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문화와 산행.

경북 성주군이 품고 있는 문화유산지 "독용산성" 및 독립운동가 "김창숙" 생가를 구경하며.

용암2000 2012. 3. 8. 11:17

2012년 3월 4일 (일요일)

 

1. 독용산성에 오르면서.

오늘 아침 문중 일로 오전에 모 인사를 만나 함께 견학하기 위하여 고향 성주군으로 들어가 업무를 보고 나니, 다소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여 가야산 북쪽 지맥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까지 한번도 방문하지 않고 지나친 "독용산성" 방향으로 길을 잡아본다.

매번 고향을 들락 거리지만 독용산성을 올라가지 않은 주 원인은 독용산성 주변까지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등산이라는 개인적인 노력보다는 차편으로 올라가기가 싫어 차일피일하던 산이기 때문이다.

산성 마을 입구에 이르니 너무나 흐린 날씨로 산성주변에는 안개로 인하여 구름 속에 산성이 완전히 묻혀서 조망이 전연 일어나지 않아 망서리고 있는데, 저 앞에 한무리의 등산팀이 시멘트 포장길 따라 걷고 있어 산행인들에게 다소 미안함을 느끼면서 그들을 추월하여 올라가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운전한다.

 

< "독용산성"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 >

 

입구에서 산성 정상 주차장 까지 약 7.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시멘트 포장길은 매우 협소하여 2대의 차량이 교차하기가 어렵고, 임도는 급커브와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운전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안전을 요구하는 길이다.

혼신의 노력하여 능선에 올라서면 우측편으로 성주댐의 일부분이 발 아래에 머물지만 안개로 조망이 좋지가 않으며 다시 몇 개의 커브를 돌아서 올라가면 산성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먼저 도착한 몇 대의 승용차가 있다.

 

< 임도 능선에서 바라보는 "성주댐" 전경 >

 

< 산성 입구에 있는 "주차장" 과 차량 >

 

독용산성은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해발 955m 독용산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둘레가 7.7㎞에 이르면서,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생활 공간이 넓어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독용산성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도" >

 

이와 같이 계곡을 포함하여 산의 정상을 두른 형태를 "포곡식" 산성이라 하는데, 영남지방의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에 발견되면서 임진왜란 때 전쟁의 화를 전연 입지않은 유일한 산성이기도 하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동. 서. 남, 북에 7개의 포루, 아치형 동문, 수구문, 남소문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동과 서쪽에 군량고를 두어 인근 지역의 군량미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군기고가 발견되어 쇠도끼, 쇠창, 쇠화살, 갑옷들이 출토되었으며 지금은 웅장하던 성곽의 일부와 아취형의 동문만 남아 있고, 산성 내부에는 넓은 터와 더불어 곳곳에 우물이 있으며 1960년 중반 까지 민간 40여 가구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지자체에서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천천히 운무 속으로 들어가면 이내 오른편으로 크다란 산성 옆으로 길이 이어지는데, 산성 방향으로 올라가서 해발 955m "독용산(禿用山)" 정상 방향으로 길을 잡고 걸어가 본다.

 

< 복원된 산성 옆 임도 따라 내려가는 "등산객" >

 

초기에는 너무나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한바탕 곤역을 치루고 나면 산성의 한 부분이 되는 "치(雉)" 에 이른다.

치는 망루와 같이 적의 동태를 살피는 요새 지역이라 여기에 서면 독용산 전체를 조망 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안개로 조망이 전연 일어나지도 않고 오히러 빗방울 까지 떨어질려고 한다.

 

< 산성의 정점에 있는 "치" 의 모습 >

 

< 복원된 "치" 내부에서 한 컷 >

 

여기서 독용산 정상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산성이 복원되지 않고 무너져 내린 상태로 돌들이 산성 윤곽을 만들고 있어 매우 안타까움이 일어나는데, 이 산성 전체 길이 중 1/3만 복원하고 나머지는 아직도 복원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 아직도 눈으로 쌓여 있는 "산성길" >

 

< 복원되지 않고 있는 산성 "석축" > 

 

안개로 인하여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 할 것 같아 독용산 정상 가는 것을 포기하고 산성 내부로 내려와 넓은 도로 따라 남문 방향으로 조금 걸어보지만, 오늘은 아무런 조망이 없기 때문에 산성 내부에서 방향 감각만 상실 됨으로 더 전진을 포기하고 주차장 방향으로 되돌아서 나온다.

 

< "남문" 으로 가는 길을 걷다가 안개로 인하여 >

 

< "안개" 로 인하여  방향 감각도 상실되고 >

 

한참을 걸어 나오니 동문에 이르는데, 동문은 완전히 복원하여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동문 뒤편에는 산성 내부 곳곳에서 발견한 불망비, 선정비 등 산성 건립에 따른 치적을 기록한 비석들이 한 곳에 모아 진열하면서 설명서가 잘 기술되어 있다.

 

< 안개 속에 있는 "동문" 전경 >

 

< 아름답게 복원된 "동문" 의 뒤 모습 >

 

< 산성의 축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비석" > 

 

또한 동문에서는 한무리의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안개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있어 나도 그들 따라 흉내 내어 보는데, 몇 만원짜리 디카 카메라로는 작품이 영 나오지 않는다.

 

< "사진작가" 흉내를 내어 보면서 >

     

2.  심산 김창숙 생가 방문.

독용산성에서 내려와 성주읍 방향으로 조금 가면 대가면 소재에서 인접하게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심산 "김창숙(金昌淑,1879∼1963년) 선생님" 의 생가가 있다는 이정표 따라 그 방향으로 들어가 보는데, 김창숙씨는 한국의 유학자, 독립운동가, 정치가, 교육가이며, 현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이다.

심산의 생가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 벽옹(앉은뱅이 노인)이며, 조선 선조 대의 명신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의 13대 종손이다.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깨어있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써,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과 함께 삼절(三節)의 한사람으로 칭송된다고 한다. 

특히 심산은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이 되는 금연운동으로 모금한 돈이 목표액 보다 훨씬 부족하자 그 처리를 위한 회의에 심산 선생님은 성주군 대표로 참석하지만,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여 일진회에서 관리하고자 한다.

일진회는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 정당이라고 하여 불가함을 역설하여 후손을 위하여 교육기관으로 투자하기로 하여 심산의 고향에 있는 "청천서당" 내에 "성명학교(星明學校)" 를 세워 계몽사상과 항일 독립정신을 가르쳤으나, 경술국치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 사도실 마을에 있는 "청천서당" 의 전경 >

 

< "성명학교" 로 사용한 건물 > 

  

일제의 폭압 통치에서 다 죽은 듯 조용하던 한 민족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으로 거족적 항쟁으로 일어나면서, 당시 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 에 천도교,기독교, 불교 대표가 참여하여 범 종교적 일체성을 보여주었으나 유림 대표가 빠졌는데 대하여 격분한다.

가장 큰 교단과 큰 세력을 자랑하고 있는 유교 측에서 민족대표 한 사람도 못낸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면서 심산을 주축으로 한 유림 측은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청원서" 를 제출하는 "파리장서" 운동을 전개하게 되며, 나석주 폭탄 투척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또한 심산은 경북을 대표하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임시정부가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으로 국가체제를 선포하였는데도 유학자 심산은 기꺼이 이에 참여한다.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독립에 투신하다가 1927년 일제에 잡혀 해방될 때 까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일제의 가옥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불구의 몸이 되어 평생 앉자서 지내는 신세가 된다. 

해방 후 심산은 1946년 "반탁 담화문" 을 발표하며 신탁통치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싸울 것을 호소하고, 또 동아일보를 통하여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조선 공산당에 경고문을 발표하여 공산당의 행위를 매국 민족 반역행위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지만, 이승만의 폭압적 통치기간으로 심산은 야당 어느 정치인 보다 더 격력하게 이승만과 싸우고 저항하므로 결국 이승만 세력에게 성균관 대학을 빼앗긴다.

1957년 성균관대학 운영 및 유도회 총 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1960년 "이승만대통령 사퇴권고" 를 발표하는 등 그의 반독재 투쟁은 그칠 줄 모르게 투쟁을 한다.

가사를 돌보지 않아 말년에 그는 한 채의 집도 없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여관과 병원을 전전했고, 그의 셋째 아들이 서울에서 자동차 운전수를 하여 벌어온 돈으로 간신히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 나가다가 1963년 서울중앙의료원에서 향년 84세로 서거한다.

사후 더욱더 안타까운 일은 현재 삼성그룹에서 인수한 성균관 대학교는 건립 초기에 건축한 "심산관" 은 초대 총장이 되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호에서 따온 것 인데, 삼성 이병철 선대 회장의 호를 딴 "호암관" 으로 변경하여 심산의 흔적을 완전히 말살하고 있으며 "성균관대는 삼성의 것’" 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심고 있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 앞에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한 애국자를 존명도 없이 살아지게 만드는 국가나 재벌의 처신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만든다.

이렇게 독립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전개한 심산의 생가를 오늘 방문한 것에 대하여 감개 무량하게 만드는데, 생가는 입구 대문과 함께 사랑채와 안채 건물로 되어있다,

 

< 심산 "김창숙" 생가의 담장 전경 >

 

 < 생가로 들어가는 "대문" >

 

< 허물어져 가고 있는 생가 "사랑채 " >

 

< 며느님이 기거하고 있는 생가 "안채" >

 

안채에는 심산 선생님의 며느님이 기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방문할 때 출타로 인하여 만나지 못하고 한마리의 개가 집을 지키면서 나그네를 반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