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일.(목요일)
7. 육신사를 다시 찾아보면서.
왜관읍에 자리하고 있는 '가실성당' 에서 떠난 일행은 낙동강변 따라 한 5분 정도 내려가면 '육신사(六臣祠)' 를 가르키는 이정표 만나는데, 이정표 따라 조금 들어가면 도로 중앙에 일주문이 서 있다.
일주문을 지나 다시 조금 더 들어가면 숨겨져 있는 마을 '묘골(묘리)' 입구에 도착하는데, 마을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함께 '육신사 기념관(六臣祠 記念館)'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이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많은 차량과 더불어 관광객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반대로 육신사 기념관 건물에는 문이 굳게 잠겨져 있는데,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여 다소 아쉬움이 일어난다..
이곳 묘골은 사육신의 한분이 되는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 충정공파(忠正公派)' 의 집성촌이 되는데, 구한말 까지 300여 호 집이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광복이전 까지도 10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 호만 남아 있는데, 나는 이곳 묘골을 2009년 10월 10일 및 2021년 11월 28일 등 2번의 방문을 통하여 나의 블로그에 탐방기를 기술하였다.
오늘 다시 묘골을 방문하는 이유는 내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짜가 벌써 3년이 지나갔고, 또한 일행들에게 나의 조상의 뿌리를 한번 더 상기시켜 보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發露)이라 하겠다.
박팽년은 단종 폐위사건으로 단종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상대로 단종 복위 운동을 꽤하다가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5명과 함께 70여 명이 멸족의 화(禍)를 입었는데, 그래서 사육신에게는 후손이 없다.
사육신은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에 의해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 3족 까지 멸문 지하를 면치 못했는데, 박팽년 집안에는 부친 '박중림(朴仲林)' 과 박팽년 5형제 및 아들 2명, 손자 1명 까지 모두가 참수를 당한다.
아버지 박중림은 세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및 경기도에서 관찰사,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고, 박팽년은 세종 16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제학, 충청도 관찰사, 형조참판을 역임 중 청백리로 유명한 인물이다.
순천박씨 시조가 되는 '박영규' 는 딸을 '견훤' 에게 시집을 보내 견훤의 장인으로써 많은 공을 세웠지만, 견훤이 아들과의 갈등으로 '왕건' 에게 투항하자 같이 투항하면서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이 된다.
하지만 후손의 실족으로 족보 유지가 불가능하였다가 고려 말 '박숙정( 朴淑貞)' 을 일조(一組)로 다시 부활하였고 그후 박팽년은 순천박씨 일조 박숙정의 5대 손이 되고 나는 24대 손이 되는데, 박팽년을 기준으로 보면 총정공파 19대 후손이 된다.
마을 안길 초입에 3년 전에는 없었던 카페가 새롭게 생겨 많은 젊은이들이 커피를 즐기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마을 안길 따라 산책을 즐기고 있는데, 마을 안길의 좌우에는 고택(古宅)들이 즐빈하게 도열하고 있다.
< 마을 초입에 새롭게 만든 한옥 '카페' >
< 카페의 안집 '충효당' >
< 마을 안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 >
고택을 구경하면서 마을 안길의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육신사(六臣祠)' 로 들어가는 삼문(三門)을 만나는데, 삼문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육신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 마을 안길 좌우로 도열하고 있는 '고택' >
< 마을의 제일 안쪽 '육신사' 이라고 쓴 현판이 붙어있는 삼문 >
< 삼문의 뒤편에 쓰여있는 '절의묘' 글씨 >
삼문을 통과하여 내부로 들어가면 작은 통로를 중심으로 왼편에 연못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 몇단의 계단 위로 홍살문이 서 있으며 홍살문 뒤편으로 다소 넓은 마당이 자리하고 있다.
< 삼문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홍살문' >
마당 중심에는 '육선생사적비(六先生事蹟碑)' 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와 최규하 전 대통령 및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휘호(揮毫)가 자리하고 있다.
< 마당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육선생사적비' >
< 마당의 가장자리에 있는 박정희와 최규하 및 박준규' 의 휘호 >
마당 왼편에는 우물 및 사당 건립에 따른 헌금 또는 물품을 지원한 사람의 박명록(芳名錄)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 오른편에는 보물 제554호가 되는 '태고정(太古亭)' 및 요사채 건물들이 건축되어 있다.
태고정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초익공계(初翼工系) 구조로 오른편은 팔작지붕으로 건축되었고, 왼편에는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정자 건물이라 하겠다.
태고정은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朴壹珊)' 이 99칸의 종택을 세울 때 그에 딸린 정자로 지였는데, 일반적 정자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부엌과 대청마루 사이에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건물 처마에 '태고정 및 일시루'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태고정(太古亭)이라는 현판은 한석봉 선생님의 글씨가 되고 일시루(一是樓)이라는 글씨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 되는 안평대군이 쓴 글씨이라 한다.
< 보물 제554호 '태고정' 건물 >
마당 뒤편 일단의 축대 위로 '성인문(成仁門)' 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안쪽에 사육신의 여섯분(성산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숭정사(崇正祠)'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6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숭전사' 로 들어가는 성인문 >
마당에서 왼편으로 만들어져 있는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또 다르게 담장으로 구획하고 있는 사당 한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사당에서는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朴仲林)' 선생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忠義祠)' 건물이다.
< 왼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및 박준규 국회의장의 생가터 우물 >
< 박중림 선생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의사' >
< '박중림' 선생님을 기리는 유적비 >
충의사 마당에서 앞으로 내려보면 마을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으면서 마을 앞 까지 매우 낮은 앞산이 펼쳐지는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 이 되는데, 회룡고미형은 거대한 룡(龍)이 자기의 꼬리를 되돌아보는 형상으로 매우 길지(吉地)이라 한다.
< 충의사 마당에서 내려보는 '묘골' 의 전경 >
간단하게 육신사 관람을 끝내고 마을 안길 따라 100m 정도 내려오면 마을 중앙에 '박두을(朴杜乙)' 여사의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박두을 여사는 한국에서 최고의 재벌로 성장시킨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 부인이라 하겠다.
< 육신사에서 마을 '안길' 따라 내려가는 길 >
< 마을 안길 중간지점에 '박두을' 여사 생가터를 알리고 있는 이정표 >
생가에는 안채와 더불어 사랑채로 구성하면서 마당 앞에는 넓은 공터가 함께 하고 있는데, 공터를 포함하여 약 400여 평 정도의 땅을 가진 집이지만 현재는 누구도 거주하지 않아 빈집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 '박두을' 여사 생가터를 알리고 있는 안내문 >
오늘도 동문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만보(一萬步) 걷기에 열중 하였는데, 이렇게 여가를 즐기면서 걷다보면 노화(老化)의 속도가 다소 늘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 3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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