤 흰바위 위에 조그마한 정자 2개 보인다.

 

< 산 중터에 있는 "동천석실" 의 전경 >

 

동백나무 등 활엽수로 덮혀 있는 울창한 숲 길 따라 한 20여 분 정도 올라가면 바위 틈 사이에 새 둥지와 같이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동천석실" 에 이른다.

동천석실 앞에 서면 눈 앞으로 보길도에서 제일 높은 해발 433m "격자봉" 산과 그 산자락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곡수당 및 낙서재" 를 포함하여 부용동의 아름다운 마을이 한 눈으로 들어온다.  

 

< 동천석실에서 본 "곡수당과 낙서재"  및 부용동 마을 전경 >

 

고산은 이곳 동천석실까지 올라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끼하면서 차를 마시고 또한 시문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적당하게 운동도 겸할 수 있는 장소에 정자를 건립하여 자연과 벗 삼아 살았기 때문에 그 시대 보기 드물게 85세 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장수를 누리면서 건강하게 살아간 사람이 되었나? 

 

< 동천석실에 앉자 말자 바로 시상이 떠오른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구름같은 집을 짖고,.... 두 백년 살고싶다.>

 

곡수당은 고산의 아들 "윤학관" 이 머문 곳으로 조성한 집이고, 낙서재는 고산이 주거하면서 살아간 집이지만 초옥 건물 3칸 전부가 소실되었다.

현재 건물을 새롭게 복원하고 있는 중이라 고전 미(美)는 다소 떨어지지만, 보길도의 주산 "격자봉" 에서 혈맥을 찾아 건축한 집이라 고산은 풍수지리에도 많은 안목을 가진 분으로 명당의 장소에 기거 하였다고 보여진다.

 

< 고산의 아들이 머물고 있었든 "곡수당" > 

 

 < 고산이 기거한 초옥을 새롭게 단정하고 있는 "낙서재" >

 

충분한 관람도 겸하면서 여러 곳에 고산 발자취를 거닐어 보고 나서, 보길도 좌측 끝편에 자리하고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님 본인의 신세를 적은 "글씐바위" 찾아 나선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고산 윤선도 보다  20살이나 아래이지만 거의 동시대 살아간 사람으로서 1689년 숙종 때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보길도로 상륙하여 이곳 바위에 한시를 새겼는데, 그것이 "글씐바위" 이다.

우암 송시열은 숙종의 애첩 장희빈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에 반대하는 상소로 인하여 생의 마지막 해가 되는 83세 때 귀양을 가면서도, 임금님이 배풀어 주신 은혜 감사한다는 쓴글을 보니 참 옛 선비의 정신이 가륵하다. 

귀양지 제주도에 도착하여 일개월 정도 살다가 국문을 받기 위하여 한양으로 압송 하든 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한다.

이 바위에 씐 오언 절구의 한시 내용을 적어 보면,

 -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구나.(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바다의 순풍만 믿을 수 밖에.(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韶구舊恩在 感激泣孤衷)

 

< "글씐바위" 에 새겨진 내용의 설명 비석 >

 

거대한 바위 앞에 서니까 새겨진 글씨 탁본하기 위하여 검은 먹물로 칠하다 보니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문화적인 가치가 망실되어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데, 얌체 족들이 아직도 한국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 "글씐바위" 의 전경 : 중간 밑 검은 부위가 탁본한 흔적 >

 

글씐바위 주위의 경치가 환상적이다. 앞에는 완도의 또 다른 거대한 섬 "소안도" 가 눈 앞에 있으며 섬과 섬 사이 바다에는 양식 어장이 끝없이 펼치지고 있다.

이 양식 어장에는 보길도의 주 생산품 "전복" 양식 어장이라고 하는데, 어장 한개 Cell(2m x 2m)에서 1년에 수천만원의 소득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 바다를 덮고 있는 "전복 양식장" >

 

이렇게 보길도에서 전복 양식이 성행하는 이유는 먼저 바다 물이 맑고 또한 조수간만 차이가 심하고 조류 소통이 원활하여 전복의 질이 강하고, 이어 풍부한 먹이가 되는 다시마가 잘 자라는 바다의 특징을 가진 곳이라는 것이다. 

전복양식장 가까이 전복의 먹이가 되는 다시마를 키우는 별도 어장이 형성이 되어 있는데, 그래서 온 바다가 빨간색으로 물감 뿌려 놓고 있는듯 장관을 연출한다.

더불어 "톳" 도 겸하면서 양식하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하니 보길도는 국민 소득이 한국에서 매우 높은 곳 중에 하나이라면서, 이곳 보길도에 처가집을 둔 한 아저씨가 입에 침이 튄다. 

또한 보길도는 글씐바위 주위에는 보길도의 동쪽에 있다보니 일출 명소로 유명한 장소이지만, 섬의 서쪽 "망끝전망대" 에서는 일몰이 더 유명함으로 서둘러 반대방향에 있는 망끝으로 가 보기를 추천한다.

 

< "망끝전망대" 기념석을 배경으로 >

 

그래서 전력 투구하여 망끝에 도착하니까, 날씨가 약간 흐려지면서 일몰이 조금 지나가고 있다.

망끝의 일몰 풍경은 한국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소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사진 작가들이 가장 많이 찾은 장소로서 해가 넘어가는 서쪽 바다에는 5개 섬이 올망졸망 솟아 있어 그 속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하는 최적의 조건을 간직하고 있다.

 

< 다소 일찍 저물고 있는 망끝전망대의 "일몰" 풍경 >

 

망끝 좌측 바다로 돌출되어져 있는 곳에 오뚝 솟아 있는 "뾰족산" 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물어가는 해 그름에 희미하게 윤곽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밑에는 "공룡알해변" 이라는 해수욕장이 국궁의 활과 같이 휘어져 있으며 해변에는 둥근 돌들이 깔려 있는데, 그 돌의 모양이 마치 공룡알 같은 크기와 모양을 간직하고 있어 공룡알 해변이라고 불려진다고 한다. 

 

<"뾰족산" 과 "공룡알해변" 의 전경 >

 

해변 끝에서 부터 매우 아름다운 절벽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여 아쉬움이 일어난다..

어둠이 드리워지는 보길도를 뒤로하고 노화도의 번화가 이목항으로 나와 모텔 또는 여관을 찾았지만, 전연 빈 방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최고의 관광객이 섬으로 들어와 모든 방이 동이 낳다는 모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미리 준비하지 못 함이 후회 막급하게 만든다.

보길도로 다시 들어가 민박을 찾아 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길도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 중리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민박집 하나를 찾았는데, 맥이 확 풀린다.

밤 10시가 넘기고 나서야 비로써 보길도 정별항으로 다시 나와 한 식당에 들어가 보는데, 그래서 매우 늦은 저녁식사를 가져 본다.

보길도의 정별항과 노화도 이목항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양쪽에서 바라보는 야경의 불빛이 바다에 반사가 되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해안가를 조금 거닐다가 숙소로 돌아와 매우 늦은 잠에 빠진다.

 

< 노화도 "이목항" 의 야경 풍경 >

 

다음 날 아침 민박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글씐바위가 있어 한번 일출이나 볼까 하는 생각으로 일찍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이슬비가 내리고 있어 그만 두고, 전날 방문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든 "예송리해수욕장" 으로 들어가 본다.

고불고불한 해안 길을 넘어가니 섬의 제일 구석자리에 이렇게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숨어 있는데, 모르고 그냥 갔다면 매우 후회가 될 뻔한 장소이다.     

 

< "예송리 해수욕장" 에 깔려있는 몽돌 >

 

태풍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풍처럼 해안가 따라 심어진 천연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된 수백년이 된 "상록수림" 이 동백나무 및 후박나무와 함께 자생하고 있는데, 그 숲의 크기가 길이가 750m에 폭이 30m나 된다고 한다.

예송리 마을은 고산원림과 낙서재가 자리잡고 있는 격자봉의 반대편 산기슭에 비스듬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적한 어촌이 되는데, 마을에 들어서니 민박집이 수 많이 존재하고 있어 민박집 마당마다 차량이 넘쳐 난다.

어제 밤 이곳으로 진작 발품을 팔았다면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으리라....

마을 앞에는 예작도, 갈마도, 기도, 소도, 복생도, 등 섬들이 고즈늑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 바다에서도 어장을 형성하고 있는 빨간 부표가 예송리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첨가하고 있다.

 

< 상록수림으로 덮혀 있는 "예송리 마을" 전경 >

 

마을 끝에는 초라한 해안초소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다도해국립공원 직원 한명이 더 이상 가지 못 함과 한 모퉁이만 돌아도 어제 저녁에 방문하였던 공룡알 해변이 나오지만, 아직 길이 없어 관광이 불가능함을 설명한다.

지금 완도군에서는 보길도 관광화사업 일환으로 섬 둘레길을 만들고 있는데, 아직 반 정도 밖에 만들지 못하여 이곳에서 부터 출입통제를 하여야 하는 사정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다.  

제법 비방울이 많아 짐으로 인하여 노화도로 넘어와 차량을 이용하면서 드라이브로 섬 일주를 하여 보는데, 노화도는 별다른 특색이나 명승지, 높은산, 아름다운 해안 길도 없는 평범한 농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비를 맞으면서 농부들이 논 가리를 열중하는 한적한 농촌 풍경을 뒤로 하고. 섬에서의 모든 일정을 단축하여 육지가 되는 땅끝마을로 나온다.

시간적으로 많은 여유가 있음으로 땅끝마을에서 새롭게 단장한 해발 122m "사자봉"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기 위하여 모노레일이 있는 곳에 가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어 우산을 의존하면서 걸어서 전망대로 올라가 본다.

 

< 땅끝마을 전망대에 올라가는 "모노레일" >

 

해안의 허리에 만들어진 오솔길 따라 한 20분 정도 걸으니 "땅끝 탑" 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부터 또 다시 30여 분 정도 나무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면 전망대에 이른다.

10여년 전 땅끝마을에 한번 다녀 갔지만 그때와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는데, 전연 새로운 곳으로 온 것 같으면서도 우중에도 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다.

 

< 대한민국 육지 최남단에 설치되어 있는 "땅끝 탑" 전경 >

 

< 사자봉 정상에 있는 "땅끝마을 전망대" > 

 

오는 길에 달마산 "미황사" 를 잠시 방문하여 보는데, 이곳도 3년 전 달마산 종주산행 길에 잠시 스쳐간  사찰이지만 그 사이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 사찰의 변화 속도가 이렇게 빨리 변신이 가능한지 의심이 된다. 

 

< 구름 속에 묻혀 있는 달마산이 품고 있는 "미황사" >

 

집에서 출발 할 때 여행계획은 전남 지방에 산재하고 있는 명승지 몇 곳으로 더 관광하면서 하루 밤 더 유숙 할려고 했으나, 많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의거 1박2일 단축한 나들이 계획으로 변경하여 대구로 돌아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