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기계과 행사.(전라도)

전남을 대표하는 월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강진군 명찰 '무위사' 를 돌아보고.(8)

용암2000 2020. 7. 18. 20:26


3. 셋째날 : 7월 5일.(일요일)



3) 월출산 남쪽에 있는 무위사를 돌아보고.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관광지 대흥사를 떠난 일행은 광주광역시로 올라가는 국도 13번을 이용하여 달려가면 국도변으로 흑석산 능선이 보이고 있는데, 나는 2010년 3월 29일 대구에 있는 어느 산악회에서 별매산 입구에서 산행의 들머리로 잡고 해발 650m '흑석산' 을 종주한 경험이 아득하게 추억으로 다가온다.
지금 산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때 종주 할 때에는 산에는 아무런 안전장치의 시설이 없어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죽음의 산맥이었는데, 지금은 산 아래로 이어지는 국도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암벽을 보고 있으니 정말 반가운 산이 된다.
계속하여 국도 13번을 이용하여 월출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이번에는 월출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면서 강진군이 자랑하는 '무위사(無爲寺)' 로 들어가 보기로 하는데, 이곳 무위사도 까마득한 옛날에 대흥사와 함께 한번 다녀간 사찰이라 이번에는 좀 세부적으로 구경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또한 무위사 앞과 뒤쪽으로 높은 산맥이 흘려가고 있는데, 나는 무위사의 뒤산이 되는 해발 809m '월출산(月出山)' 을 2번(2011년 11월 10일 및 2007년 4월 11일)이나 종주한 경험과 무위사의 앞산이 되는 해발 456m '월각산(月脚産)' 을 2010년 10월 28일에 종주하므로 무위사를 감싸고 있는 모든 산맥을 다 습력(習力)하므로 친근감이 묻어나는 곳이다.
내가 무위사를 방문 할 때에는 일주문 등 어떠한 건물도 없이 산의 기슭에 주불을 모시고 있는 '극락보전(極樂寶殿)' 만 달랑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라는 책을 통하여 너무도 잘 소개하므로 무위사가 유명 사찰로 변모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상기하면서 무위사 방향으로 들어가는데, 13번 국도에서 벗어난 승용차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지고 있는 월출산의 남쪽 방향으로 접근하면서 5분 정도 들어가면 무위사 주차장에 도착된다.


< 주차장 가장자리에 있는 '무위사' 조감도 >


주차장 뒤편 무위사로 올라가는 도로 및 주변 공원이 너무나 잘 조성이 되어져 있는데, 도로 따라 조금 올라가면 먼저 일주문을 만나고 이내 사천왕문을 자리하고 있으며 그 뒤편으로 2층 누각의 건물이 되는 보제루(普濟樓)가 자리하고 있다.


< 무위사의 첫 관문이 되는 '일주문' >


< 무위사 입구 좌측편에 있는 '무위다원' > 
                                                                                               

< 세번째 관문이 되는 '보제루' >


누각 건물을 통과하여 몇 단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넓은 마당의 뒤편으로 주불을 모시고 있는 '극락보전(極樂寶殿)'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극락보전 건물은 매우 적으면서 단출하고 단청도 칠하지 않으면서 천년의 고찰 건축물이 된다.


< 넓은 마당과 함께 하는 '극락보전' >


마당의 가장자리에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무위사는 아침에 방문한 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가 되는데, 신라 진평왕 39년(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헌강왕 1년(875년)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정종 1년(946년)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명종 10년(1555년)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현재 무위사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미륵전, 천불전, 산신각, 종각, 성보박물관, 종무소, 보제루, 사천왕문, 일주문, 요사채 등 많은 건물을 신축하여 다른 어떠한 사찰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사세(寺勢)를 크게 확장하여 놀램을 발생하게 만들고 있다.
더불어 경내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문화재로는 2점의 국보(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와 4개의 보물(아미타여래삼존좌상, 선각대사탑비, 백의관음도, 내면사면벽화) 등을 보유하고 있어 다른 어떠한 사찰보다 많은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 '무위사' 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먼저 문화재의 산실이 되는 극락보전을 감상하여 보는데,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년)에 지어진 정면 3칸에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매우 간결한 건물이지만 아름다운 조각들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유홍준 전 영남대 교수는 '내가 어떤 미사어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 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 같다' 이라고 애찬한 건물이다.
이곳 매우 작은 극락보전은 1962년 10월 20일 국보 제13호로 지정 되었는데, 국보의 지정번호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고 지정 날짜 순서에 따라 순위를 붙여지므로 이렇게 머나먼 강진땅에서 13번째로 지정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우수한 건물이라는 뜻이라 하겠다.


< 국보 제13호가 되는 무위사 '극락보전' >


< 무위사 '극락보전' 의 안내문 >


극락보전 내부로 들어가니 한명의 여성 보살이 내부를 안내하는데, 경내에 모시고 있는 3존불(중앙에 있는 아미타불과 왼편의 관음보살 및 오른편에 지장보살)은 보물 제1312호로 지정이 되어져 있다고 한다.


< '극락보전' 으로 들어가는 측문 >


3존불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조선 초기 불상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매우 큰데,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 극락보전 내에 모시고 있는 '3존불' 안내문 >


3존불 뒤편에 있는 가로 210Cm에 세로 270Cm의 '아미타여래삼존벽화' 가 국보 제313호로 지정이 된 문화재이라고 하는데, 화면 상단에는 본존의 광배 좌우로 3구씩 나한상을 배치하고 이 나한상들과 본존 광배 위를 구름이 둘러싸고 있다.
본존의 광배는 정상부가 뽀족한 두광이 신광과 연결되어 있는 기형광배[箕形光背]로서 15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본존불의 얼굴은 둥글고 단정한 모습이며 머리의 둥근 육계 위에는 정상 계주가 붉게 표현되어 있다.
벽화 내에 있는 사람은 작은 이비구목와 높은 육계표현, 착의법,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의 색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고려 불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고 있는데, 반면에 구도와 광배, 머리 모양 등 세부 묘사에서는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을 가미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불상의 뒤편으로 돌아서가면 건물의 뒤쪽 토벽(土壁)에 보물 제1314호로 지정된 '백의관음도' 가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는 버들가지와 정병을 든 관음보살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노비구를 표현하고 있으며 우측 상단에는 고려시대 문인 '유자랑' 선생님이 쓴 낙산관음찬(洛山觀音讚)이 자리하고 한다.
건물 내부의 벽면 전체에 보물 제1315호가 되는 28매의 '내면사면벽화' 가 그려져 있는데, 성종 7년(1475년)에 조성된 그림으로 이들 벽화는 고려 시대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불화로 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려오는 다양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는데, 극락보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어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그림 속에 있는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
현재 건물 내에 있는 백의관음도와 28매의 내면사면벽화의 그림 모두가 모조픔으로 전시하고 있고 진품(眞品)은 경내에 있는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아마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로 인하여 관람이 가능한지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문제는 보살이 경내에서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증거를 남기지 못하고 옆에 있는 사잇문으로 나오면서 문 밖에서 경내 내부 한장을 찍어보는데, 단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니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 극락보전 내부 전부가 문화재가 되어있는 '3존불과 벽화' >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와 건물의 외형을 구경하여 보면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1955년 보수공사 때 성종 7년(1476년)에 크게 중찬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차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기단(基壇)은 양 옆면과 뒷면의 지세(地勢)를 그대로 이용하여 앞면 만을 높게 쌓았는데,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만을 둘렸으며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건축물은 주심포계(柱心包系)에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 겹처마의 집이 되는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으면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하여 짜임 구조의 장식이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는 '측면' 모습 >


경내의 왼편으로 나아가면 고려 정종 1년(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가 자리하고 있는데,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迥微)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비 받침과 비 몸돌 및 머릿돌을 갖춘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


< 보물 제507호 '선각대사편광탑비' >


< '선각대사편광탑비' 의 안내문 >


그 옆 마당의 가장자리에 3층석탑 한기가 서 있고 뒤편에는 미륵전(彌勒殿)과 산신각(山神閣)이 함께 하고 있는데, 미륵전 내에는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石佛) 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 마당의 왼편 가장자리에 있는 '3층석탑' >


< 3층석탑 뒤편에 있는 '미륵전' >


< 미륵전 왼편으로 나란하게 있는 '산신각' >


<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는 '미륵전과 산신각' >


왼편에 있는 개울가에는 나한전(羅漢殿)이 자리하고 있으며 개울을 건너 야산의 기슭에는 천불전(千佛殿)이 자리고 있고, 경내의 왼편 구석에는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이곳의 박물관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문이 잠겨져 있다.


< 개울가에 있는 '나한전' >


< 야산 기슭에 있는 '천불전' >


이 밖에도 경내에는 범종각 건물과 더불어 경내의 오른편으로 명부전과 요사채 건물 및 종무소, 공양간, 무위사 중수공적비 등이 함께 하고 있는데, 경내가 짜임세를 갖추고 있어 내가 옛날에 보았던 무위사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 마당의 왼편에 있는 '범종각' 건물 >


<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무소' 건물 >


< 보제루 앞에 있는 '무위사 중수공적비' >


천천히 사찰을 구경하면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무위사의 앞산이 되는 월각산과 뒤산이 되는 월출산을 바라보니 신선이 머무는 천상의 세계와 같이 구름 속에 머물고 있는데, 이제는 저런 산을 올라가는 것은 오직 마음 뿐인가 보다.

4) 월출산 입구에서 점심식사.
무위사를 떠난 일행은 월출산을 한번 더 구경하겠다는 의미로 다시 국도 13번을 이용하여 5분 정도 달려가면 강진군과 영암군의 경계선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고, 고개에서 또 다시 5분 정도 달려가면 일반적으로 월출산의 종주산행 들머리가 되는 천황사 입구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곳 월출산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천황사에서 부터 산행의 들머리로 시작하여 종주산행을 통하여 종점이 되는 도갑사까지 2번이나 종주한 경험이 있는 산이 되는데, 월출산 입구에 있는 암벽이 너무나 빼어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 종주산행의 들머리가 되는 '월출산' 입구 >


일단 주차장으로 들어가 주차를 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라는 속담과 같이 주차장 인접 지역에 있는 식당 촌으로 들어가는데, 식사는 돼지고기 두루치기 음식으로 다소 늦은 점심식사의 시간을 가진다.
거나하게 식사를 끝내고 나서 인접하게 있는 천황사(天皇寺)나 관람하여 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밀려오는 피로(疲勞)가 엄숩하여 걷는 것을 생략하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기로 한다. -셋째날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