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3일 (금요일)
오늘도 아침부터 많은 비가 내리므로 늦게 일어나 문중의 업무를 보기 위하여 나의 고향인 성주군 성주읍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상담을 끝내고 나니, 그래도 많은 시간이 남아 느근하게 산책이나 하는 마음으로 "세종대왕자(世宗大王子)" 태실이 있는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로 들어가 본다.
성주군에는 3곳에 왕실 태실지(胎室地)가 있는데, 세종대왕의 왕자들의 태를 집단적으로 모시고 있는 월항면 인촌리와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에 있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의 태실지 및 마지막으로 세종대왕의 종손인 제6대 단종의 태는 월항면 인촌리 세종대왕의 왕자와 함께 묻혀 있다가 단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나서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법림산으로 이전 및 조성하여 성주군에는 3곳이나 태실이 존재한다.
이렇게 한양에서 수천리(千里)나 떨어진 이곳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3곳의 태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조선시대 우리나라 왕실에서도 알아주는 길지(吉地)가 성주군에서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참외로 유명한 초전면 비닐 하우스 촌을 지나면서 한적한 시골길로 조금만 더 달려가면 산의 정상 부위에 짖은 안개가 내려 있으면서도 병풍과 같이 둘려쳐 있는 해발 742m "선석산(禪石山)" 언저리로 들어가는데, 선석산 지맥이 360도로 회돌아 있는 아담한 분지 속에 해발 258.2m "태실" 봉우리가 오뚝 솟아있는 야산이 빗속에 머물고 있다.
< 안개 속에 병풍같이 둘려쳐 있는 "선석산" 지맥 >
< 선석산 내부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 봉우리" >
왕실 묘소는 제7대 세조에게 사사(賜死)되어 강원도 영월 땅에 묻혀있는 "단종" 묘소를 제외하고는 임금님이 당일로 왕래가 가능한 거리로써 한양에서 50Km 이내에 있지만, 이역만리 성주군에 있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은 18명의 왕자 중 장자인 제5대 "문종" 의 태실을 제외하고 17명의 왕자 태실과 문종의 아들인 단종 태실 1기, 미상의 태실 1기 등 총 19기의 태실이 봉안되어 있다.
한대의 차량도 없는 주차장에 모닝을 파킹하고 나서 안내소 옆에 있는 태실 설명문을 읽어보는데,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에는 수년 전 몇번 방문한 경험이 있지만 그 때 마다 태실에 대한 설명문이 없어 그냥 구경만 하고 다녀 가므로 인하여 크게 관심없이 지나친 것을, 오늘은 태실의 내력을 상세하게 읽어본다.
< "세종대왕의 자 태실" 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 >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이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생한 후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일부 민간인들은 태를 직접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게 태운 후,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한 반면,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하여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관리하였다고 한다.
이 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 에서는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안치하기 위하여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胎室)" 이라고 불려진다.
또한, 태봉(胎封)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공이 왕으로 즉위 할 경우에 격(格)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운 것을 임금님의 태실이라고 한다.
이어, 설명문 옆에 있는 안내소에 무료하게 앉자 있는 안내원에게 태실의 자료도 얻어 주머니에 넣고서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소나무 숲 속으로 만들어진 돌계단 따라 올라간다.
< 울창한 숲 속을 통하여 태실로 올라가는 "돌계단" >
돌계단 끝에 이르며는 야산 봉우리 정상에 난간석으로 만들어진 태실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는데, 경건한 마음으로 난간석 주변에 만들어진 나무테크에 올라서서 한쪽 코너에 기술하고 있는 태실분포도와 태실 구조도를 살펴본다.
< 돌계단 끝에서 만나는 "세종대왈자태실" 전경 >
< 태실이 놓여있는 "분포도" >
< 태실의 단면을 나타내는 "구조도" >
아을러 예조판서 "홍윤성" 씨가 지은 세종대왕태봉 가봉비문에 의하면 세종 20년(1438년)부터 4년 동안 태실을 조성하였다고 하면서 "공손히 생각하건데, 우리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즉위한 21년에 유사(有詞)에 명하여 땅을 점(占)치게 하고,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를 성주군 북쪽 20리 선석산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표시하였는데....." 라고 기술되어 있다.
천천히 나무테크 따라 주변을 돌아보는데, 뒤줄의 입구에 어린 단종을 죽이면서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 의 태실이 놓여 있고 뒤줄의 제일 안쪽 구석자리에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의 태실이 한줄의 극과 극으로 놓여 있음이 아이러니컬 하게 보인다.
<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세조 즉 "수양대군" 의 태실 >
< 뒤줄 제일 구석에 있는 "단종" 태실 >
< 왼편 구석에 있는 "단종" 태실 방향에서 바라보는 태실 전경 >
우산을 바쳐 들고 태실 주변을 구경하고 있으니 나와 같이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사람 한명이 올라와 태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기록까지 하면서 연구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야산을 내려와 개울 건너편에 있는 "선석사(禪石寺)" 경내로 들어가 본다.
선삭산이 품고 있는 선석사는 신라의 고찰로써 신라 효소왕 1년(692년) "의상대사" 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건립되었으며 "신광사(神光寺)" 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나옹대사 "혜근(惠勤)" 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는데, 이 때 절을 옮기려 터를 닦을 때 큰 바위가 많이 나왔다고 하여 선석사라고 고쳐 불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층의 사천왕문(四天王門)이 높게 건축되어 있지만 아직도 사천왕상이 봉안되지 않아 다소 산만한 분위기가 일어나고, 사찰의 마당에 이르면 고풍스러운 대웅전 건물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 선석사 입구에 있는 "사천왕문" 건물 >
대웅전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전 내부에 있는 선석사 "영산쾌불탱화" 는 보물 제1608호로 지정 될 정도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고찰이다.
< 선석사의 "대웅전" 전경 >
주변에는 종각과 더불어 명부전, 칠성각, 태장전, 정법료, 산신각,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지만, 우중이라서 그런지 한명의 불자도 움직이지 않아 다소 적막한 분위기가 엄습하여 온다.
< 선석사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종각" >
추위와 더불어 빗속이라 충분하게 구경을 이루지 못하고 선석사 경내를 떠나기로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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